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 (5) 원만하기 허공과 같아서

원동태허(圓同太虛)하여 무흠무여(無欠無餘)어늘

원만하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도(道)는 허공과 같으므로 어디에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며, 또한 무엇에도 장애를 받지 않는다. 도란 우주 만유의 본체이며, 이 본체는 더해지거나 줄어들 수 없는 그야말로 시공을 초월하여 융통자재한 것으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며, 허공과 같아 생겨나거나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깨달으면 도는 자신의 것으로 되지만 미혹하면 영영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범부나 성인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도체(道體)임에도 불구하고 미오(迷悟)경계가 다른 것은 한 생각이 끊어지고 끊어지지 않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양유취사(良有取捨)하여 소이불여(所以不如)니라

진실로 취하고 버리려하므로 여여하지 못하니라

망념에 의한 분멸은 결국 취하고 버리는 양극단을 이루어 도(道) 본래의 여여한 제 모습을 등지게 된다. 모든 것이 하나로 회통(會通)된 본성의 자리에 돌아가지 못하고 양갈래의 변견(邊見)에 떨어져 대도(大道)를 망각하는 것이 범부의 경계이다.

이른바 이분법(二分法)의 사고는 객관의 경계를 분석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과 저것을 나누는 분석은 지말적(枝末的)인 데로 흐르기 쉽다. 도는 근본이요 본체다. 이 본체에 합치된 분상에서는 취하고 버릴 것이 없다. 명본(明本)스님의 <벽의해(闢義解)>에서는 다음과 같이 송(頌)을 붙였다.

취기비여사불여(取旣非如捨不如)

시우수감환위려(是牛誰敢喚爲驢)

대천사계금강체(大千沙界金剛體)

야시중재함하수(也是重栽頷下鬚)

취하는 것이나 버리는 것 모두 여여하지 못하니

소를 보고 누가 감히 나귀라 하는가?

온 세상이 금강의 몸인데

어쩔려고 턱 밑에 수염기르듯 가꾸려 하는가?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7월 제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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