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청소의 공덕,근심이 없어진다/ 혜암스님 한량없는 복을 받다 내일은 해인사에서 장경불사가 있는 날입니다. 사실 장경불사는 책에도 없는 불사입니다. 해인사의 허물 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해인사 대장경불사는 해인사 빚을 갚으려고 절 살림을 꾸리던 스님이 생각 해 낸 불사였습니다. 시작은 그렇지만, 공부를 시켜도 신도들이 하지 않으니 이런 인연이라도 맺어 주려 고 한 의도도 있습니다. 장경불사 자체가 그대로 복이… 혜암스님─화장실청소의 공덕근심이 없어진다 계속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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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암스님─지옥과 천당은 한 집안이다
지옥과 천당은 한 집안이다
-혜암스님-
일반 신도들에게 법문을 할 때는 “나무아미타불”을 염하고 나서 법문을 시작합니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데에는 까닭이 있어요.
나무아미타불을 한 번 부르고 나면 죽는 큰 죄, 팔백겁의 죄를 녹여 버리는 공덕이 생깁니다.
나무아미타불을 한 번 부른 공덕이 이러할진대 참선의 공덕은 말할 것도 없지요.
自業自得(자업자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게 생기는 좋은 일, 나쁜 일 모두가 자신으로부터 비롯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를 잊고 사는 것 같아요.
모두가 남의 탓만 하고 앉아 있어요.
이는 죄받을 일,죽을 일을 만들고 앉아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모두가 “내 놀음” 입니다.
내 마음, 내 공로만큼 받는 것이니 가만있어도 부처님이 복을 지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매일 세끼 밥을 꼭 챙겨 먹으면서도 법문을 듣는 것에는 게으릅니다.
법문을 듣고 앉아 있으면 다 아는 얘기 같거든요.
그러나 행이 따르지 않는 앎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성불하기 전까지는 알고 있는 내용이라도 법문을 밥 먹듯이 듣고 이를 부지런히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법문을 수없이 들어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게 우리 중생들이예요.
아무 일도 없으면 심심해서 무슨 일이라도 일을 만듭니다.
일이 없으면 공연히 걱정스럽고, 또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것이 모두 헛것인데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죄지을 일을 만들어 냅니다.
육근(六根)이 무사할 때, 다시 말해서 여섯 도둑놈이 일이 없을 때가 제일 좋은 때인데 사람들이 그걸 몰라요.
그래서 귀 도둑놈, 눈 도둑놈, 코 도둑놈을 만들어 지옥에 가는 일을 만드는 판국입니다.
이래가지고도 도를 닦지 않는다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눈 밝은 이가 보면 고생길이나 죽을 길만 일부러 찾아다니는 것과 같아서 안타까워요.
천지의 은혜보다 귀중한 것이 불, 법, 승 삼보입니다.
성불할 때까지 이 삼보를 의지해서 쉼 없이 정진해야 합니다.
좋은 법문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말입니다.
아무리 더는 없을 富貴榮華(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내 마음”을 몰라가지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물질이 풍부하든 그렇지 못하든 내 마음을 모른다면 귀신이 중간에 끼어들어 속이고 다니며 죽을 길로 끌고 갑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도 이를 쓰지 못한다면 오히려 물질을 지님으로 해서 남을 해치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나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입니다.
옛 도인의 말씀에, 태어나면 소금 장사밖에 할 일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행복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조금치라도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엉뚱한 곳에 가서 행복을 찾으려고 야단이니 어서 빨리 내 마음을 찾는 공부를 해야지요.
우리가 끌고 다니는 이 몸은 길가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줍듯이, 주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몸뚱이는 분명히 나이면서도 내 것이 아닙니다.
이 몸은 천 번, 만 번 만나보아야 아무런 이익이 없어요.
살아 보아야 괴롭기만 하지.
