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가귀감(1) _ 한 물건

有一物於此(유일물어차)하니 從本以來(종본이래)로 昭昭靈靈(소소영영)하여

不曾生不曾滅(부증생불증멸)이라 名不得狀不得(명불득상불득)이니라

여기 한 물건이 있다. 본래 밝고 신령스럽지만 이것은 일찍이 생겨나거나 소멸되는 일이 없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다.

‘여기 한 물건이 있다’는 말로 「선가귀감」의 첫 구절이 시작된다.

한 물건이란 우주 만유의 본원인 법성(法性) 혹은 불성佛性의 당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는 것이면서도 만유를 생성케 하는 무한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모든 능동적인 역할을 다할 수 있다 하여 주인공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는 곧 사람의 마음을 두고 한 물건이라 일컬은 것이다. 「금강경오가해설」에는 일착자(一着子)라고 표현했다. 이 한 물건을 찾는 것이 바로 부처를 찾는 것이다.

이 한 물건을 밝고 신령스러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세상의 모든 이치가 이것에 의해 통해지므로 밝다한 것이고 신비스러운 능력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신령스럽다 한 것이다. 이것은 시공을 초월했으며 천지보다 먼저 생겼고 또한 천지보다 나중까지 남아 있다 하여 선천지후천지(先天地後天地)라고 묘사해 놓은 곳도 있다.

불교의 특성

불교의 특성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지만 무엇보다도 종교적 정서가 명상적이고 사색적이고 정적(靜的)인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신을 전제하지 않는 인본주의(人本主義)의 종교로 서양의 유일신을 내세우는 신본주의(神本主義)와 사뭇 대조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조인 석가모니의 생애에서 보여지듯이 인간의 내면세계를 밝혀 가는 수행의 과정이 맹목적인 신념이 아닌 끝없는 자기 성찰과 반조(返照)에서 오는 명상적 색채를 지니고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룸비니 동산 숲 속의 무우수란 나무 밑에서 태어나고 보리수 아래서 성도하며 녹야원이라는 사슴이 서식하던 동산의 숲 속에서 설법을 시작하고 마지막으로 쿠시나가라의 사라수 밑에서 열반에 드십니다.

나무 밑에서 태어났다가 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이루고 나무 밑에서 설법을 하다가 나무 밑에서 돌아갑니다. 이렇기 때문에 한 마디로 불교의 정서는 나무 밑의 사색이고 숲속의 명상입니다. 어느 명상가가 종교에 귀의하는 것은 숲 속의 오솔길을 찾는 마음이라 하였습니다.

또 불교의 수학(修學)을 세 가지 면으로 나누어 불교 전체를 설명하는 용어에 삼학(三學)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계(戒)·정(定)·혜(慧)의 세 가지를 닦고 배워서 부처가 되는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계(戒)는 계율을 말하고 정(定)은 마음을 맑고 고요하게 가지는 선정(禪定)을 말하며 혜(慧)는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계율은 수행에 임하는 몸가짐과 마음가짐에 대한 행동윤리로 도덕적 선(善)을 전제로 하는 고차원적인 불교 윤리입니다.

선정은 정신의 통일된 상태로 의식의 분열이 없어져 안정과 평화가 유지되는 정중(正中)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혜는 밝고 슬기로운 예지의 빛이 나오는 수행된 마음의 지성입니다. 이 삼학을 다시 일반적인 개념으로 대비해 말하면 윤리와 신앙과 철학입니다.

따라서 불교는 윤리와 신앙과 철학이 삼위일체로 조화된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지안스님 강의. 월간반야 2001년 1월 (제2호)

불교의 근본교리 (8)연기법

⑧ 애(愛 trsna)

애(愛)란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고 싶어하듯 무엇을 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애욕(愛慾)을 갈애(渴愛)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드는 것을 만나면 애착심(愛着心)이 생기고 마음에 들지 않는 싫은 것을 만나면 증오심(憎惡心)이 생기는데 이 모두가 애(愛)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 애(愛)는 인간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본능적 욕구이기도 합니다. 오욕락(五慾樂)인 이성간의 성적인 욕구와 음식에 대한 욕구, 수면에 대한 욕구, 재물에 대한 욕구 명예에 대한 욕구가 모두 애(愛)인 것입니다. 고(苦)·낙(樂)등의 감수작용이 심해질수록 거기서 일어나는 애착심 증오심도 강해지면서 다음 지(支)인 취(取)의 집착이 애를 통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⑨ 취(取 upadana)

