선가귀감(7) _ 생각을 끊고 반연을 잊다(絶廬忘緣)

五有一言(오유일언)하니 絶慮妄緣(절려망언)하고

兀然無事坐(올연무사좌)하니 春來草自靑(춘래초자청)이로다

내게 할 말이 하나 있다.

‘생각을 끊고 반연을 잊어 말없이 올연히 앉았으니 봄이 왔는지 풀이 저절로 푸르구나’

생각을 끊고 반연을 잊는다는 것은 마음에 얻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한가로운 도인이다. 아하! 그 사람 하는 것, 본래 맡은 것도 없고 할 일도 없어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자네. 녹수청산에 마음대로 소요하고, 어촌 주막에 거리낌 없이 드나드네. 오늘이 며칠인지 내 알 바 아니로되 봄이 왔는지 산천이 또 푸르구나.

이것은 특별히 한 생각 빛을 돌이켜 마음의 성품을 비추는 것을 찬탄한 것이다.

선가귀감(6) _ 말에 잃고 마음에 얻음(先之於口 得之於心)

是故(시고)로 若人(약인)이 先之於口則拈花微笑(실지어구즉염화미소)가

皆是敎迹(개시교적)이요 得之於心則世間麁言細語(득지어심즉세간추언세어)가

皆是敎外別傳禪旨(개시교외별전선지)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어버리면 꽃을 들고 미소한 것도 교의 자치에 불과하고 마음에 얻으면 세간의 거친 말이나 잔소리도 모두 교 밖에 따로 전한 선의 종지가 될 것이다.

법은 이름이 없다. 때문에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법은 모양이 없다. 때문에 마음으로 상상하지도 못한다. 입으로 말해보려 하면 본래 마음자리를 잃어버리고, 그러면 부처님이 꽃을 들자 가섭이 미소 지은 것이 모두 말에 떨어져서 마침내 죽은 물건이 되고 만다.

마음에 종지를 얻고 나면 항간의 이야기가 모두 좋은 법문이 될 뿐만 아니라, 제비 소리까지도 실상의 법문인 줄 깊이 알리라. 그렇기 때문에 보적 선사는 통곡하는 소리를 듣고 깨달아 몸과 마음이 뛸 듯이 기뻐 춤을 추었으며, 보수선사는 주먹질을 하며 싸우는 것을 보고 본래 면목을 활연히 깨달았다. 이는 선과 교의 깊고 옅음을 밝힌 것이다.

선가귀감(5) _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다(三處傳心)

世尊(세존)이 三處傳心者(삼처전심자)는 爲禪旨(위선지)요

一代所說者(일대소설자)는 爲敎門(위교문)이라

故(고)로 曰(왈), 禪是佛心(선시불심)이요 敎是佛語(교시불어)니라

세존이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은 선의 종지가 되었고 일대에 걸쳐 설한 것은 교의 문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 말씀이다.

세 곳이란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반씩 나눈 것이 하나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든 것이 둘이며, 두 그루 사라나무 아래 곽 속에서 두 발을 내보이신 것이 셋이다. 이른바 가섭에게 특별히 선의 등불을 전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일생 동안 설한 것이란 49년 동안 설하신 5교를 말한다. 1은 인천교, 2는 소승교, 3은 대승교, 4는 돈교, 5는 원교이다. 이는 아난이 교해(敎解)를 유통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과 교의 근원은 부처님이시고, 선과 교가 나누어진 갈래는 가섭과 아난이다.

말 없는 것으로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은 선이요, 말 있는 것으로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은 교이다. 나아가 마음은 선의 법이요, 말은 교의 법이다. 법은 비록 한맛이나 견해는 하늘과 땅처럼 현격히 다르다. 이것은 선과 교의 두 길을 구분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