뭐, 좋은 일이 있습니까? 밥 먹고, 세수하고, 화장실 가고, 남을 돕거나 해치는 일, 뭐, 그런거지, 그밖에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길에서 몸을 주웠듯이 몸보다 더 중요한 불법을 만나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보물이 있는데 엉뚱하게 밖에서 구하려고 하니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콧구멍 속에 시방세계가 들어있고, 귓구멍 속에 한량없는 부처님 나라가 다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깨치고 보면 시방세계가 모두 나로부터 나오고, 하늘과 땅, 해와 달을 내가 만들어 낸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내 마음 자리에서 보면 수없이 스러졌다 일어서는 바다의 파도만도 못한 것입니다.
경전에 있는 말을 바로 알면 몰라도 짐작으로 알면, 이는 크게 어긋나는 일입니다.
도는 모양이 없는 것이어서 물건과 같이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천 분이 나타나신다 해도 나의 일은 모릅니다.
자기 마음은 오로지 자기가 깨달아 써먹어야지요.
예컨대 八萬大藏經(팔만대장경)도 서울로 가는 노정일 뿐이지 서울 그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을 다 외운다고 하더라도 “이 뭐꼬?” 하며 참선만 하는 사람을 당하지 못합니다.
道(도)라는 것은 오직 내가 깨닫는 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말이지요.
참선보다 더 큰 기도는 없고, 적멸보궁에서보다 원당암에서 “이 뭐꼬?” 하는 것이 훨씬 값어치가 나갑니다.
참선은 곧 활구요, 정법이요, 부처입니다.
이것 하나를 가르치려고 부처님이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문중에 들어와야 큰소리를 치고 살 길을 만나는 거지요.
밥먹는 얘기 백날 해야 아무 소용없고, 결국은 밥을 먹어야 먹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지요.
道앞에서는 팔만대장경도 어쩔 수 없고, 부처라는 글자도 보잘 것 없습니다.
부처의 ‘佛(불)’ 字(자)를 몰라도 부처님이 참선을 해서 부처가 되었다는, 이 뜻을 아는 사람은 그대로 “살 길”을 만난 겁니다.
首座(수좌)스님의 뜻은 말 그대로 하나님보다 높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天上天下(천상천하)에서 제일 꼭대기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렇듯 이름 자체가 제일 높은 사람인데 부러울 게 뭐 있습니까? 사람의 몸을 받았으니 참선 공부를 해볼 만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이러한 법을 만났다면, 이보다 더 복이 많은 사람은 없겠지요.
이러한 법을 안다면 한 나라의 대통령일지라도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마음자리에서 보면 모든 인간관계가 터럭 끝만도 못한 것인데 사람들은 내 아들, 내 딸 하면서 집착하고 또 집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살겠다고 이름만 빌린 것을 가지고 그렇듯이 어리석게 집착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 버릇을 버려 병을 고치지 않으면 온몸이 마르게 고생고생하고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나 귀신이나 자식에게 집착하는 버릇은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부처님 시대에 어느 집에서든 아이만 낳으면 잡아다가 자기 새끼에게 먹이는 귀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 귀신의 버릇을 고치려고 그가 제일 사랑하고 아끼는 막내아들을 빼앗아 왔습니다.
귀신은 애가 타서 부처님을 찾아와서는 “내 막내아들이 없어졌으니 부처님의 도력으로 찾아주십시오” 하고 부탁을 했어요.
그러자 부처님은 “너도 자식을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왜 사람의 아이를 잡아다가 네 새끼들에게 남의 애를 먹이느냐? 네가 사랑하는 아들을 만나고 싶거든 이제부터는 사람을 잡아다가 먹이지 말아라” 하시며, 바릿대에 담아 두었던 귀신의 막내아들을 내어주더랍니다.
이때부터 귀신은 바릿대 물을 먹고 살았고,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듯이 사람이나 귀신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자기 자식에 집착하여 죽을 길만 찾아다니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얼핏 보면 부모와 내가 가까운 것 같아도 사실상 멀고 먼 관계입니다.
