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29) 최후의 궁극적인 경지에서는 어떤 법칙도 있지 않는 것이요

究竟窮極(구경궁극)하야, 不存軌則(부존궤칙)이요

최후의 궁극적인 경지에서는 어떤 법칙도 있지 않는 것이요

진리의 궁극적인 경지에는 진리라는 것이 없다. 흔히 무소득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상대적인 양변을 완전히 떠나면 떠났다는 생각마저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이 있다는 것은 궁극적인 경지가 아니다. 내세워 둘 어떤 대상도 없다는 이 뜻은 “부처를 부처라 하면 부처가 아니다.”는 말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법이 없다고 해서 단멸(斷滅)에 떨어져 무조건 일체를 부정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진여의 대용大用이 자유자재하게 작용하여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며, 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여 일체의 법이 다시 마음대로 살아나는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정해진 법이 없는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有定法名阿褥多羅三藐三菩提)라고 하였다.”

契心平等(계심평등)하면 所作俱息(소작구식)이로다

마음에 계합하여 평등해지면 짓는 바가 함께 쉬어져 버린다.

마음이 평등하다는 것은 여여부동한 본래의 마음이 드러난 경지이다. 일체의 차별 견해가 끊어진 도에 합치된 경계로, 여기에서는 조금도 마음을 일으키거나 생각을 움직일 필요가 없다.

‘원각경’에서는 “성품은 스스로 평등하여 평등하게 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도(道)란 지식으로 아는 대상이 아니라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관념이 사라질 때 얻게 되는 것이다. 경계에 대한 차별이 남아 있거나 주객의 대응에 의한 고의적 의도가 일어나면 도는 멀어지는 것이다.

중봉(中峰)의 ‘벽의해(闢義解)’에서는 이렇게 송頌 하였다.

罷問程途撒手歸(파문정도실수귀) 길 묻기를 그만하고 손털고 돌아와

一菴高臥對晴暉(일암고와대청휘) 암자에 높이 누워 맑은 하늘 바라본다.

百千玄妙俱忘却(백천현묘구망각) 배천 가지 현묘한 것 다 망각하니

終日無人扣竹扉(종일무인구죽비) 종일토록 아무도 사립문을 두드리는 이 없네

신심명(28) 그침이 움직임은 움직임이 없고 움직임이 그침은 그침이 없느니라

止動無動(지동무동)이요 動止無止(동지무지)니라

그침이 움직임은 움직임이 없고 움직임이 그침은 그침이 없느니라

움직임과 그침은 상대적인 개념, 즉 동죙靜의 개념이다. 그침이 움직인다는 것은 그침이 움직임을 덮어서 움직임이 그침 속으로 들어갔으므로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 반대로 움직임이 그침을 덮어 그침이 움직임 속으로 들어갔으므로 그침이 없다. 이것은 결국 움직임은 그침에 즉卽한 움직임이므로 움직임이 없는 것이며, 그침은 움직임에 즉卽한 그침이므로 그침이 없어서 움직임과 그침이 융통자재하고, 동시에 두 가지의 상대법이 없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중도의 이치를 밝히면서 동중죙中靜과 정중동靜中動이 함께 통하여 자취가 없는 묘妙를 나타내었다. 다시 말하면 동죙靜은 근원이 한 가지이며 근본에서 보면 모두 공空했다는 말이다.

兩旣不成(양기불성)이라 一何有爾(일하유이)아

둘이 이미 성립되지 않으니 하나인들 어찌 있겠는가

움직임과 그침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움직임이 없으면 그침도 없고, 그침이 없으면 움직임도 없게 된다. 즉 둘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하나는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양견兩肩의 상대적 입장이란 대개 긍정하는 논리와 부정하는 논리로서 서술되는데 이를 표전表詮과 차전遮詮이라고 한다. 소금이 짜다는 말은 표전이지만 소금은 싱겁지 않다고 부정하여 말하는 것은 차전이다.

한 가지로 같은 것을 두고 긍정으로 말하고 부정으로 말하는 논리의 차이는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같은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대립적 개념인 유有 ․ 무無와 선善 ․ 악惡과 시是 ․ 비非 등은 근원적인 본체에서 보면 모두 하나이며, 이러한 하나 또한 실체는 없다고 한다. ‘하나이다’ 그리고 ‘둘이다’고 하는 것은 모두 객관을 설명하는 말이며, 객관을 설명한다는 것은 곧 분별이다.

신심명(27) 만법을 똑같이 평등하게 보면 본래대로 돌아가느니라

만법제관(萬法濟觀)에 귀복자연(歸復自然)이니라.

만법을 똑같이 평등하게 보면 본래대로 돌아가느니라.

만법을 똑같이 평등하게 본다는 것은 제법의 실상을 보는 안목이 열려서 차별의 세계를 초월한 경지인데,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이치를 달관하여 분별심이 쉬어지면 모든 것이 자연스러우며 본래의 모습대로 나타나게 된다. 무상대도는 본래 진여의 세계이므로 만들어지는 세계도 아니며 없어지는 세계도 아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인 진여의 본체에 돌아가는 것이 귀복이며, 본래대로의 회복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귀복자연이다. 잠을 깨고 나면 잠들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처럼, 분별망상이 없어지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에 돌아간다. 따라서 도를 깨닫는다는 것은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심원(心源)에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마음(眞心)으로 돌아가라!”, “본성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말들은 자성청정심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민기소이(泯其所以)하야 불가방비(不可方比)라

그 까닭이 없어져서 견주어 비할 데가 없느니라.

진리의 본질은 인간의 의사표시에 의한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도는 왜 있는가?’라고 할 때에 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수도상(修道上) 있어서도 ‘도를 닦으면 왜 깨달아지는가?’라고 할 때에도 그 이유는 없다. 으레 그렇게 되는 것이요. 본래가 그렇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깨달음의 세계를 부사의해탈경계(不思議解脫境界)라고 한다. 이는 말로써 설명하고 생각으로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비교해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처럼 진리 자체인 도는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사유심(思惟心)으로써도 상상할 수가 없다.

<원각경?에서는 “사유심으로써 여래의 원각경계를 헤아리는 것은 반딧불을 가지고 수미산을 태우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묘법(妙法)은 참으로 불가사의하여 이런가 하면 이렇지 않고 저런가 하면 저렇지 않다. 이렇고 저렇지 않으면서 이러하고 저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