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35) 종이란 짧아지거나 늘어지는 것이 아니니

宗非促延(종비촉연)이니 一念萬年(일념만년)이라.

종이란 짧아지거나 늘어지는 것이 아니니 한 생각이 만년이니라.

종(宗)이란 도의 근본 당체(當體)이다. 보통 종취(宗趣)라고 말하는데, 으뜸가는 근본 핵심을 일컫는 말이다. 진여법계 즉 일심의 체(體)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므로 짧아지거나 늘어지는 것은 아니며, 시간의 장단이나 공간의 대소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한 생각 그대로가 만년이며, 여기서 만년이란 영원의 시간을 뜻한다.

이는 법성게法性偈의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이란 구절의 뜻과 같은 말이다. 즉 순간이 영원이요 영원이 순간이라는 것이고, 긴 것이 짧은 것이고, 짧은 것이 긴 것이며, 작은 것이 큰 것이고 큰 것이 작은 것이란 것이다.

그런데 짧은 것이 아니고 긴 것이 아니라 한 것은 양변(兩邊)을 긍정한 쌍조(雙照)이다. 진여자성을 깨달은 경지는 모든 시간적‧공간적 상황의 상대가 끊어진 절대의 세계로서 일체가 부정되어짐과 동시에 일체가 긍정되는 것인데, 이를 차조동시(遮照同時)라고 한다.

신심명(34) 시방의 지혜로운 사람은 모두 이 종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十方智者(시방지자)가 皆入此宗(개입차종)이니라.

시방의 지혜로운 사람은 모두 이 종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세계가 바로 도의 세계요 진리의 세계이며, 이것은 가장 으뜸가는 근본 종취이다. 그러므로 도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둘이 아닌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차별을 떠나서 절대세계로 들어가면 비로소 해탈과 열반의 즐거움을 실컷 만끽하게 된다. 그러나 둘이 아닌 세계는 들어감이 없이 들어가는 것으로, 들어가는 문과 들어가는 사람이 없어야 들어가는 것이다.

중봉(中峰)의 송(頌)에서는 이렇게 읊었다.

盡說此宗難得妙(진설차종난득묘) 十方智者若爲論(시방지자약위논)

懸崖未解抛雙手(현애미해포쌍수) 撞入無非地獄門(당입무비지옥문)

모두 이 종의 묘를 얻기 어렵다 하니 시방의 지혜로운 사람인들 어떻게 논하랴

깎아지른 벼랑에서 두 손을 놓을 줄 모른다면 들어갈 곳이란 지옥밖에 더 있을까

신심명(33) 둘 아님은 모두가 같아서 포용하지 않음이 없나니

不二皆同(불이개동)하야 無不包容(무불포용)하니

둘 아님은 모두가 같아서 포용하지 않음이 없나니

현상의 차별은 상대적인 것으로, 상대적인 것은 언제나 두 가지로 파악된다. 이것과 저것, 나와 남, 크고 작고, 길고 짧고, 옳고 그르고, 선하고 악하고 등 두 가지로 나누어진 상태에서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진여법계는 나도 없고 남도 없는, 상대를 초월하여 둘로 나누어진 양변을 모두 버린다. 가령 바다와 육지가 서로 상대적으로 인식될 때는 둘이 되지만, 바다와 육지의 두 자리를 빼앗아 버리면 바다는 바다가 아니고 육지는 육지가 아닌 것이 된다. 동시에 상대적 위치가 없기 때문에 바다는 육지이고 육지는 바다라 하여도 무방한 것이다.

이를 일반적인 논리로 볼 때에는 어불성설인 것 같지만, 분별의식이 끊어진 진여의 각성(覺性)은 일체가 부정된(雙遮) 자리로서 대상을 통해 일어나는 분별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모든 것이 다시 긍정되어(雙照) 원융무애하고 자유자재한 것이다. 모든 대립이 끊어지고 갈등이 사라진 이러한 경지, 즉 둘이 아닌 경지에서 도道를 상면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