늘상 나를 따라 다니는 내 몸도 나와 거리가 먼데, 하물며 부모야 말해서 무얼하겠습니까? 본래 자리에서 보면 부모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부모가 생기기 이전부터, 하늘과 땅이 생기기 이전부터 우리는 있었어요.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왔으니 육체로 보아서는 부모와 가까운 관계라 할 수 있지만, 이 몸뚱이가 내가 아닌 것을 안다면 부모다, 자식이다 하여 집착할 필요가 없지요.
이것을 모르고 중생들은 내 부모, 내 자식에 끄달려 죽을 길만 찾아다니니, 부처님 법 아니면 어디서 이러한 바른 법을 깨우치겠습니까? 또한 이 문중에 들어서지 않으면 이 법을 어디에서 만나겠습니까? 그만큼 이러한 정법을 만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삼생원가三生怨家 윤회본인輪廻本因 효봉스님의 손자 상좌인 관음사주지스님의 말이, 효봉스님이 예전에 동화사 조실로 계실때에 써 놓은 여러 현판 가운데에 하나인데, 나중에 현판식을 하려고 찾아보니 이 글자만 없어졌다고 해요.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더니 뒤에 방을 고치려고 마루를 뜯다가 마룻장 밑에서 이 글자가 나와 그 주지 스님이 보관했다가는 벽에 걸어 놓았다고 해요.
이 글의 뜻은 살아서 복짓는 일이 전생, 금생, 후생이라는 삼생의 원수요, 윤회의 근본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복을 짓고 살아봐야 나고 죽는 씨앗이 되어 버려 천상의 불구덩이밖에 못 가고, 불구덩이에 가면 도로 지옥에 가지요.
지옥과 천상은 한집안이기 때문입니다.
사는 것만이 고생이 아닙니다.
우리가 잊고 있어서 그렇지, 나고 죽으러 다니는 고생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습니다.
뼈마디가 다 녹아들도록 괴롭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경전에 보면 나고 죽을 때의 괴로움이 모두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고 죽는 일이 없는 극락세계가 있는데 왜 사서 그러한 고생길을 만듭니까? 중생이 이러한 고통을 받지 않게 하려고 길잡이 하러 나온 이가 바로 성인입니다.
성인은 부처님의 하인노릇을 하려고 이 세상에 나온 거예요.
우리도 이를 본받아 부처님의 하인노릇을 하려는 원력을 세워야 합니다.
부처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대로가 극락이에요.
부처님의 은혜를 하늘과 땅에 비할 수가 있습니까? 이 한 몸 다 바쳐도 부처님의 은혜를 갚지 못합니다.
도인이 되어 중생을 제도할 때에 그분의 은혜를 갚을 수 있지.
물질적으로는 갚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은혜가 하도 비싸서 그래요.
말이나 글자에는 도가 없습니다.
참선 열심히 해서 부처가 됩시다.
참선이 없었으면 중될 일도 없었겠지요.
참선은 곧 부처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정진하기 바랍니다.
혜암스님─어디가든 화합하고 즐겁게 삽시다
어디가든 화합하고 즐겁게 삽시다 혜암 선사
번뇌 망상 없는 청정한 물건이 본래 나 –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만 사실 평소와 다를게 뭐 있겠습니까? 인간 사는 것이 다 똑같지요.
알고보면 흥하고 망하고 하는 것이 다른데 있지 않아요.
너한테 있는 것도 나한테 있는 것도 아니에요.
순전히 우리 마음을 모르는데 있어요.
우리 마음만 알면 무엇이든 잘 됩니다.
안으로 밖으로 안될 일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 마음을 모르니까 이렇게 걱정 근심 재앙이 자꾸 생기지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나 마찬가지죠.
국가의 대형사고가 금년에 얼마나 많이 났어요.
알 수 없는 일은 세상사이고 뜻대로 안되는 것도 세상사인데 무얼 어떻게 잘 되길 바라겠어요.
