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 (6) 유의 인연을 따르지 말고

막축유연(莫逐有緣)하고 물주공인(勿住空忍)하라.

(유의 인연을 따르지 말고 공의 인에도 머물지 말라.)

유의 인연이란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현상계의 이런 저런 차별상을 말하는 것으로, 가시감각적인 세상의 경계를 말한다. 세간법이라고 부르는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세속의 일에 집착하여 속박당하지 말며, 동시에 모든 것을 부정하여 공하다고 보는 공의 관념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공인(空忍)이란 공의 이치를 터득한 지혜라는 뜻인데, 이는 세간법을 부정하는 출세간법(出世間法)을 말하는 것으로 상대적인 양변에 치우쳐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유(有)는 상견(常見)을 이루고, 공(空)은 단견(斷見)을 이룬다.

유무(有無)를 동시에 초월해야 대도에 들어갈 수 있으므로 세간법을 버리고 출세간법을 취해서도 안되며 출세간법 마저도 버려야 하는 것이다. 무상대도 그 자체에는 세간법이니 출세간법이니 혹은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일종평회(一種平懷)하면 민연자진(泯然自盡)이라.

(한가지로 생각을 평탄히 하면 쓰러져 저절로 다해지리라.)

평회(平懷)란 생각을 쉬어 어느 쪽에도 끌려가지 않는 중도에 머무는 상태다. 양변을 여의어 중도에 안주하면 일체의 변견에 치우친 허망한 경계는 쓰러져 저절로 없어진다는 것이다. 즉 헛된 것이 없어지면 헛되지 않은 것이 드러난다는 망궁진로(妄窮眞露)의 이치를 설파했던 것이다.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는 “수행의 요긴한 것은 다만 범부의 망정이 다하면 그만이지, 달리 성인의 견해가 있는 것이 아니다(修行之要 但盡凡精 別無聖解)”고 했다.

또한 <원각경(圓覺經)>에서는 “헛된 것인 줄 알면 여의는 것이라 방편을 지을 것이 없으며, 헛됨을 여의면 곧 깨달음이라 수행의 점차가 없다”고 했다.

도가 나타나 중도의 묘용을 발휘하려면 상대적 차별을 여의어 어느 쪽에도 머물지 말아야 한다는 이 뜻은 <신심명> 전문에 걸쳐 시종일관 강조되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렇게만 할 경우 바람이 잠잠해지면 파도가 없어지듯 허망한 분별의 경계가 모두 사라지게 되는 법이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8월 제93호

신심명 (5) 원만하기 허공과 같아서

원동태허(圓同太虛)하여 무흠무여(無欠無餘)어늘

원만하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도(道)는 허공과 같으므로 어디에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며, 또한 무엇에도 장애를 받지 않는다. 도란 우주 만유의 본체이며, 이 본체는 더해지거나 줄어들 수 없는 그야말로 시공을 초월하여 융통자재한 것으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며, 허공과 같아 생겨나거나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깨달으면 도는 자신의 것으로 되지만 미혹하면 영영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범부나 성인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도체(道體)임에도 불구하고 미오(迷悟)경계가 다른 것은 한 생각이 끊어지고 끊어지지 않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양유취사(良有取捨)하여 소이불여(所以不如)니라

진실로 취하고 버리려하므로 여여하지 못하니라

망념에 의한 분멸은 결국 취하고 버리는 양극단을 이루어 도(道) 본래의 여여한 제 모습을 등지게 된다. 모든 것이 하나로 회통(會通)된 본성의 자리에 돌아가지 못하고 양갈래의 변견(邊見)에 떨어져 대도(大道)를 망각하는 것이 범부의 경계이다.

이른바 이분법(二分法)의 사고는 객관의 경계를 분석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과 저것을 나누는 분석은 지말적(枝末的)인 데로 흐르기 쉽다. 도는 근본이요 본체다. 이 본체에 합치된 분상에서는 취하고 버릴 것이 없다. 명본(明本)스님의 <벽의해(闢義解)>에서는 다음과 같이 송(頌)을 붙였다.

취기비여사불여(取旣非如捨不如)

시우수감환위려(是牛誰敢喚爲驢)

대천사계금강체(大千沙界金剛體)

야시중재함하수(也是重栽頷下鬚)

취하는 것이나 버리는 것 모두 여여하지 못하니

소를 보고 누가 감히 나귀라 하는가?

온 세상이 금강의 몸인데

어쩔려고 턱 밑에 수염기르듯 가꾸려 하는가?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7월 제92호

신심명 (4) 어김과 따름의 서로 다툼

위순상쟁(違順相爭)이 시위심병(是爲心病)이니

어김과 따름의 서로 다툼은 이것이 마음의 병이 되니

위순상쟁(違順相爭)이란 현대적 개념으로는 갈등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고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인간의 모순과 갈등은 고통과 불행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병은 고쳐야 하는 것으로 도가 회복되면 건강해지는 것이다. 물론 사회과학적인 면에서 본다면 인간사회의 향상을 위하여 고민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후차적인 방펀일 뿐이며, 본질의 이치에서는 중도를 통달한 경계라야 된다는 것이다.

불식현지(不識玄旨)하고 도로염정(徒勞念靜)이로다

현묘한 뜻을 알지 못하고 한갓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

깨달음이란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간택하는 마음과 증애하는 마음 그리고 어기고 따르는 마음 등을 버릴 때 무상대도는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으로, 주관과 객관이 대응하는 관계에서 얻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간혹 수행의 방법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생각만 고요히 하면 된다는 정적(靜的)인 것에 치우친 편견으로 공부를 삼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폐단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한 말이다. 즉 현묘한 이치를 터득해야 도에 합치되는 것일 뿐, 애써 마음만 고요히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정(靜)의 반대인 동(動)에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상대적인 분별의 경계를 떠나 중도실상에 나아가야 도를 만날 수 있는 것이며, 어느 한쪽에 치우친 변견(邊見)을 갖고서는 도를 찾을 수 없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6월 제9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