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23)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그르침이 아니겠는가.

장심용심(將心用心)하니 기비대착(豈非大錯)가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그르침이 아니겠는가.

“마음이 곧 부처다”는 말을 두고 생각해 볼 때, 본래 번뇌와 망상이 없는 진여자성의 참마음은 그대로 있는 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모르고 엉뚱하게도 진여자성을 찾는다고 오히려 분별을 일으켜 애를 쓰면서 참선을 한다거나 경전을 본다거나 하니, 도의 자리에서 볼 때에는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즉 이미 부처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부처를 찾겠다며 오히려 망상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남대문 안에 살면서 서울이 어디냐고 묻는 격인 것이다.

중봉(中峰)의 송(頌)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卽佛是心心是佛(즉불시심심시불) 부처가 곧 마음이고 마음이 바로 부처인데

擬乘當處早乖疎(의승당처조괴소) 생각해서 알려하면 벌써 틀린 일

飮光眉向花前展(음광미향화전전) 음광(가섭존자)의 눈썹이 꽃 앞에 펴짐이여

平地無端起範模(평지무단기범모) 평지에서 무단히 본보기를 보였네

미생적란(迷生寂亂)이요 오무호오(悟無好惡)니라.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깨달으면 좋아하고 싫어함이 없나니

마음이 미혹하면 중생이요 마음이 깨달으면 부처이다. 미혹할 때에는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겨 마음이 움직이지만, 깨달으면 움직이던 마음이 쉬어져 분별이 없어지므로 무심해진다. 그리고 취하고 버리는 집착의 마음이 없으므로 모든 것이 함이 없는 마음인 무위심(無爲心)에서 이루어진다.

“땅에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선다(因地而倒者 因地而起)”는 말이 있다. 넘어지고 일어서는 것이 땅으로 인해서이듯 미혹하고 깨닫는 것은 마음으로 인해서이다. 사실 범부와 성인을 갈라놓는 것은 마음이지만 마음 자체에는 범부와 성인이 없는 것이다. 즉 땅은 원래 사람이 넘어지고 일어서는 것을 상관하지 않는다.

신심명(22) 지혜로운 사람은 함이 없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얽매이도다.

지자무위(智者無爲)어늘 우인자박(愚人自縛)이로다

지혜로운 사람은 함이 없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얽매이도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미 도에 나아가 버릴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어 마음이 자유자재하므로 아무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자나깨나 취하고 버리려는 마음 때문에 스스로 묶이어 고생을 자초한다.

무위란 함이 없다는 뜻이지만 아무런 동작이 없다는 말은 아니며, 마음에 의도된 집착이 없는 무심행(無心行)의 자유를 말하는 것으로 본자무위(本自無爲)라 하여 본래 스스로 함이 없다고 말한다.

영가永嘉스님의 ‘증도가(證道歌)’ 첫머리에서는, “그대 보지 못했는가(君不見)? 배움을 끊고 할 게 없는 한가로운 도인은(絶學無爲閑道人) 망상을 제거하지도 않고 진리를 찾지도 않네(不陣妄想不求眞)”라고 하였다. 즉 범부는 자신의 마음이 스스로의 마음을 속박하지만, 도인은 어디에도 얽매임이 없는 것으로 영원한 자유를 얻은 사람만이 인생의 참가치를 알고 사는 사람일 것이다.

법무이법(法無異法)이거늘 망자애착(妄自愛着)하야

법은 다른 법이 없거늘 망령되이 스스로 애착하야

법은 법일 뿐 인간의 집착을 요구하지는 않으며, 진리는 친소(親疎)와 피차(彼此)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법은 무심한 법일 뿐, 달리 가타부타할 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중생이 망견을 내어 애착하고 있으니 잘못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법은 실체가 공하여 어떤 개념에도 묶이지 않는데, 가령 얼음은 차고 불은 뜨겁다고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인식에 고정된 관념이 있기 때문에 그러할 뿐, 인식이 일어나는 주관과 얼음이나 불 사이에 주객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얼음과 불 자체에는 차다고 하거나 뜨겁다고 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중생은 망견을 내어 차다고 하거나 뜨겁다고 하여 끊임없이 분별을 내고 있는 것이다.

신심명(21) 일승에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을 싫어하지 말라.

욕취일승(欲趣一乘)인대 물오육진(勿惡六塵)하라

일승에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을 싫어하지 말라.

일승(一乘)이란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궁극적 진리의 세계인 부처님의 경지, 즉 무상대도를 말한다. 무상대도의 경지는 일체의 거부가 없다. 그러므로 속제俗諦를 버리고 진제(眞諦)를 구하는 것도 아니며, 진속불이(眞俗不二)이므로 있는 그대로가 모두 도의 세계이다.

육진(六塵)은 범부들이 항상 상대하는 객관의 경계이며, 이로 인해 갖가지의 분별망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육진도 진여가 작용을 일으켜 나타나는 것이다. 두두(頭頭)가 비로(毘盧)요, 물물(物物)이 화장(華藏)이라는 말처럼 대도를 성취한 분상에서는 삼라만상이 모든 것이 부처님이요 또한 부처님의 세계라는 것이다.

자신이 도(道) 속에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을 도안(道眼)으로 보게 된다. 그러므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모두 도(道)로 보이기 때문에 어느 것도 버릴 것이 없다. “불법이 단지 세간 속에 있으니 세간을 떠나 부처를 찾는 것은 토끼 뿔을 찾는 것과 같다(佛法只在世間中 離世覓佛求兎角).”는 말처럼. 생활의 현장 속에 진리가 내재해 있는 법이다.

육진불오(六塵不惡)하면 환동정각(還同正覺)이라

육진을 싫어하지 않으면 도리어 정각과 같다.

육진(六塵)을 진여(眞如)의 작용인 줄 알아 싫어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른 깨달음의 경계와 같다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생활합니까?”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느니라.”

깨달은 사람의 일상도 범부의 일상 경계와 똑같은 것으로, 초인적인 신통력을 발휘하면서 특별한 위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는 평범한 생활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 분별에 번뇌로 사는 세계와 절대무(絶對無)에 들어간 무위의 세계는 그 차원이 다르다. 정인(正人)이 정법을 말하면 정법이 사법이 된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