그러나 우리가 지금 직장에 대해 충실하고 집안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고 단체의 단결, 화합만 되면 나라도 단체도 집안도 개인도 모두 잘돼요.
개인도 눈 코 귀 입이 화합만 되면 탈이 안나요.
눈은 눈대로 코는 코대로 귀는 귀대로 욕심을 부려서 병도 나고 근심도 생기는 것이지 화합만 하면 아무 일도 없이 잘 됩니다.
나라 일이나 하늘 땅 일이나 우리 몸뚱이나 똑같아요.
조금도 틀리지 않습니다.
자기 일 잘하는 사람은 다른 일도 다 잘 합니다.
자기 일도 못하는 사람이 남을 어떻게 가르치고 도와주겠습니까? 우리 몸뚱이가 하늘이고 땅입니다.
단결 화합하고 어디가든 기쁘고 즐겁게 살아요.
다른 사람 애먹이지 말고.
나도 해롭고 남도 해로운 짓을 뭐하려고 합니까.
짧은 시간에 남도 도우면서 멋있게 살지, 우리가 얼마 산다고 남을 해치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단결, 화합하고 즐겁게 삽시다.
남 즐겁게 해서 내가 손해날 일이 뭐 있겠습니까? 가는데 마다 그런 생각을 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치에 맞도록 그 법을 어기지 말고 합리적으로 삽시다.
이 몸뚱이를 이치에 맞도록 안해 주니까 배탈도 나고 병도 들고 하는 겁니다.
새해를 맞이해 작년에는 되는대로 살았지만 금년에는 아주 정신을 차려서 남을 기쁘게 도와주고 살아야겠다는 생각, 새해를 맞이할 때는 그런 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작년하고 달리 살아야겠다는 생각말입니다.
작년에는 죄만 짓고 할 일도 못하고 살았으니 올해는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달라짐이 있어야 새해를 맞는 보람이 있는 것이지 항상 살던 대로 살면 나이 먹은 값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새해에는 첫째로 자기 직장에 사명감을 갖고 충실하고 둘째는 남을 위해서 단결, 화합해 남을 기쁘고 즐겁게 만들어 주고 셋째는 합리적으로 이치에 맞게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럼 다 지상낙원, 인간 극락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선(禪)과 정(定)을 얘기하곤 합니다.
어떤 것을 禪(선)이라 하며 어떤 것을 定(정)이라 합니까.
망념이 일어나지 아니함이 선이요 앉아서 본성을 보는 것이 정입니다.
본성이란 무생심(無生心)이요, 정이란 경계를 대함에 무심하여 팔풍(八風)에 움직이지 아니함입니다.
팔풍이란 이로움과 손실 헐뜯음과 좋은 평판 칭찬함과 비난함 괴로움 즐거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이 정(定)을 얻은 사람은 비록 범부라고 하더라도 부처님 지위에 들어간다고 하셨으니 이와같이 얻은 사람을 해탈했다고 하며 또 피안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는 육도(六度)를 뛰어넘고 삼계(三界)를 벗어난 대력보살(大力菩薩)이며 무량역존(無量力尊)이니 대장부인 것입니다.
망념이 일어나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분별육식(分別六識)뿐만 아니라 제팔아뢰야식의 미세망념(微細妄念)까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팔식은 끊어졌으나 제팔아뢰야식이 남아 있으면 선이 아닙니다.
미세망념이 모두 끊어지면 망념의 구름이 걷히고 진여자성인 지혜의 해가 드러나서 자기 본성을 보지 않을래야 보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곧 돈오(頓悟)이며 해탈이며 성불입니다.
본성이란 제팔아뢰야식의 무기심(無記心)의 무생심(無生心)이 아니고 제팔아뢰야식의 무기심의 무명(無明)까지 완전히 끊어진 진여본성이 본래의 구경 무생심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보는 것이 본성을 보는 것이며 불성을 보는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지 아니한 것이 무생심이며 본성이므로 표현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은 똑같습니다.
