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06월 04일 불교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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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업데이트 : 2016-06-04, 11:24:29 오후

무비스님─‘참 생명’에 눈뜨지 못한다면 ___

‘참 생명’에 눈뜨지 못한다면 살아도 영가와 다를 바 없다

-무비스님-

전생의 선망부모·자손도 동시대를 함께 사는 이웃

자성자리 바르게 본다면 바로 그 순간 천도된 것

백중을 앞두고 많은 불자들이 선망부모천도재를 봉행하고 계십니다.

백중기도는 돌아가신 선망부모를 위해 부처님법에 의지해 천도해드리는 의식입니다.

많은 불자들이 ‘49재를 잘 지내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 아닌가’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얼른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사찰에서 왜 거듭 천도재를 지내는지 질문들을 많이 하십니다.

우리는 이전 생에 수없이 죽고 또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어느 생에선가 여러분의 자손이었던 이가 지금 이 자리에, 오늘 이 순간 법왕루에서 천도재를 봉행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미 태어나서 여여하게 현실을 살아가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다 같이 이 사회에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남아있는 자손들이 선망부모를 위해 천도재를 지내고 마음으로 기도를 올린다면 그 간절한 마음과 기도의 공덕이 선망부모에게, 지금의 나와 내 이웃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어떤 이는 무슨 일을 하던 술술 잘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노력한 것 보다 훨씬 순조롭게 일이 풀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런 모습들을 볼 때면 우리의 자손들이 어디선가 선망부모들을 위해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부처님과의 인연을 통해 이러한 이치를 안 이상 이미 돌아가신지 수십년 되었다하더라도 그분들을 위해 작은 정성을 들이는 것은 자손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 할 것입니다.

또 그 공덕으로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 선망부모의 삶이 순조롭고 평안해진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천도재라는 것은 결국 나와 우리 이웃을 위한 기도이고 공덕의 회향임을 알아야 합니다.

살아있는 우리도 따지고 보면 모두 영가입니다.

전생에 죽은 것을 생각하면 우리 모두가 영가입니다.

우리가 모신 위패의 선망부모나,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은 영가나, 지금 살아있는 우리나 모두 같은 영가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영가인 세계에서 진정 참 생명을 구가하며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천도의 길은 과연 무엇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의 여러 갈래길 가운데 평탄하고 잘 닦여진 천도의 길은 과연 무엇일까.

지금까지도 한국의 대표선사로 추앙받고 있는 성철 스님께서 출가 전 동서고금의 많은 책을 보시다 ‘채근담’을 만났습니다.

‘채근담’을 보면 ‘아유일권경 불인지묵성 전개무일자 상방대광명(我有一卷經 不因紙墨成 展開無一字 常放大光明)’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한 권의 경이 있다.

그 경전은 종이와 먹으로 된 경전이 아니니 펼쳐보아도 문자 하나 없지만 항상 큰 광명을 내고 있다.’ 성철 스님께서는 이 구절을 보시고는 한권의 경, 진정 참 생명이고 우리의 주인공이며 자성자리이며 늘 광명을 내고 살아 움직이는 진정한 참 생명을 찾아 출가하시고 정진하셨다고 합니다.

출가 인연이 바로 이 한 구절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참 생명의 경이 있습니다.

그 참 생명의 경전, 늘 큰 광명을 내고 있는, 그리고 육근을 통해 온갖 신통묘용을 발휘하고 있는 그 경전을 우리가 제대로 알고 배워 거기에 눈을 떠야만 우리는 진정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야 영가가 아닙니다.

그 참 생명, 개개인이 갖고 있는 그 한 권의 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느낌이 없고, 눈을 뜨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천도 받지 못한 영가로 있을 뿐입니다.

진정 영가를 천도하는 길은 바로 그 경전, 그 참 생명을 바로 보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천도하려는 영가를 바르게 천도하는, 탄탄대로로 천도하는, 그리고 우리 자신을 천도하는 길입니다.

불가에서는 ‘부처님 앞에 와서 절 한 번 한 것으로 이미 불도를 마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부처님 앞에서 손 한 번 번쩍 든 것으로 이미 불도를 마쳤다’고도 합니다.

