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32) 진여의 법계에는 나도 없고 남도 없다

眞如法界(진여법계)엔 無他無自(무타무자)라

진여의 법계에는 나도 없고 남도 없다.

바로 깨친 자리인 진여의 법계, 즉 일심법계에는 일체의 망념이 사라지고 여여부동(如如不動)한 자성의 광명이 있을 뿐으로 상대적 차별은 없어져 주관과 객관의 대응이 없다. 그러므로 ‘나’라는 자기 관념도 없으며 남을 의식하는 생각도 없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경지로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즉 일체를 초월하여 현상계의 차별을 벗어났으므로 일심법계의 절대 경지에 들어가 아무런 동요가 없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절대무(絶對無)의 세계는 일진법계(一眞法界)이며, 불변(不變)의 체(體)인 그곳에서 수연(隨緣)의 작용이 일어나 만법이 생성하는 것이다.

要急相應(요급상응)인대 唯言不二(유언불이)니

재빨리 상응하려 한다면 오직 둘 아님을 말할 뿐이니

아무 것도 없는 진여의 법계에 합치되고자 한다면 모든 것이 하나로 회통되는 둘이 아닌 이치를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상대세계를 초월해야 절대세계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앞의 구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도 없고 남도 없다’는 말이 곧 현상의 차별을 초월한 둘이 아닌 경계이다.

상대적으로 나누어져 있는 둘을 근본 본질에서 보아 하나라고 할 때, 이 하나와 둘은 또한 상대적인 차별을 이루기 때문에 이러한 차별마저 끊어져야 하는데, 이 경우 실은 둘을 떠난 하나도 따로 없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중도中道마저 없다는 것이다. 논리란 자칫 함정이 있는데, 논리의 함정에 빠지면 도(道)와는 어긋나게 된다.

신심명(31) 훤히 밝아 스스로 비추니 애써 마음 쓸 일 아니라

虛明自照(허명자조)하야 不勞心力(불로심력)이니라

훤히 밝아 스스로 비추니 애써 마음 쓸 일 아니라.

‘훤히 밝다’는 허명이라는 말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밝은 빛이 저절로 비춰지는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허(虛)’란 일체가 끊어진 양변의 부정을 의미하고, ‘명(明)’이란 양변을 모두 부정한 쌍차(雙遮)를 살려낸 양변 동시긍정(同時肯定)의 쌍조(雙照)를 뜻한다. ‘허’가 ‘명’을 비추고 ‘명’이 ‘허’를 비추어 부정과 긍정이 동시(同時)가 되는 차조동시(遮照同時)를 말한다.

그런데 이는 진여자성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불가사의한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억지로 마음을 써서 되는 것이 아니다. 즉 ‘도(道)’는 무위(無爲)이기 때문에 유위심(有爲心)의 사유분별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바다에 파도가 일고 있는 자연은 본래의 모습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바람이 불지 않았을 때에는 파도가 없었으므로 고요한 수면이 바다의 본래 모습이며, 그것은 거울과 같은 작용을 나타내는 바이다.

非思量處(비사량처)라 識情難測(식정난측)이로다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곳이라 의식과 감정으로 헤아리기 어려우니라.

도(道)는 깨달아야 알 수 있는 것이므로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그것은 지식이나 과학의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꿈을 꾸는 몽경(夢境)에서 깨어 있는 세계로 나오려면 잠에서 깨어나야 하는 것과 같다. 의식과 감정이 물든 세계는 항상 생각이 움직이는데, 이는 곧 사량처이며 거친 생각과 미세한 생각이 물줄기처럼 흘러간다.

이른바 추념(抽念)과 세념(細念)이 일어나 계속될 때 훤히 밝게 비추는 도의 자리는 이지러져 버리는 것으로, 물결이 출렁이는 물 위에 하늘의 달이 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수행의 지위에서 볼 때 세념(細念)이 끊어진 경지는 등각(等覺)의 지위를 넘어선 묘각(妙覺)의 자리에 이르러야 되는데, 거기가 바로 구경각(究竟覺)이며, 그때 진여법계(眞如法界)가 나타나는 것이다.

신심명(30) 의심이 깨끗이 다 없어지면 바른 믿음이 고르게 곧아진다.

狐疑淨盡(호의정진)하면 正信調直(정신조직)이라

의심이 깨끗이 다 없어지면 바른 믿음이 고르게 곧아진다.

분별과 망상은 마음과 경계가 겨루는 유심(有心)의 상태이며, 이는 머무르는 마음으로 자신의 견해를 고정시켜 둔다. 그러나 실상에 미혹하여 끊임없는 의심이 일어나 스스로 관념의 착각에 빠지고 마는 것이므로 바른 믿음을 가질 수가 없게 된다. 자신이 고정시킨 모든 망견을 버릴 때 마음은 맑아져 무심해지는데, 그때에 바로 바른 믿음이 생겨 도와 어울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믿음은 도를 깨달은 데서 오는 믿음으로 처음 발심하는 믿음과는 차원이 다르며, 능소(能所)가 끊어진 믿음으로 이는 곧 깨달은 마음인데 무어라 이름을 붙여 부르기가 곤란한 것이지만, 한편 무엇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법이 하나로 통일된 경지에서는 일체의 명자상(名字相)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一切不留(일체불유)하야 無可記憶(무가기억)이로다.

아무 것도 머물지 아니해서 기억할 것이 없어졌다.

분별하는 식심(識心)이 쉬어져 주객이 서로 응하지 아니하면 거울이 물건을 비추어 주는 것처럼 무심해진다. 바른 믿음이 곧게 서면 진여자성이 나타나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주체화되거나 객체화될 것이 없어 인식의 대상이 없으므로 기억할 것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나도 없어 너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없다’라는 무(無)가 살아나야 도의 집에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없다’라는 것이 견해를 이루면 도리어 머물게 되고 유有의 경계인 분별의 세계가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중봉은 다음과 같은 송(頌)을 붙였다.

一切不有還有見(일체불유환유견) 아무 것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 도리어 견해가 되고

了無可記尙存知(요무가기상존지) 기억할 게 없다는 게 되려 아는 것을 남기네

故家田地非親倒(고가전지비친도) 옛 고향 밭에 친히 가보지 않으면

畵餠何曾療得飢(화병하증료득기) 그림의 떡으로 어떻게 배고픔을 면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