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장스님─마음을 비우고 실천하는 결제

마음을 비우고 실천하는 결제

법장스님

(전조계종 총무원장) 오늘은 매년 다가오는 10월 15일 결제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결제 때 되면 매년 100일 기도 입재를 하지요.

결제와 기도 입재를 하면서 우리가 새롭게 마음을 가다듬지 않으면 결제는 하나의 형식일 뿐입니다.

기도 입재도 역시 세월만 갈 뿐이지 내가 바라고 원하는 뜻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화엄경에 있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단 여기서 신도님들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첫째는 내가 여기서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여러 스님들한테서 다 들은 얘기이지만 그렇게 가볍게 생각해서 넘기지 말고, 또 설혹 제가 어려운 얘기를 하더라도 듣기 정말 난처해서 들어도 뭐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하지 말고 자세히 들어서 새기고 새겨서 쉬운 얘기라도 여러분께서는 실천해 옮길 때만이 여러분들이 진실한 결제를 할 수 있고, 또한 진실한 기도 입재를 해서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결제는 승속을 막론하고 똑같이 결제에 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님들이 해야 하는 것과 신도님들이 해야 하는 것을 약간 구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님들이 지켜야 되는 계는 중계라 해서 많고, 여러분이 지켜야 하는 것은 가벼우면서 또한 적고, 그렇기 때문에 구분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결제를 임하면서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알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부처님이 무엇을 가르쳤는가 왜 우리한테 가르치는 부처님의 말씀이 3천년 전부터 내려오고 있는지, 우리는 왜 그것을 본받아야 되는지 이것을 진실로 알고 싶으면 마음을 비우시기 바랍니다.

아주 텅 빈 그릇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께 여러분이 소원, 대원 엄청나게 많은 욕심을 갖고 있고, 가지각색으로 각기 다를 것입니다.

그런 소원을 여러분들이 정말로 성취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여러분들의 마음 그릇을 텅 비워서 빈 그릇으로 들어오세요.

그래야 그 빈 그릇에 가득 채워 가지고 가실 수 있고, 원하는 것만 담아 가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을 가득 채워서 부처님께서 아무리 달라고 해도 부처님이 금은 보화를 주셔도 들어가지를 못하고 그냥 넘치게 됩니다.

원리망상급제취(遠離妄想及諸趣) 하고, 영심소향개무애(令心所向皆無擬) 하라.

여러분들이 정말로 짧게 일어나고, 길게 일어나고, 가까이 있고, 멀리 있고, 중요한 것이건 그런 번거로운 생각, 분별심을 결코 일으키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유스러움을 얻을 수 있고, 해탈을 얻을 수 있고, 가장 알기 쉽게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부처님께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듣고 배우면서도 모르고, 입으로 헤아리고 귀로 들으면서도 실천해 옮기지 못하고, 욕심만 가득 가지고 와서 쌀, 돈 가지고 와서 “대자대비 부처님, 이루어 주십시오.”하고 비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바라기 전에 내 마음을 청결하게 아주 비우고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법문도 여러분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들으셔야지 법당에 나가면서도 “오늘 원장스님께서 이런 법문을 했어.”라고 다시 되새길 수가 있고 또한 집에 가셔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집에 있어도 조계사 법당에서 와서 저의 법문을 듣는 것이고, 또 가면서도 여러분들이 바로 법문을 듣는 것이요.

또한 신발을 신고 나가면서도 설혹 일어서서 나가면서도 법문을 듣는 것입니다.

그 법문을 잊지 않고, 가지고 다닐 때만이 진실한 기도를 하고, 진실한 기도를 하고, 결제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여기서는 실컷 듣고 들을 때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고, 신발 신고 나가면서 “원장스님이 무슨 얘기를 했지?” 이렇게 물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 마음에 분별심이 가득 차 있었구나.’하는 것을 되돌아보시고, 또 참회를 하고, 스스로 경책을 하셔야만 한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오늘은 여러분들한테 결제 또한 기도 입재라는 딱딱한 산중에서 하는 법문보다는 부처님 말씀 중에서 몇 가지를 정리를 해서 새로운 신행 활동에 전기를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져 보았습니다.