부처님께 꽃 한 송이 공양 올리거나, 어린아이가 모래로 탑을 짓기만 해도 그것으로 모두 성불하였다고도 합니다.

그것은 그 마음이 바로 참 생명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속에 바로 이 한 권의 경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근기의 차이가 있습니다.

구걸하는 거지에게 “목탁을 치면서 ‘나무아미타불’ 세 번만 염하면 시줏돈을 주겠다”고 했으나 그 거지는 “내가 그걸 어떻게 하느냐” 며 염하지 않아 결국 시줏돈을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참 생명의 경전이 있다, 여러분 스스로가 주인공의 자리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것을 순수하게 믿고 따르지 못한다면 누구도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이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 것도 여러분 안에 그 한 권의 경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의 작용입니다.

그것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명확하게 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천도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수천, 수만 번 천도재를 지낸다 해도 천도재가 아닙니다.

천도재 지내는 우리 또한 영가에 불과하게 됩니다.

살아있는 참 사람의 노릇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0을 천개, 만개 나열해도 그 앞에 1이나 2와 같은 실수(實數)가 들어서지 않으면 0은 0일 뿐인 것과 같습니다.

수백, 수천 개의 0은 그저 0일 뿐이지만 그 앞에 실수 하나만 놓으면 그 많은 0은 전부 생명을 발휘합니다.

그 실수가 무엇이겠습니까.

실다운 숫자, 그것이 참 생명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 실다운 숫자가 우리의 삶에 자리하지 못한다면 삶은 헛것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깨우쳐주셨습니다.

참 생명에 대한 바른 이해와 눈뜸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당장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천도를 마친 것이고 그것이 곧 바로 성불입니다.

참선, 염불, 다라니 등 각자 체질에 맞고 성향에 맞는 방편을 이용해 참 생명, 참 사람, 항상 대광명을 내고 있는 그것에 눈뜨시길 바랍니다.

혜암스님─지옥과 천당은 한 집안이다

지옥과 천당은 한 집안이다

-혜암스님-

일반 신도들에게 법문을 할 때는 “나무아미타불”을 염하고 나서 법문을 시작합니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데에는 까닭이 있어요.

나무아미타불을 한 번 부르고 나면 죽는 큰 죄, 팔백겁의 죄를 녹여 버리는 공덕이 생깁니다.

나무아미타불을 한 번 부른 공덕이 이러할진대 참선의 공덕은 말할 것도 없지요.

自業自得(자업자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게 생기는 좋은 일, 나쁜 일 모두가 자신으로부터 비롯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를 잊고 사는 것 같아요.

모두가 남의 탓만 하고 앉아 있어요.

이는 죄받을 일,죽을 일을 만들고 앉아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모두가 “내 놀음” 입니다.

내 마음, 내 공로만큼 받는 것이니 가만있어도 부처님이 복을 지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매일 세끼 밥을 꼭 챙겨 먹으면서도 법문을 듣는 것에는 게으릅니다.

법문을 듣고 앉아 있으면 다 아는 얘기 같거든요.

그러나 행이 따르지 않는 앎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성불하기 전까지는 알고 있는 내용이라도 법문을 밥 먹듯이 듣고 이를 부지런히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법문을 수없이 들어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게 우리 중생들이예요.

아무 일도 없으면 심심해서 무슨 일이라도 일을 만듭니다.

일이 없으면 공연히 걱정스럽고, 또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것이 모두 헛것인데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죄지을 일을 만들어 냅니다.

육근(六根)이 무사할 때, 다시 말해서 여섯 도둑놈이 일이 없을 때가 제일 좋은 때인데 사람들이 그걸 몰라요.

그래서 귀 도둑놈, 눈 도둑놈, 코 도둑놈을 만들어 지옥에 가는 일을 만드는 판국입니다.

이래가지고도 도를 닦지 않는다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눈 밝은 이가 보면 고생길이나 죽을 길만 일부러 찾아다니는 것과 같아서 안타까워요.

