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 (12) 앞의 공이 바뀌어

전공전변(前空轉變)은 개유망견(皆由妄見)이니

(앞의 공이 바뀌어 변하는 것은 모두 망견(妄見)이기 때문이니)

앞에서 말한 공(空)을 ‘이렇다 저렇다’ 라며 논하는 것은 모두 중생들의 망견때문이라는 것이다. 본래 공적(空寂)한 도(道)의 자리에는 말 길이 끊어지고 마음의 갈 곳도 없는 것인데, 이것을 현상적으로 끌어내어 설명하는 것은 모두 망령된 견해로 인해 이렇게도 논의되고 저렇게도 설명되어진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지만 눈병이 난 눈에는 공화(空華)가 보이듯이, 진여(眞如)의 본체는 여여부동(如如不動)하지만 생멸(生滅)의 현상이 망령되이 망견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 예를들어 어떤 하나의 사물을 두고 여러종류의 생명체들이 함께 볼 때에도 제각기 업식(業識)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눈마다 모양과 색깔이 다르게 보이는데, 업식은 곧 망견(妄見)인 것이다.

불용구진(不用求眞)이요 유수식견(唯須息見)이니라

(참됨을 구하지도 말고 오직 모름지기 망견을 쉴 것이니라.)

진여본성(眞如本性)은 밖에서 구하여 얻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이것을 깨달아야 되겠다고 애써서도 옳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자기 소견을 벗어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식견(息見)의 견은 분별 망상에서 일어나는 자기의 알음알이 소견을 말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망념(妄念)의 생각들이 송두리째 쉬어버리면 진여본성은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달리 주관적인 생각을 고쳐먹고 ‘이렇게 해야겠다’며 주객(主客)의 대립을 세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하늘의 구름이 걷히면 해가 나타나는 것처럼, 자신의 망념을 쉬어버리면 진여자성(眞如自性)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요산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9년 2월 제99호

신심명 (11) 근본에 돌아가면

귀근득지(歸根得旨)요 수조실종(隨照失宗)이니

(근본에 돌아가면 뜻을 얻지만 비춤을 따르면 종지를 잃는다)

근본에 돌아간다는 것은 경계를 따라가는 식심을 자신의 본성자리로 거두어 들인다는 뜻이다. 선문(禪門)에서는 회광반조(廻光返照)라는 말이 자주 쓰이는데, 이것은 객관의 대상을 찾아 불멸을 일으키는 식심(識心)을 쉬게 하고 고요히 내면의 자성을 응시하려는 것이다. 또 <능엄경>에는 반문문성(反聞聞性)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귀가 소리를 듣는 경우에는 이근(耳根)이 성진(聲塵)을 따라가는 것이지만, 성진인 소리를 듣지말고 듣는 주체, 즉 듣는 성품을 듣는다는 것이다.

수조(隨照)란 일어나는 식심(息心)을 따라 객관의 경계를 향하는 번뇌망상의 움직임인데, 이것이 횡행하면 근본을 망각하여 도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수유반조(須臾返照)하면 승각전공(勝却前空)이니라.

(잠깐 돌이켜 비춰보면 앞은 공함보다 뛰어나니라.)

잠깐동안 돌이켜 비춰보면 객관을 향하여 치구(馳求)하던 모든 망경계(망경계)는 사라지고, 주관과 객관의 대(對)가 끊어진 도의 당체를 파악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객관의 경계를 부정하여 말하던 공(空)을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즉 현상의 존재를 공화(空化)시켜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공의 경계보다 반조하는 찰나에 체득하는 무위(無爲) 의 도가 훨씬 수승하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반조(返照)는 사골르 초월한 직관의 세계인 반면, 앞 구절에서 말한 수조(隨照)는 마음이 경계를 따라 움직이는 사고를 말하는 것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12월 제97호.

신심명 (10)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다언다려(多言多慮)하면 전불상응(轉不相應)이요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더 상응치 못하는 것이요)

도(道)의 진리는 말을 듣고 이해하거나 생각으로 궁리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갈 곳이 없어진[言語道斷 心行處滅] 경지에서 터득되어지는 것이 도이므로 말과 생각으로써 접근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말과 생각으로써 도에 접근하려 한다면 더욱더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

‘도는 아는 데도 속하지 아니하고 모르는데도 속하지 않는다[道不屬知不知]’라는 말처럼, 알고 모르는 지식의 대상이 아닌 도를 이론적 논의나 사변적 논리로 설명하려는 것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절언절려(絶言絶慮)하면 무처불통(無處不通)이니라

(말과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

말길이 끊어지고 또한 생각이 나아갈 곳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도는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식심(識心)의 분별이 사라진 경계에서만 도를 만날 수 있는 것이지, ‘이것이냐 저것이냐’며 기호에 맞추고 비위에 맞추는 취사심(取捨心)에서는 도를 만나지 못한다.

어느 산이든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더 올라갈 길이 없어 사방이 허공으로 트여버리듯이, 이치의 궁극에 이르면 모든 것이 도(道)로 통해진다. 그러므로 ‘대도는 문이 없다[大道無門]’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상대적 차별에서는 말이 필요하며 생각도 일어나지만, 절대의 무분별에서는 말이 없고 생각도 끊어지는 것이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11월 제9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