세존당입설산중(世尊當入雪山中 )이요, 일좌부지경육년(一座不知經六年 )이라, 인견명성운오도(因見明星云悟道)하고 언전소식변삼천(言詮消息邊三天)이라.

세존께서 수행을 하러 들어가서 설산으로 들어가서 한번 앉은 다음에 6년이 어떻게 지나 간 줄을 몰랐습니다.

여러분들도 참선을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종교를 넘어서 용맹정진을 다섯 번을 했습니다.

그런데, 참선을 할 때 시계를 앞에 두더라도 보지 않으면 한 30분은 훌쩍 지나가는데, 일단 시계를 한번 보게 되면 그때부터 그 이후 5분은 왜 이렇게 안 지나가고, 그러다가 5분은 남아 있는데, 입승스님께서 죽비를 치셔야 하는데, 세상에 앉아서 부글부글 속이 끓는 것이 입승스님이 왜 죽비를 안 치시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설산에 들어가서 6년이 지났는지 한 시간이 지났지 몰랐습니다.

새벽에 별을 보고 깨달으신 뒤에 그 소식을 온 세상에 두루 핀 것이 바로 오늘까지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때 핀 뜻이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가장 자유스럽게 사는 것, 가장 편안하게 사는 것, 가장 근심 걱정 없이 사는 것 더 이상 바랄 것도 욕심낼 것도, 시기할 것도 없는 삶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와 같이 설산에 들어가서 6년 동안을 단 한순간처럼 그렇게 보내신 것을 받들어 우리도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10월 15일부터 정월 15일까지 결제 기간이라 해서 우리가 오늘 바로 10월 15일날 결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는 돌아다녀서도 안 됩니다.

결제해서 정진하는 스님들에게는 계율이 얼마만큼 엄격한 규칙이 있는가 하면은 결제 중에 돌아다니는 스님은 속된 얘기로 ‘때려 죽여도 살인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렇게 엄한 규칙이 있습니다.

선방에 가보면 신문, 잡지, 텔레비전 등을 일체 볼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문 열고 들어갈 때 소리가 난다고 해서 문고리에 종이를 싸서 소리를 다 제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엄한 것이 우리 승가의 수행자의 결제인 것입니다.

그럼 이 결제는 왜 하는가? 결제를 하는 것은 선정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선정이란 것이 무엇인가? 바로 흔들리지 아니하는 지혜, 깨달음을 말합니다.

거기에는 죽고 사는 것도 없고, 좋고 싫은 것도 없고, 많고 적은 것도 없는 아주 자유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 우리는 결제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불자들이 이를 마땅히 본받아 결제에 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결제 중에 스님들은 어떤 공부를 하느냐 하면 물론 정진을 위해 화두를 챙겨 듭니다.

어떤 방법으로 하느냐 하면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에는 삼학이 있습니다.

세 가지 길이라는 것은 삼족정과 같습니다.

그 삼족정이라는 것은 옛날 무쇠솥을 보면 다리가 네 개가 아니라 세 개가 달려 있는데, 쇠솥의 세 다리와 같습니다.

계정혜라는 것은 삼학인데, 바로 이것은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계정혜 삼학이 불교 수행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가 하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전에 수발타라고 하는 120세로 가장 많은 나이로 출가한 제자에게 바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이 29세때 출가하여 착한 도를 구했다.

수발타여, 내가 성불한 지 이미 50년이 지났는데, 이는 계정혜 삼학을 실천했기 때문이다.-배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의 설법의 요점도 이것이고, 내가 삼학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삼학을 실천하지 않으면 수행을 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계정혜’를 비유로 말하면 계라는 것은 우위를 뜻하고, 정은 동요하지 않는 흔들림이 없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혜는 스스로 지혜를 뜻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계를 잘 지키면 탐심이 없어지고, 정을 잘 닦으면 진실로 성질내는 것이 없어지고, 혜를 잘 닦으면 어리석음은 생각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탐진치(貪瞋癡)’이 삼독이 다 없애지면 아주 편안해 지겠지요.