천지의 은혜보다 귀중한 것이 불, 법, 승 삼보입니다.

성불할 때까지 이 삼보를 의지해서 쉼 없이 정진해야 합니다.

좋은 법문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말입니다.

아무리 더는 없을 富貴榮華(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내 마음”을 몰라가지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물질이 풍부하든 그렇지 못하든 내 마음을 모른다면 귀신이 중간에 끼어들어 속이고 다니며 죽을 길로 끌고 갑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도 이를 쓰지 못한다면 오히려 물질을 지님으로 해서 남을 해치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나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입니다.

옛 도인의 말씀에, 태어나면 소금 장사밖에 할 일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행복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조금치라도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엉뚱한 곳에 가서 행복을 찾으려고 야단이니 어서 빨리 내 마음을 찾는 공부를 해야지요.

우리가 끌고 다니는 이 몸은 길가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줍듯이, 주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몸뚱이는 분명히 나이면서도 내 것이 아닙니다.

이 몸은 천 번, 만 번 만나보아야 아무런 이익이 없어요.

살아 보아야 괴롭기만 하지.

뭐, 좋은 일이 있습니까? 밥 먹고, 세수하고, 화장실 가고, 남을 돕거나 해치는 일, 뭐, 그런거지, 그밖에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길에서 몸을 주웠듯이 몸보다 더 중요한 불법을 만나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보물이 있는데 엉뚱하게 밖에서 구하려고 하니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콧구멍 속에 시방세계가 들어있고, 귓구멍 속에 한량없는 부처님 나라가 다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깨치고 보면 시방세계가 모두 나로부터 나오고, 하늘과 땅, 해와 달을 내가 만들어 낸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내 마음 자리에서 보면 수없이 스러졌다 일어서는 바다의 파도만도 못한 것입니다.

경전에 있는 말을 바로 알면 몰라도 짐작으로 알면, 이는 크게 어긋나는 일입니다.

도는 모양이 없는 것이어서 물건과 같이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천 분이 나타나신다 해도 나의 일은 모릅니다.

자기 마음은 오로지 자기가 깨달아 써먹어야지요.

예컨대 八萬大藏經(팔만대장경)도 서울로 가는 노정일 뿐이지 서울 그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을 다 외운다고 하더라도 “이 뭐꼬?” 하며 참선만 하는 사람을 당하지 못합니다.

道(도)라는 것은 오직 내가 깨닫는 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말이지요.

참선보다 더 큰 기도는 없고, 적멸보궁에서보다 원당암에서 “이 뭐꼬?” 하는 것이 훨씬 값어치가 나갑니다.

참선은 곧 활구요, 정법이요, 부처입니다.

이것 하나를 가르치려고 부처님이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문중에 들어와야 큰소리를 치고 살 길을 만나는 거지요.

밥먹는 얘기 백날 해야 아무 소용없고, 결국은 밥을 먹어야 먹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지요.

道앞에서는 팔만대장경도 어쩔 수 없고, 부처라는 글자도 보잘 것 없습니다.

부처의 ‘佛(불)’ 字(자)를 몰라도 부처님이 참선을 해서 부처가 되었다는, 이 뜻을 아는 사람은 그대로 “살 길”을 만난 겁니다.

首座(수좌)스님의 뜻은 말 그대로 하나님보다 높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天上天下(천상천하)에서 제일 꼭대기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렇듯 이름 자체가 제일 높은 사람인데 부러울 게 뭐 있습니까? 사람의 몸을 받았으니 참선 공부를 해볼 만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이러한 법을 만났다면, 이보다 더 복이 많은 사람은 없겠지요.

이러한 법을 안다면 한 나라의 대통령일지라도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마음자리에서 보면 모든 인간관계가 터럭 끝만도 못한 것인데 사람들은 내 아들, 내 딸 하면서 집착하고 또 집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살겠다고 이름만 빌린 것을 가지고 그렇듯이 어리석게 집착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 버릇을 버려 병을 고치지 않으면 온몸이 마르게 고생고생하고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나 귀신이나 자식에게 집착하는 버릇은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부처님 시대에 어느 집에서든 아이만 낳으면 잡아다가 자기 새끼에게 먹이는 귀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 귀신의 버릇을 고치려고 그가 제일 사랑하고 아끼는 막내아들을 빼앗아 왔습니다.

