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가귀감(4) _ 마음 그리고 부처와 중생(心.佛.衆生)

强立種種名字(강립종종명자)하야 或心或佛或衆生(혹심혹불혹중생)이라 하나

不可守名而生解(불가수며이생해)니 當體便是(당체편시)이라 動念卽乖(동념즉괴)니라

굳이 이런저런 이름을 붙여 마음, 부처 혹은 중생이라 하나 이름이 다르다고 다른 생각을 내어서는 안 된다.

한 물건 그 자체는 그것으로 그만일 뿐이다. 생각을 움직이면 어긋나 버린다. 한 물건을 두고 구태여 세 가지 이름을 세운 것은 가르치는 형편상 부득이해서이다. 이름을 지켜 견해를 내지 말라는 것은 선의 입장에서 부득이해서 하는 말이다. 한쪽으로 들면서 한쪽으로 눌러 놓으며, 돌려세우고 돌려 깨뜨리는 것이 모두 법왕의 법령이 자유자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위의 말을 결론지어 아래의 말을 일으켜 부처와 조사들이 방편을 쓰는 경우가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선가귀감(3) _ 법과 사람(起, 人)

然(연)이나 法有多義(법유다의)하고 人有多機(인유다기)하니 不妨施設(불방시설)이로다

그러나 법에도 여러 가지 뜻이 있고 사람에도 여러 근기가 있다. 따라서 여러 가지 방편을 제시한다.

법이란 한 물건이고 사람이란 중생이다. 법에는 변하지 않는 뜻과 인연을 따르는 뜻이 있고 사람은 근기에 따라 단박에 깨치는 경우와 점차적으로 닦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문자나 말로 설명하는 방편이 제시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공적(公的)인 입장에서는 바늘 끝만큼도 용납할 수 없으나 사적(私的)인 입장에서는 수레도 오고 간다’한 것이다.

중생이 비록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으나 태어남에 지혜의 눈이 없어 달게 윤회를 받는다. 만약에 세상을 벗어나게 하는 금으로 만든 칼이 아니면 누가 무명의 두터운 망막을 긁어낼 것인가?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 즐거운 저 언덕에 이르는 것은 모두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은혜 때문이다. 그러므로 갠지스 강의 모래 수만큼 한량없는 목숨을 바치더라도 그 은혜의 만분의 일도 갚을 수 없다.

이는 새로 닦는 수행의 방법을 널리 들어 부처님과 조사들의 깊은 은혜에 감사드려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선가귀감(2) _ 바람 없는 바다에 물결이 일어나다

佛祖出世(불조출세)가 無風起浪(무풍기랑)이로다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나온 것은 바람 없는 바다에 물결이 일어난 것이다.

선(禪)의 기백은 나와 불조를 똑같은 동격으로 보는 데 있다. 물론 중생이 부처님에 의해 교화제도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지만 내가 지닌 각성 그 자체에서 볼 때 나는 제도 받을 대상이 아니다. 한 물건을 가진 존재로서는 이 세상 모두가 똑같아 차별이 없다.

바람 없는데 파도가 일어났다는 것은 공연히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다. 본래 부처인데 부처가 되려고 하는 것은 남대문에서 서울을 가려는 것과 같다. 이미 서울에 왔는데도 서울인 줄 모르고 다른 데로 가려고 하는 어리석음이라는 뜻이다.

연지 찍고 분 바른다는 것은 얼굴에 화장한다는 뜻으로 본래면목은 꾸밀 필요가 없는 원만한 그대로의 모습이라 남에 의해 고쳐지거나 바꾸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미오(迷悟)에 관계없는 개개인이 본래 지닌 불성, 바로 본분(本分)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