그러니까 탐진치 삼독을 없애는 것이 수행입니다.

탐진치 삼독만 없어지면 우리는 자유스럽고, 정말로 서로 우애도 지키고 서로 신의도 깨지지 않고 얼마나 좋겠어요.

화기애애해 집니다.

밥을 먹어도 좋고, 안 먹어도 좋고, 잠을 자도 좋고 안 자도 좋은 이런 계정혜 삼학은 탐진치 삼독을 없애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계정혜 삼학은 또한 팔정도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즉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는 혜에 해당하고,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은 계에 해당하고, 정념(正念), 정정(正定)은 정에 해당된다고 부처님께서는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바로 불교에서 보면 계정혜 삼학이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요체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팔정도가 삼학이고, 삼학이 곧 팔정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삼학을 잘 닦으면 삼독심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 열반을 얻게 되니 삼학이야 말로 불교의 시작이고, 수행의 시작이요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경전들은 불교를 신행하는 사람이 닦아야 할 덕목으로 한결같이 삼학을 들고 있습니다.

삼학을 쉽게 다시 한번 풀이하면 첫째 계학은 그릇과 같습니다.

그릇이 튼튼하면 물이 안 새고, 어느 것을 담아도, 부스러지지 않습니다.

보살계를 받는다, 오계를 받는다는 것은 그릇을 튼튼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릇이 튼튼하지 않으면 물을 부어도 그냥 빠져버리고, 많이 부으면 그릇이 깨져버리는 것입니다.

계라는 것은 그릇과 같습니다.

계를 닦는 것은 스스로 산란스럽고 번거로운 마음을 방지하여 산란하지 않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담긴다는 옛말이 있듯이 정신이 맑고 건전하기 위해서는 늘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합니다.

내가 몸가짐과 말이 항상 헛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이 나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또한 내 몸가짐이 흐트러져 버리면 남이 나를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라는 것은 이런 것을 스스로 튼튼히 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불교는 자력 종교입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경우 타력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믿으면 천당 가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아주 단순적 논리, 피동적 논리 종교입니다.

그러나, 이 우리 종교는 내가 스스로 만들어서 복도 내가 만들고 지옥도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요,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고, 자업자득입니다.

인과 응보인 우리 불교는 자력의 종교입니다.

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종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바르고 청정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을 인간은 가지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오관입니다.

분교 시기 즉 오관을 즉 비유하는 게는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부정한 욕망과 망상을 계를 지킴으로써 안정하고 번뇌 망상을 다스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를 지킴으로서 안정을 얻고 번뇌 망상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관인 눈, 귀, 코, 입, 몸 이것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는 좋고 그르다 분별하고, 감촉이 부드럽다, 거칠다, 맛있다, 맛없다, 냄새가 좋다, 그르다 이것이 번뇌 망상을 만들어 냅니다.

만약 이것에 끌려 다니다 보면 우리는 정말로 참된 맛을 볼 수 없고, 인간다운 삶을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를 잘 지켜야 합니다.

둘째는 정학인데, 정학을 비유하면 물과 같다.

이를 정수라고 하는데, 정을 닦으면 마음이 잠자는 물결처럼 고요해 집니다.

물이 맑으면 바닥까지 보입니다.

‘수불립파(水不離波)하고, 파불립수(波不離水)한다’고 합니다.

물이 파도를 여의지 아니하고 파도가 물을 여의지 아니한다.

물은 물인데, 파도가 일어나는 것도 바람 때문입니다.

바람이 잔잔해지면 파도가 잔잔해지고, 파도가 잔잔해지면 물은 잔잔하게 됩니다.

바로 내가 오관이라는 감각기관에 의해서 파도가 일어나면 땅 밑까지 전혀 보이지 않고, 항상 출렁되고, 항상 고통스럽고 짜증스럽고 원망스럽습니다.

그런 마음이 가라앉지 않습니다.