정(定)이란 모든 경계를 대할 때 무심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체 망념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진여본성이 드러나서 대무심지(大無心地)가 현전하여 행왕좌와(行往坐臥)와 어묵동정(語默動靜)뿐만 아니라 자나 깨나 미래겁이 다하도록 경계에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나를 이롭게 하거나 해롭게 하거나 헐뜯거나 좋다거나 칭찬하거나 비난 하거나 괴롭거나 즐겁거나 하는 팔풍이 거세게 불어닥친다 해도 여기에 움직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본성을 바로 깨쳐서 망념이 다 떨어지고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해서 일체처(一切處)에 무심이 되는 것이니 이런 사람은 설사 겉보기에는 범부같이 보이지만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한 부처님의 지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범부라고 하는 것은 꼭 사람만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팔세용녀가 성불하듯이 남자든 여자든 축생이든 무엇이든지간에 무생법인을 증득하면 모두 부처인 것입니다.
그 이유로서 보살계경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보살계경에서 말하는 부처님 계라고 하는 것은 고기를 먹지 말라 술을 먹지 말라 는 등의 무엇을 하지 말라는 명상(名相)에 의지해서 계첩을 받거나 말 몇마디 듣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여자성계(眞如自性戒)를 받아서 자성을 바로 깨칠 것 같으면 이것이 부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중들은 이런 법문을 많이 듣고 바로 실천하여서 공부를 성취해야지 만약 그렇지 않고 말로만 듣고 귓전으로 흘려보내 버린다면 도리어 듣지 않는 것만 못한 것이니 화두를 부지런히 들어 하루빨리 깨달아 일이없는 도인이 됩시다.
삼세고금수시친(三世古今誰是親)가 담연일물본래진(湛然一物本來眞)이라.
개화낙엽근유일(開花落葉根唯一)이요 일월거래절왕환(日月去來絶往還)이로다.
삼세고금에 어떤 것이 참 나인가 청정한 한 물건이 본래 나일세.
꽃피고 잎지나 그 뿌리는 하나요 해와 달이 뜨고 져도 가고 옴이 없도다.
어떤 것이 참 나인가, 내가 누구냐? 이것은 내가 아니요, 이 세상 돌아온 세상 어떤 것이 나인가 말이요.
번뇌망상이 없는 청정한 물건이 본래 나일세.
작은 생각, 옳은 생각, 그른 생각 이런 생각은 내가 아니요, 참으로 나라는 것은 한 생각, 아무 생각도 일어나기 전에 따로 있어요.
그래서 눈깜짝할 사이라도 나를 찾다 가는 것이 사람으로서 보람있는 삶인 것입니다.
돈벌어서 재산을 쌓고, 벼슬을 해서 존경을 받으려 하고 그런 일이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가 있느냐하면 사실은 그렇지도 않아요.
안해봐서 그렇지남한테 대접받는 것도 피곤해요.
대접받지 않을 때는 자유롭지 않습니까? 낮잠을 자든 어디가서 뒹굴든 누가 시비하겠어요.
대접받으려면 옷도 맘대로 못입고 다니고 신발도 아무거나 못신어요.
세상 일은 따지고 보면 공짜가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실제로는 남 부러워 할 일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단지 몰라서 그렇지 꽃피고 잎지나 그 뿌리는 하나요, 진리도 하나입니다.
사람만 이렇게 많지 우리는 한 뿌리에서 나왔거든요.
네 맘 다르고 내 맘 다르고 하지 않아요.
몸뚱이만 다르지 다 똑같은 마음이에요.
그래서 꽃피고 잎지는 그 뿌리는 하나요, 해와 달이 뜨고 져도 가고 옴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동네 어떤 사람은 공부하러 오기도 전에 죽어서 화장터에서 타버리기도 하고 땅에 묻히기도 해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렸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아주 없어져 버렸습니까? 원래 육신은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고 허공의 구름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여기 육신을 부려먹고 다니는 주인공이 있지 않아요? 나, 이 나란 것은 죽지 않아요.
