究竟窮極(구경궁극)하야, 不存軌則(부존궤칙)이요
최후의 궁극적인 경지에서는 어떤 법칙도 있지 않는 것이요
진리의 궁극적인 경지에는 진리라는 것이 없다. 흔히 무소득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상대적인 양변을 완전히 떠나면 떠났다는 생각마저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이 있다는 것은 궁극적인 경지가 아니다. 내세워 둘 어떤 대상도 없다는 이 뜻은 “부처를 부처라 하면 부처가 아니다.”는 말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법이 없다고 해서 단멸(斷滅)에 떨어져 무조건 일체를 부정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진여의 대용大用이 자유자재하게 작용하여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며, 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여 일체의 법이 다시 마음대로 살아나는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정해진 법이 없는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有定法名阿褥多羅三藐三菩提)라고 하였다.”
契心平等(계심평등)하면 所作俱息(소작구식)이로다
마음에 계합하여 평등해지면 짓는 바가 함께 쉬어져 버린다.
마음이 평등하다는 것은 여여부동한 본래의 마음이 드러난 경지이다. 일체의 차별 견해가 끊어진 도에 합치된 경계로, 여기에서는 조금도 마음을 일으키거나 생각을 움직일 필요가 없다.
‘원각경’에서는 “성품은 스스로 평등하여 평등하게 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도(道)란 지식으로 아는 대상이 아니라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관념이 사라질 때 얻게 되는 것이다. 경계에 대한 차별이 남아 있거나 주객의 대응에 의한 고의적 의도가 일어나면 도는 멀어지는 것이다.
중봉(中峰)의 ‘벽의해(闢義解)’에서는 이렇게 송頌 하였다.
罷問程途撒手歸(파문정도실수귀) 길 묻기를 그만하고 손털고 돌아와
一菴高臥對晴暉(일암고와대청휘) 암자에 높이 누워 맑은 하늘 바라본다.
百千玄妙俱忘却(백천현묘구망각) 배천 가지 현묘한 것 다 망각하니
終日無人扣竹扉(종일무인구죽비) 종일토록 아무도 사립문을 두드리는 이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