정이란 마음을 한 곳으로 동요가 없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 속의 참된 물결이 잠들고 번뇌의 거친 파도가 가라앉으면 잃어버린 자기 본래의 정숙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파도가 가라앉으면 땅 밑까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본래의 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물을 계속 병에 넣고 흔들면 병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계속 움직이면 안 보입니다.

여러분들 마음을 흔들지 말고 내버려 두면 스스로 고요하게 내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질날 때 생각하면 내가 다 잘한 것이고, 남이 잘못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 성질이 푹 가라앉고 난 다음에 “내가 신랑한테 잘못했다.

내가 자식한테 너무 한 거지.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되겠다.” 이렇게 스스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포용하실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대해 사상인 것입니다.

정을 얻기 위해서는 첫째는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신, 조식, 조심.

몸가짐을 가지런히 호흡을 조정하고 정신을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 이 세 가지 마음에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몸을 가다듬어야 하고, 두번째는 호흡을 가다듬어야 하고, 세번째는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어야 정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참선의 수행 방법입니다.

참선 할 때 첫째 화두를 딱 들고 허리를 들고 배꼽 밑 단전에다가 이 세상의 기운을 전부 다 불어 놓은 것입니다.

눈은 자기 스스로 콧등을 쳐다봅니다.

그러면 눈은 반개가 되고, 단전에 힘을 넣었다가 참을 만큼 참았다가 내쉴 때는 입으로 최대한 천천히 내뱉고, 들이쉴 때는 코로 내쉬면서 이것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어제 저녁에는 기분이 좋았다가 오늘 아침에는 신랑이랑 싸우고 애들이랑 다투고 하는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어제 친구를 만나서 저녁에 만찬 식사를 잘했는데, 신랑이 늦게 들어오니까 속이 바글바글합니다.

좋았던 기분이 오늘 아침에는 왜 나쁜가? 이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마음을 스스로 책임질 줄 알 때 그것을 쉽게 얘기해서 참선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스스로 이것을 할 때 몸의 오장육부의 혈이 전부 다 돌아서 어깨 허리 다리 아픈 것이 사라져 버립니다.

참선 잘하는 사람은 얼굴이 항상 불그레하고, 참선을 하고 수행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번뇌 망상과 싸우기 때문에 몸도 마르고 얼굴도 갸름합니다, 수행을 득한 후에는 항상 얼굴이 좋게 환하고 누가 보더라도 ‘저 스님은 달마스님 같다.

저 스님은 부처님 같다.’ 이렇게 보듯이 눈을 봐도 코를 봐도 입을 봐도 몸을 봐도 이와 같습니다.

즉, 수행자의 보신입니다.

바로 이렇게 정을 가다듬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혜학을 비유하면 달과 같습니다.

달을 혜월이라고 하는데, 대야에 담긴 물이 흔들지 않으면 달빛이 환히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조금 전에 병에 물을 담아서 계속 흔들면 병 밑이 안 보인다고 했듯이 바로 그 흔드는 마음이 가라앉으면 혜월이라는 것은 밑바닥까지 환히 보입니다.

부처님이 육신통을 가진 것이 그것입니다.

부처님이 관상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부처님은 밖에서 오는 사람이 왜 왔는지 아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내 스스로 탐진치를 다 벗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화장을 할 때 거울을 닦는 것처럼 상대방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 보게 하기 위해 닦는 것.

바로 이런 이치입니다.

그런데 얼굴은 예쁘게 하려고 닦으면서 마음 닦는 것은 안 하고 있습니다.

즉 정혜라는 것은 달과 같다.

혜라는 것은 분별이 없어진 상태에서의 지혜.

본래의 것을 바로 볼 수 있고, 본래의 성품을 들어 낼 수 있는 것이 혜입니다.

이런 지혜를 가져야 어리석은 생각에서 벗어나 분별심과 번뇌를 없앨 수가 있습니다.

지혜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문혜와 사혜와 수혜가 있습니다.

문혜는 우리가 들어서 배우는 지식 세계를 문혜라고 합니다.

남이 써 놓은 책.

