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구무법(無咎無法)이요 불생불심(不生不心)이니라.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나지 않으면 마음이라 할 것도 없다.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다는 것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무심의 경게에서는 모든 것이 원융무애하여 개체적 개별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경지에는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주객(主客)이 없으면 능소(能所)가 벌어지지 않는다. 일체의 명상(名相)이 끊어져 언어의 설명이 미치지 못한다.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마음이라 할 것도 없는 것이다.
이 얼마나 초연한 말인가. <능엄경>에는 ‘마음이 생기니 가지가지의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으지니 가지가지의 법의 없어진다. (心生則 種種法生 心滅則 種種法滅)’이라고 했다. 마음이 법을 탄생시키며 또 소멸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없는 경우에는 생길 법도 없는 것이며 벌어질 법도 없는 것이다.
중봉스님의 송(頌)에서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법법지인무구구(法法只因無咎咎) / 심심다위불생생(心心多爲不生生) / 한원야곡무산월(寒猿夜哭巫山月) / 객로원래불가행 (客路元來不可行)’ “법이라는 법이 다만 허물이 없기 때문에 허물이요 / 마음이라는 마음이 다분히 생기지 않으므로 생긴다. / 무산의 달을 보고 우는 원숭이의 차가운 울음소리 / 길가는 나그네도 원래 이곳은 다니지 못하네.”
능수경멸(能隨境滅)하고 경축능침(境逐能沈)하야
(주관은 객관을 따라 없어지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버려)
능(能)은 능동의 주체 즉 주관이요, 경(境)은 객관이다. 주관이 객관을 따라 없어져 버리며 객관은 주관을 좇아 사라져 버린다는 것은, 주객(主客)의 상대 중 어느 한 쪽이 없으면 서로 소멸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객이 남아있으면 진여자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늘을 날아가는 솔개 한 마리를 바라보다가 점점 멀리 날아가 시야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으면 솔개를 바라보던 시각도 없어진다. 반대로 시야에 들어오던 솔개도 눈을 감아버리면 보이지 않듯이, 주객은 항상 서로 함께 마주해 있는 것으로 한 쪽만으로는 결코 자신의 영역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눈이 새를 보는 주객의 상대가 눈이 없어도 못보고 새가 없어도 못 보는 것이다.
경유능경(境由能境)이요 능유경능(能由境能)이니
(객관은 주관을 말미암은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을 말미암은 주관이니)
주관이 있기 때문에 객관이 있으며, 또 객관이 있기 때문에 주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주객이 서로 상대하여 서 있는 것도 대도(大道)를 장애하므로, 주객이 끊어져야 도에 계합한다. 주객이 나누어진 경계는 마치 파도가 일어나면 거울같은 본래의 수면(水面)이 깨어져 버리는 것처럼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는 생멸(生滅)의 경계로서, 이러한 생멸 속에서는 진여자성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즉 주관과 객관을 버려야 진여(眞如)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9년 5월 제10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