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 (15)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무구무법(無咎無法)이요 불생불심(不生不心)이니라.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나지 않으면 마음이라 할 것도 없다.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다는 것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무심의 경게에서는 모든 것이 원융무애하여 개체적 개별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경지에는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주객(主客)이 없으면 능소(能所)가 벌어지지 않는다. 일체의 명상(名相)이 끊어져 언어의 설명이 미치지 못한다.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마음이라 할 것도 없는 것이다.

이 얼마나 초연한 말인가. <능엄경>에는 ‘마음이 생기니 가지가지의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으지니 가지가지의 법의 없어진다. (心生則 種種法生 心滅則 種種法滅)’이라고 했다. 마음이 법을 탄생시키며 또 소멸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없는 경우에는 생길 법도 없는 것이며 벌어질 법도 없는 것이다.

중봉스님의 송(頌)에서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법법지인무구구(法法只因無咎咎) / 심심다위불생생(心心多爲不生生) / 한원야곡무산월(寒猿夜哭巫山月) / 객로원래불가행 (客路元來不可行)’ “법이라는 법이 다만 허물이 없기 때문에 허물이요 / 마음이라는 마음이 다분히 생기지 않으므로 생긴다. / 무산의 달을 보고 우는 원숭이의 차가운 울음소리 / 길가는 나그네도 원래 이곳은 다니지 못하네.”

능수경멸(能隨境滅)하고 경축능침(境逐能沈)하야

(주관은 객관을 따라 없어지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버려)

능(能)은 능동의 주체 즉 주관이요, 경(境)은 객관이다. 주관이 객관을 따라 없어져 버리며 객관은 주관을 좇아 사라져 버린다는 것은, 주객(主客)의 상대 중 어느 한 쪽이 없으면 서로 소멸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객이 남아있으면 진여자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늘을 날아가는 솔개 한 마리를 바라보다가 점점 멀리 날아가 시야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으면 솔개를 바라보던 시각도 없어진다. 반대로 시야에 들어오던 솔개도 눈을 감아버리면 보이지 않듯이, 주객은 항상 서로 함께 마주해 있는 것으로 한 쪽만으로는 결코 자신의 영역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눈이 새를 보는 주객의 상대가 눈이 없어도 못보고 새가 없어도 못 보는 것이다.

경유능경(境由能境)이요 능유경능(能由境能)이니

(객관은 주관을 말미암은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을 말미암은 주관이니)

주관이 있기 때문에 객관이 있으며, 또 객관이 있기 때문에 주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주객이 서로 상대하여 서 있는 것도 대도(大道)를 장애하므로, 주객이 끊어져야 도에 계합한다. 주객이 나누어진 경계는 마치 파도가 일어나면 거울같은 본래의 수면(水面)이 깨어져 버리는 것처럼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는 생멸(生滅)의 경계로서, 이러한 생멸 속에서는 진여자성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즉 주관과 객관을 버려야 진여(眞如)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9년 5월 제102호

신심명 (14)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이유일유(二由一有)니 일역막수(一亦莫守)라.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으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하나의 막대기에 양쪽의 끝이 있는 것처럼 양변을 이루는 두 가지의 변견은 하나 때문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로 인하여 둘이 있다면 하나와 둘도 결국엔 상대적인 양변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둘을 지양한 하나를 내세워도 안되는 것이다. 가령 양변을 여읜 중도(中道)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크게 그르치는 것이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융통자재한 경지가 중도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대도(大道)에는 사실 논리의 규정이 있을 수 없다. 철학에서 말하는 단원론(單元論)이나 다원론(多元論)은 중도의 이치에서 보면 다같이 변견에 속한다. 일다(一多)가 서로 용납하여 원융무애한 것이라야 중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심불생(一心不生)하면 만법무구(萬法無咎)니라.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느니라.)

한 마음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주관이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을 말한다. 즉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 무심해짐으로써 주관과 객관이 서로 대응하지 않는 상태가 되면, 모든 것에 걸림이 없이 자유로워져 대립과 갈등 따위의 허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는 화엄학(華嚴學)에서 말하는 이사무애(理事無碍)와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가 체험된 경지이다.

마음이 일어나면 법을 탓하게 된다. 즉 객관의 경계를 두고 무심하지 못하면 시비를 일으키게 되고 남을 탓하게 된다. 흔히 중생의 경계에는 공연히 한 생각이 일어나 문제 아닌 것을 문제삼아 번민하고 괴로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9년 4월 제101호

신심명 (13) 두가지 견해에 머물지 말고

이견부주(二見不住)하야 신막추심(慎莫追尋)하라

(두 가지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쫓아가 찾지 말라.)

두 가지의 견해란 상대적으로 대립된 양변(兩邊)의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변견(邊見)을 말한다. 즉 ‘있다’와 ‘없다’의 유(有)와 무(無), ‘옳다’와 ‘그르다’의 시(是)와 비(非), ‘착하다’와 ‘나쁘다’의 선(善)과 악(惡) 등이 두 가지의 견해인 변견이다.

인간의 의식은 분별심이 되어 객관의 경계를 향하여 ‘이렇다 저렇다’는 소견을 만들며, 또한 그 소견이 만들어지면 상대적 입장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로써 경계에 걸리어 관념의 고집을 만들고 진여자성을 여의게 되므로 이견을 일으키는 경계를 찾아 다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벽관(壁觀)이라고도 하는 면벽관심(面壁觀心)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좌선할 때 얼굴을 벽으로 향해 앉아 눈에 들어오는 객관의 경계를 막는다는 것으로서, 주관과 객관의 통로를 차단하여 객관의 경계에 의해 일어나는 마음의 움직임이 없도록 한다는 것이다.

재유시비(재有是非)하면 분연실심(紛然失心)하리라

(조금이라도 시비가 있으면 어지러워 본래 마음을 잃으리라.)

경계를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는 분별시비가 일어나면, 마음은 이미 경

계에 의해 지배되어 본래의 마음이 아인 관념에 불들어진 마음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마치 하늘에 구름이 끼이면 본래의 청명한 모습이 보지이지 않는 것처럼, 진여자성은 은몰(隱沒)되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별은 항상 양변(兩邊)에 나아가 두가지의 견해를 이루는데, 이것이 곧 망견(妄見)이니 이러한 망견을 쉬면 자성(自性)이 드러나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숨어 나타나지 않는다. 이 자성을 관하는 공부는 분별시비가 멈춰질 때 시작되는 것이다.

<벽의해(闢義解)>에서는 송(頌)하기를,

설유시비무시비(說有是非無是非) 시비가 있다 없다 말하는 것도 / 중문고계대수귀(重門高啓待誰歸) 겹문을 높이 열어놓고 누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참천형극횡관로(參天荊棘橫關路) 하늘까지 뻗친 가시덤불 길을 가로막았으니 / 나개행인불괘의(那箇行人不掛衣) 어느 행인인들 옷이 걸리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