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전변(前空轉變)은 개유망견(皆由妄見)이니
(앞의 공이 바뀌어 변하는 것은 모두 망견(妄見)이기 때문이니)
앞에서 말한 공(空)을 ‘이렇다 저렇다’ 라며 논하는 것은 모두 중생들의 망견때문이라는 것이다. 본래 공적(空寂)한 도(道)의 자리에는 말 길이 끊어지고 마음의 갈 곳도 없는 것인데, 이것을 현상적으로 끌어내어 설명하는 것은 모두 망령된 견해로 인해 이렇게도 논의되고 저렇게도 설명되어진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지만 눈병이 난 눈에는 공화(空華)가 보이듯이, 진여(眞如)의 본체는 여여부동(如如不動)하지만 생멸(生滅)의 현상이 망령되이 망견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 예를들어 어떤 하나의 사물을 두고 여러종류의 생명체들이 함께 볼 때에도 제각기 업식(業識)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눈마다 모양과 색깔이 다르게 보이는데, 업식은 곧 망견(妄見)인 것이다.
불용구진(不用求眞)이요 유수식견(唯須息見)이니라
(참됨을 구하지도 말고 오직 모름지기 망견을 쉴 것이니라.)
진여본성(眞如本性)은 밖에서 구하여 얻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이것을 깨달아야 되겠다고 애써서도 옳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자기 소견을 벗어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식견(息見)의 견은 분별 망상에서 일어나는 자기의 알음알이 소견을 말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망념(妄念)의 생각들이 송두리째 쉬어버리면 진여본성은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달리 주관적인 생각을 고쳐먹고 ‘이렇게 해야겠다’며 주객(主客)의 대립을 세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하늘의 구름이 걷히면 해가 나타나는 것처럼, 자신의 망념을 쉬어버리면 진여자성(眞如自性)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요산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9년 2월 제9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