부처님의 경전을 보는 것 쉽게 얘기한 것을 문혜라고 합니다.

사혜는 내가 생각하고 헤아려서 덧붙이는 것.

수혜라는 것은 내가 스스로 닦아서 부처님께서 당초에 일으키신 마음을 설파한 것이 수혜입니다.

이것이 진실한 지혜입니다.

문혜와 사혜와 수혜 중에서 이 수혜가 가장 중요하고 가장 완전한 것입니다.

이렇게 삼학이라는 것은 서로 밀접한 연관과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계학을 실천해야 정학이 이루어집니다.

첫째 계학을 닦아서 정학이 생기고 정학을 닦아야 혜학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솥은 세 발로 걸어야 하는데, 솥은 한 발만 없어도 그 솥은 쓰러집니다.

세 가지가 다 하나 되는 것으로 우리가 수행해야 합니다.

불교를 실행하는 사람은 어느 한쪽만 강조하거나 소홀히 하면 수행이 안됩니다.

앞에서 비유한 삼족정이라는 것과 같아서 어느 하나만 소홀히 해도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만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전체적으로 익힌 사람은 진심으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포괄 포용합니다.

남이 그릇된 얘기를 해도 포옹해 줍니다.

다 듣고 상대방에게 “너가 보는 것도 맞지만, 전체를 보면 이렇다.”하고 얘기해 줍니다.

검은 안경을 쓰고 보면 상대가 검게 보이고, 붉은 안경을 쓰고 붉게 보면 상대가 붉게 보이는 이치가 그것입니다.

투명한 안경을 쓰고 보면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보이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검은 안경을 쓴 사람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삼학이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공부하기 위해 내용적으로 화두로 삼는 것은 우리는 이것을 결제라고 얘기합니다.

이것은 출가자들을 위한 첫째 수행의 방법으로 보면 타당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 때 재가자가 수행하는 팔관제가 있습니다.

팔제계라는 것은 여덟 가지를 금기하고 지켜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이 여덟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모든 생명을 죽이지 말 것이며, 둘째는 절대로 훔치지 말고 보시를 행할 것이며,셋째는 음욕을 품고, 음행을 하지 말 것이며, 넷째는 거짓말하지 말 것이며, 다섯째는 술을 마시거나 방탕하지 말 것이며, 여섯째는 화려하게 치장하지 말고, 가무를 즐기지 말 것이며, 일곱째는 높고 편안한 침대에 눕지 말 것이고, 여덟째는 점심 시간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말 것이니라.’ 이런 계율과 제도가 정착된 것은 부처님이 녹자의 아들 녹자모를 가르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녹자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이 어머니가 와서 “어떻게 해야만 수행자가 될 수 있으면 깨달음을 얻어서 자유스러워질 수 있습니까?”하고 묻자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을 기록한 경전은 중아함 55권 202경 「지계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녹모당 불당에 계실 때 일입니다.

녹자의 아내 녹자모가 어느날 이른 아침 목욕을 한 뒤 깨끗이 하고, 며느리와 권속들을 데리고 부처님을 찾아와 예배하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부처님, 오늘 저는 죄를 갖고자 하나이다.” “부인이여, 죄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대는 어떤 죄를 가지려고 하는가?” 부인이 머뭇거리는 동안 부처님은 세 가지 죄에 대해 하나하나 이와 같이 설명을 하였습니다.

“첫째 방어하고 술을 놓아 풀을 먹듯이 오늘은 이런 음식을 먹고 내일은 저런 것을 마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밤낮으로 욕심에 집착하나니, 이러한 죄는 공덕도 없고,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느리라, 둘째는 예도를 따라는 죄를 짓는 것을 말한다.

예도는 입으로는 살생과 도둑질과 거짓말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중생을 보호하라고 말하지만, 그 자신은 처자를 위해 살생도 하고 도둑질과 거짓말도 한다.

이런 예도를 따라 가는 것은 공덕도 없고, 큰 과보도 없다.

세째는 거룩한 팔제가 있다.