귀신은 애가 타서 부처님을 찾아와서는 “내 막내아들이 없어졌으니 부처님의 도력으로 찾아주십시오” 하고 부탁을 했어요.

그러자 부처님은 “너도 자식을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왜 사람의 아이를 잡아다가 네 새끼들에게 남의 애를 먹이느냐? 네가 사랑하는 아들을 만나고 싶거든 이제부터는 사람을 잡아다가 먹이지 말아라” 하시며, 바릿대에 담아 두었던 귀신의 막내아들을 내어주더랍니다.

이때부터 귀신은 바릿대 물을 먹고 살았고,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듯이 사람이나 귀신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자기 자식에 집착하여 죽을 길만 찾아다니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얼핏 보면 부모와 내가 가까운 것 같아도 사실상 멀고 먼 관계입니다.

늘상 나를 따라 다니는 내 몸도 나와 거리가 먼데, 하물며 부모야 말해서 무얼하겠습니까? 본래 자리에서 보면 부모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부모가 생기기 이전부터, 하늘과 땅이 생기기 이전부터 우리는 있었어요.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왔으니 육체로 보아서는 부모와 가까운 관계라 할 수 있지만, 이 몸뚱이가 내가 아닌 것을 안다면 부모다, 자식이다 하여 집착할 필요가 없지요.

이것을 모르고 중생들은 내 부모, 내 자식에 끄달려 죽을 길만 찾아다니니, 부처님 법 아니면 어디서 이러한 바른 법을 깨우치겠습니까? 또한 이 문중에 들어서지 않으면 이 법을 어디에서 만나겠습니까? 그만큼 이러한 정법을 만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삼생원가三生怨家 윤회본인輪廻本因 효봉스님의 손자 상좌인 관음사주지스님의 말이, 효봉스님이 예전에 동화사 조실로 계실때에 써 놓은 여러 현판 가운데에 하나인데, 나중에 현판식을 하려고 찾아보니 이 글자만 없어졌다고 해요.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더니 뒤에 방을 고치려고 마루를 뜯다가 마룻장 밑에서 이 글자가 나와 그 주지 스님이 보관했다가는 벽에 걸어 놓았다고 해요.

이 글의 뜻은 살아서 복짓는 일이 전생, 금생, 후생이라는 삼생의 원수요, 윤회의 근본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복을 짓고 살아봐야 나고 죽는 씨앗이 되어 버려 천상의 불구덩이밖에 못 가고, 불구덩이에 가면 도로 지옥에 가지요.

지옥과 천상은 한집안이기 때문입니다.

사는 것만이 고생이 아닙니다.

우리가 잊고 있어서 그렇지, 나고 죽으러 다니는 고생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습니다.

뼈마디가 다 녹아들도록 괴롭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경전에 보면 나고 죽을 때의 괴로움이 모두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고 죽는 일이 없는 극락세계가 있는데 왜 사서 그러한 고생길을 만듭니까? 중생이 이러한 고통을 받지 않게 하려고 길잡이 하러 나온 이가 바로 성인입니다.

성인은 부처님의 하인노릇을 하려고 이 세상에 나온 거예요.

우리도 이를 본받아 부처님의 하인노릇을 하려는 원력을 세워야 합니다.

부처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대로가 극락이에요.

부처님의 은혜를 하늘과 땅에 비할 수가 있습니까? 이 한 몸 다 바쳐도 부처님의 은혜를 갚지 못합니다.

도인이 되어 중생을 제도할 때에 그분의 은혜를 갚을 수 있지.

물질적으로는 갚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은혜가 하도 비싸서 그래요.

말이나 글자에는 도가 없습니다.

참선 열심히 해서 부처가 됩시다.

참선이 없었으면 중될 일도 없었겠지요.

참선은 곧 부처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정진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