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26) 한결같음은 본체가 현묘하여 올연히 인연을 잊는다.

心若不異(심약불이)면 萬法一如(만법일여)니라.

마음이 만약 다르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같느니라.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분별심과 차별심이 일어나지 않는 무심의 경계이다. 그러나 만약 온갖 망념(妄念)이 일어나면 마음이 동요되어 객관의 경계가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만법이 한결같다는 것은 무차별의 절대 속에 진여본성(眞如本性)이 여여부동(如如不動)하는 경지이다. [기신론起信論]에서는 “일체의 분별이 자신의 마음의 분별이다(一切分別自心分別).”고 하였다.

一如體玄(일여체현)하여 兀爾忘緣(올이망연)이라

한결같음은 본체가 현묘하여 올연히 인연을 잊는다.

앞에서 말한 일체의 만법이 여여하다는 것은 본체가 현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현묘한 본체를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인古人의 송(頌)에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모양 둥글었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어찌 전하랴(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는 말도 있다. 현묘한 본체의 여여부동! 이것이 깨달음이 없이 깨달아지고 전함이 없이 전해져 불법이 유전된 것이다. 인연을 잊는다는 뜻으로, 밖으로 향하는 모든 생각이 쉬어졌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어떠한 개념도 만들어질 수가 없다.

신심명(25)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한꺼번에 놓아 버려라

득실시비(得失是非)를 일시방각(一時放却)하라.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한꺼번에 놓아 버려라.

도에 머무는 사람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기 때문에 대자유인이라고 한다. 관념의 고집이란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구속하는 것에 불과하다. 마음이 구속되면 도에 어긋나 어느 한 쪽에 집착하게 되는데, 중생이 가지는 상대적 분별견해는 이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변(兩邊)에 떨어지지 않고 이것을 모두 버릴 때 자유자재하게 걸림없는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목장에 갇혀 사는 말은 설사 좋은 사료와 목초를 먹는다 하여도 야생마의 자유를 이미 상실하여 버린 것처럼, 얻고 잃고 옳고 그름에 매이면 마음의 자유를 잃게 된다.

안약불수(眼若不睡)면 제몽자제(諸夢自除)요

눈이 만약 잠자지 아니하면 모든 꿈이 저절로 없어지고

꿈은 잠 속에서 꾸는 것으로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꿈을 꾸겠는가? 망상적 분별인 식견(識見)이 없어지면 여여한 진여의 세계일 뿐이며, 그 세계는 곧 절대무(絶對無)의 세계이다.

영가스님의 [증도가(證道歌)]에서는 “꿈 속에선 분명히 육취(六趣)가 있더니 깨고 보니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도다(夢裏明明育六趣 覺後空空無大千).”고 하였다. 육취란 중생이 윤회하는 여섯 갈래의 세계, 즉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이다.

신심명(24) 모든 상대적인 두 가지의 견해는 진실로 짐작 때문이다

일체이변(一切二邊)은 양유짐작(良由斟酌)이로다.

모든 상대적인 두 가지의 견해는 진실로 짐작 때문이다.

이변(二邊)이란 상대적으로 나누어진 양견兩見 가운데 어느 한 쪽에 치우친 변견(邊見)을 말한다. 법은 본래 ‘이렇다 저렇다’는 양 갈래의 분별이 없는 것으로, 마치 허공 자체에는 동서남북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중생이 마음에 분별을 내어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며 짐작하기 때문에 상대적 차별이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공연한 분별로 이것이 일어나면 대도(大道)에서 멀어져 버린다. 마음에 생각이 쉬어 짐작하는 지견(知見)이 없어질 때 중도실상이 나타나는 것인데, 지견에 지견을 거듭하여 세워 가는 것이 중생의 병이며, 그것이 바로 무명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몽환공화(夢幻空華)를 하로파착(何勞把捉)가

꿈속의 허깨비와 헛꽃을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

꿈 속의 허깨비와 헛꽃이란 실체가 없는 헛된 경계를 말한다. 즉 치우친 변견으로 집착을 일으키는 객관의 대상이 실은 헛된 것이라는 것이다. 헛꽃(空華)이란 눈병이 난 사람이 허공을 바라볼 적에 그의 눈에 아물거리는 헛것으로 보이는 그것을 가리키지만, 이는 눈병탓으로 생긴 것이지 실제로 헛꽃이 있는 것은 아니다.

‘금강경’에서는 “일체의 인연 따라 생기는 것들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렇게 보아야 한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고 하였는데, 헛된 것을 잡으려 애쓰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놓아버리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