취(取)란 가지려고 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집착을 뜻하는 말입니다. 맹목적인 충동으로 인한 애착이 생겨 갖고 싶어하는 소유욕 등이 바로 취인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경계가 이 취에 의하여 주관의 영역 안으로 들어와 업을 발휘하는 힘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취는 결국 업을 짓는 전위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⑩ 유(有 bhava)

유란 존재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곧 생존으로서 생존 자체의 근본을 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앞의 취가 업을 일으키면 유가 다음 지(支)인 생을 있게 하는데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유라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어떤 존재 자체를 건물에 비유한다면 그 건물이 앉는 다리 즉 터를 유라 하겠습니다. 또 생물의 생명이 있다 하든가 중생의 업이 있다 할 때 있다는 의미 그 자체를 유(有)라는 한 범주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는 윤회하고 있는 모든 존재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쓰여 욕유(欲有)·색유(色有)·무색유(無色有)로 구분해 말하기도 합니다. 또 생사가 되풀이되는 과정을 유로 나타내어 생유(生有)·본유(本有)·사유(死有)·중유(中有)의 사유(四有)설이 있기도 합니다.

⑪ 생(生 jati)

생명체가 태어나는 현상을 말하며 동시에 생명체의 구성 요소가 완성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중생의 종류에 따라 태어나는 형태가 다르다 하여 이를 구분 태생(胎生)·난생(卵生)· 습생(濕生)·화생(化生)이라 하여 사생(四生)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출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태에서 태어나거나 알에서 태어나고 습진 데서 생겨나고 생명체 자체가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⑫ 노사(老死 jaramarana)

노사란 모든 생존하는 존재가 현상적으로 쇠멸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곧 생의 반대 현상으로 소멸되어 생존의 기간이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는 현상의 모든 존재는 무상에 속해 있는 생멸하는 존재이므로 있던 것은 없어지고 없던 것이 생겨납니다. 생을 조건으로 하여 노사가 있다면 노사를 조건으로 하여 생이 있다고 반대로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이인연의 각 지(支)는 생사가 어떤 과정으로 있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이론인데 생사가 모두 고(苦)이므로 이 고의 유발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이기도 합니다. 또 이 노사는 근심(憂)· 비애(悲)· 고통(苦)·번민(惱)을 동시에 안겨주는 것입니다.

이상의 12인연의 설은 석가모니가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처음 정각을 이루었을 때 중생세계의 현실적인 모습을 관찰하고 이 12인연의 이치를 알아냈다는 것으로 석가모니의 깨달음의 내용을 설명하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각 지(支)의 일어나는 순서가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행이 일어나고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일어나 마지막 노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관찰하는 것을 순관(順觀)이라 하며 이는 중생세계가 현전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반대로 노사로부터 무명으로 거슬러 가면 중생세계의 고(苦)가 소멸되고 부처의 세계가 현전하는데 이를 역관(逆觀)이라 합니다. 또한 12인연 전체의 관계를 인과관계로 보고 이 인과관계를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에 걸쳐서 설명 인과관계를 두 번으로 보는 것을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 하여 고래로 이설을 많이 인용해 왔습니다. 곧 무명과 행은 과거의 원인이고 식·명색·육입·촉·수는 현재의 결과이며 애·취·유의 세 지분은 현재의 원인이고 생·노사는 미래의 결과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상황을 두 가지 면으로 관찰하여 그 실상이 어떠한가를 파악하는 이론입니다.

인간의 존재를 결과로서의 산물로 보며 동시에 원인으로서의 활동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자로서의 인간은 의식과 명색이라는 신심의 요소와 육체의 감각인 육입에 의해서 객관 대상을 접하고 그것을 감수(感受)하세 됩니다. 또한 활동하는 자로서의 인간은 애욕에 뿌리를 두고 어떤 대상에 집착하여 욕구실현의 행동을 합니다. 이리하여 인간은 다시 존재하는 자로서의 자기 원인을 규명하여 무명과 행을 찾아내고 현실의 모습인 애·취·유를 통해서 새로운 생·노사의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삼세에 걸쳐서 두 번의 인과를 이야기 하지만 언제나 현재가 중심이 됨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다만 이 현재를 관념적으로 반성할 때 과거의 두 가지 원인과 현재의 다섯 가지 결과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경험적으로 인식할 때는 현재의 세 가지 원인과 미래의 두 가지 결과인 인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1년 10월 (제1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