반야심경 법문같이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더 커지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나지도 않고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주인공은 변하지 않는 내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그 내 주인은 걱정, 근심하는 물건도 아니고 잘되고 안될 일도 없고 그것이 바로 성불이고 자유고 또 해탈입니다.
일체의 구속과 고통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해탈이에요.
번뇌, 망상을 나무껍데기처럼 벗어버려야 해요.
우리가 번뇌 망상 벗어버리려고 공부하는것 아닙니까? 삼세고금에 어떤 것이 참 나인가, 번뇌 망상없는 청정한 한 물건이 본래 나일세.
꽃피고 잎지나 그 뿌리는 하나요, 해와 달이 뜨고 져도 가고 옴이 없도다.
‘억!’ 이렇게 큰소리를 치는 것은 말로는 불법을 설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뜻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은 그렇게 알아두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방망이를 들기도 하고 치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는 것도 말로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어쨌든 날마다 들어도 말만 다르고 글자만 다르지 이치는 똑같습니다.
한 번 들으면 그만인데 한 번 듣고 못알아 듣는 사람을 위해서 하고 또 하기 마련이고 또 이런 법문을 알아 들을 수는 있지만 까마귀처럼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세속살림살이 때문이겠죠.
그러니까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하고 또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말도 못알아듣죠.
그렇지만 자꾸 듣다 보면 나중에는 알게 됩니다.
귀가 열리는 것이죠.
몸뚱이도 내가 아니다, 우리 맘도 내가 아니다 하니까 이걸 믿고 배우려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러나 이건 거짓이 아닙니다.
진짜 헛것은 따로 있어요.
있는 이대로가 허공의 구름과 같은거지요.
구름이 있는것 같아도 저거 다 헛것이거든요.
이건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인이 따로 있어요.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어요.
못봐서 그렇지 참선을 해가지고 깨달음을 얻으면 알게 되는거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도 없고 귀신도 없어요.
우리 마음이 삿되면 마구니가 되고 우리 마음이 바르면 바로 부처가 되는 거지요.
손과 같다고 할까요.
엎으면 손등이 보이고 뒤집으면 손바닥이 보이는 것처럼 범부와 성인이 딱 붙어 있어요.
한치도 거리가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어두운 마음이 근본 은 밝은 마음인데 부처님 마음과 손바닥처럼 딱 붙어 있습니다.
깨달으면 범부가 성인이 됩니다.
지금 우리는 깨닫지 못한 성인이고 부처님은 깨달은 성인이라는 그 차이만 있어요.
공부들 하세요.
성공한 유명한 사람들은 세월을 아끼기를 자기 눈동자보다 더 아끼라 합니다.
늙어서는 돈도 못벌고 공부도 못하고 살림도 못하고 재주를 배우기도 어렵습니다.
시간은 이처럼 귀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허망한 목숨보다 시간을 더 아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미련한 인간들이 돈, 돈, 돈 타령을 하는데 돈을 잃어버리는 것은 조그만 물건 잃어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세상법으로 따지더라도 남한테 실수를 범하면 명예를 잃는 것입니다.
그것은 큰 재산을 잃는 것입니다.
돈은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남에게 신용 잃으면 그것을 회복하는데 얼마나 힘이 들겠어요? 돈 잃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줄 알고 살면 됩니다.
남한테 신용을 잃으면 엄청난 재산을 잃는줄 알고 신용을 지키라는 겁니다.
신용을 지켜야 장사도 잘하고 정치도 잘하고 살림도 잘할 것 아닙니까? 신용없이 무엇 하나 잘할 수 있겠습니까.
그 신용이 돈보다도 더 큰 재산이라는 것을 명심하세요.
그런데 신용보다 더 큰 재산은 건강입니다.
몸뚱이가 없으면 돈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남한테 대접받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건강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재산인줄 알아야 합니다.
건강이 제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