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 (3) 털끝만큼이라도

호리유차(毫釐有差)하면 천지현격(天地懸隔)하나니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지나니

간택과 증애를 용납하지 않은 도에 있어서 만약 조금이라도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나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개재된다면 도와의 거리는 하늘과 땅 사이처럼 멀어진다는 것으로, 이것 때문에 도는 어려운 것이 된다. 지극히 쉬운 도, 즉 오직 간택하고 증애하는 마음만 버리면 얻게 되는 도는 매우 간단한 것이지만, 실은 취하고 버리며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이로써 미혹의 구름이 되어 도를 보지 못하게 하니, 한 생각의 오차는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먼 것이다.

욕득현전(欲得現前)이어든 막존역순(莫存順逆)하라

도가 앞에 나타나기를 바라려거든 따르고 거슬리는 것을 두지 말라

도를 깨닫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대로 버리고 취하는 간택과 좋아하고 싫어하는 증애를 떠나야 하는데, 사람의 마음은 경계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것에는 애착을 내고 싫은 것에는 거부를 한다.

이른바 순경계와 역경계의 상대적인 객관환경이 주관의 심리에 의해서 나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따르고 거슬리는 순역(順逆)이 마음에 생기면 도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순역을 두지 말라고 한 것이다. 선수행(禪修行)에서 무심의 경계를 강조하는 것도 같은 이치인 것이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5월 제90호

신심명 (2) 지극한 도는

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 유혐간택(唯嫌揀擇)이니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다.

지극한 도란 깨달음 자체,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흔히 무상정각(無上正覺) 혹은 무상대도(無上大道)라고 말하는 깨달음의 경지는 전혀 어려움이 없다는 말로써 <신심명>은 시작된다.

<열반경>에 말하기를 마음이 있는 자는 누구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마음이 없는 자는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누구든지 도를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도(道)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며, 또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간택이란 취하고 버리는 분별의식을 말한다. 이것과 저것의 상대적인 차별 속에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친 소견을 가질 때 마음에는 집착이 생기며, 또 이 집착은 도를 등지게 한다. ‘무심이 도다(無心是道)’는 말이 있듯이 식심(識心)이 일어나 마음이 출렁거리면 도의 본체에 계합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도를 장애하는 근본요인은 바로 식심분별(識心分別)이므로 이것만 없으면 도는 쉬운 것이라는 말이다.

단막증애(但莫憎愛)하면 통연명백(洞然明白)하리라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는 일 없으면 환하게 명백하느니라.

미워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에 움직이는 인간의 의식작용이지만, 이것이 바로 어떤 관념의 고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취하고 버리려는 마음이 있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 때문이다.

도(道)라는 실상의 참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시야가 밝아야 하는데, 증애심이 있으면 정법의 눈을 흐려 도의 당체를 볼 수 없으므로 증애심이 없어지기만 하면 도는 하나도 막힘없이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대주(大珠)스님의 <돈오입도요문(頓悟入道要門)>에서는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두 가지 성품이 공해져 저절로 해탈한다”고 했다.

또한 증애심이란 중생의 번뇌를 일으키는 근본으로 108번뇌설에 나오는 설명처럼,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은 번뇌를 야기한은 출발이 된다.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대할 때 호(好) 오(惡) 평등(平等)과 고(苦) 락(樂) 삼수(三受)의 분별이 일어나 36가지 갈래가 나눠지며, 여기에 일념의 삼세(三世)가 배대되어 108번뇌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결국 중생은 번뇌 때문에 도를 보지 못하는 것이며, 번뇌가 움직이는 심리는 바로 좋아하고 미워하는데 있는 것이다.

신심명 (16) 세상의 모든 것은 번듯이 존재하고 있지만

欲知兩段(욕지양단)인대 元是一空(원시일공)이니라

두 쪽을 알고자 할진대 원래 하나의 공이니라.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것은 원래 둘 다 하나로 공한 것이다. 물론 ‘공하다’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일반적인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있다’라는 유(有)의 개념을 부정하는 상대적 공空이 아니라 유무(有無)가 동시에 끊어진 절대 초월의 경지를 말한다.

인식의 주체와 인식되어지는 객체가 모두 헛된 것이므로, 그것이 사라진 자리가 바로 본성의 자리라는 것이다. 여기는 생멸(生滅)이 없는 무생멸(無生滅)의 세계이다. 선善도 생각하지 않고 악(惡)도 생각하지 않는 불사(不思)의 경계에 어찌 주객(主客)이 설 수 있겠는가?

중봉(中峰)은 다시 이렇게 송(頌)했다.

夢中睹得黃金藏(몽중도득황금장) 꿈 속에서 노다지 황금을 캐고

又跨靑鸞上寶臺(우과청란상보대) 푸른 봉황을 타고 보대에 올랐네.

盡夜喜歡無着處(진야희환무착처) 밤새도록 기뻐서 어쩔줄 몰랐는데

天明只落得場騃(천명지락득장애) 날이 밝아 깨어보니 멍청한 꼬락서니

一空同兩(일공동양)하야 齊含萬象(제함만상)이라

하나로 공한 것이 둘과 같아 가지런히 만상을 포함하느니

공하다 해서 공에 치우쳐 버리면 단멸공(斷滅空)이 된다. 또한 아주 없다고 일체를 완전히 부정만 하면 변견(邊見)에 해당되는 단견(斷見)이다. 그러므로 하나로 공해진 것이 둘로 양분된 것과 본질의 내용에서는 다름이 없이 같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도리로서 주객이 하나로 공해졌지만 공한 그 속에 주객이 부정되어진 채 있는 것이다.

공하다는 것은 ‘아주 없다’는 뜻이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있으면서 없다는 것을 뜻한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은 번듯이 존재하고 있지만 관법(灌法)을 통하여 보면 없다는 것이다. 관(觀)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은 결국 무심으로 실천되어지는 수행의 근본을 나타내는 말이다.

허공이 삼라만상을 포함하듯이, 진공(眞空)이 묘유(妙有)를 머금고 있어 공관(空觀)으로 부정되어진 존재의 가상(假相)이 다시 살아나는데, 이것을 가관(假觀)이 다시 살아나는데, 이것을 가관(假觀)이라고 한다. 이처럼 현상의 제법은 공한 것이면서 그대로 연기된 모습을 가지는데, 이른바 반야심경의 색불이공(色不異空)은 공관이요, 공불이색(空不異色)은 가관이다. 또한 공관과 가관이 서로 회통(會通)되는 것을 중관(中觀)이라고 하는데, 중관은 곧 중도이다.

중도를 나타내는 말에는 쌍차쌍조(雙遮雙照) 혹은 쌍민쌍존(雙泯雙存)이 있다. 즉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양면을 동시에 부정하면서 동시에 긍정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객관의 경계에 부여해 놓은 개념이 어떠한 집착을 이룰까봐 이를 빼앗는 특이한 논리를 표현하는 말이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9년 6월 제10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