팔제란 이런 것이다.

첫째 살생을 떠나고 둘째 모든 도둑질을 떠나 보시를 행하고, 셋째 음식과 음욕과 음행을 떠나고, 넷째 모든 거짓말을 떠나고 다섯째 모든 방탕에서 떠나고, 여섯째 높고 높은 편안한 평상에서 떠나고, 일곱째는 꽃다발과 장신구, 춤과 노래 놀이에서 떠나고, 여덟째 하루 한끼를 먹으며 때 아닌 때에 먹지 말라고 가르치느리라.”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팔관제, 팔제계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방화제라는 것은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좋은 것만 찾아서 줍어 먹는 것으로 그것을 하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 욕심에 빠져서 거기를 뛰어 넘기 어렵습니다.

두번째는 이건죄라고 하는데, 이것은 계보를 따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께서는 살생을 하지 말고, 음행을 하지 말라고 술을 마시지 말고 자신은 막 떠들면서 자신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다른 사정이나 삿된 글이나 또한 삿된 말을 좇아 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세번째는 팔죄라는 것인데, 이런 여덟 가지를 여러분이 잘 지킴으로써 계정혜 삼학을 얻을 수 있고, 즉 계정혜 삼학을 얻으면 편안하고 가장 멋지게 살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잘 지켜야 합니다.

만약에 부처님께서 신도 여러분들이 “어떻게 우리가 다 지킬 수 있겠는가?” 하고 묻는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하루만이라도 이것을 지킨다면 여러분들의 옷에 때 묻은 것을 비누로 빨고 또한 양잿물에 삶는 것처럼 그동안 지은 업이 녹아들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루도 못 지키면서 일년 365일의 죄를 씻겨 달라는 것은 비는 것은 아무 쓸모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루만이라도 지키면 타화 자재천에 갈 수 있다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지켜주시기를 바라고, 또한 한 달 동안 우리는 날짜를 정해서 포살을 행하고 있습니다.

포살은 첫째 망월일과 신월일 이라고 해서 보름날과 그믐날 언제든지 포살을 합니다.

포살을 해서 내가 그동안 지켰는가 못 지켰는가 만약 못 지켰다면 또 다시 지켜야겠다는 원을 세우고 각오를 하고, 부처님께 기도를 하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참회를 하고, 포살을 행하고 있는데, 요즘은 우리는 한달에 두 번만이 아니라 육제일이라고 해서 열나흘날과 스무아흐렛날, 여드렛날과 스무사흐렛날 이렇게 해서 한달에 6번 정도는 꼭 포살을 하고 팔관제를 지켜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행복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재가신도는 육제일과 팔관제를 지켜서 결재를 하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승속을 막론하고 삼학을 우리는 얻을 수 있고, 지킴으로써 팔정도의 수행을 쌓아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결제요, 이런 마음으로 하는 것을 기도 입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증사기작반(蒸沙豈作飯)이요 마전난성경 설식복불포(磨難成鏡 設食腹不飽)하고 직수착력행(直須着力行)하리라.’ 만약 여러분들이 심신이 없다면 모래를 쪄서 밥을 짓을 수가 있겠습니까.

벽돌을 간다고 해서 어찌 거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실천해야만 여러분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을 성취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는 여러분들께서 정말로 소원이 있고 대원이 있다고 하면 그 대원과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돈과 쌀과 과일을 갖다놓는 것은 물론이고, 마음을 툭 털어놓아야만 한다.

그런 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내가 만약 이 한 뜻을 성취하지 않는다면 불교 30년 50년을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 쓸모가 없고, 형식적인 것뿐입니다.

나는 차라리 조계사 법당에서 돌장승이 될지언정 나는 맹세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아주 금강석보다 더 단단한 심신과 원력으로 기도하고, 또한 정진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바로 그래서 불교는 실천의 종교입니다.

이론의 종교가 아니고, 학문의 종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화엄경에 “만일 네가 많이 알고, 많이 보고 들었다 치더라도, 그것이 네가 자유를 얻는 것은 아니고, 네가 행복을 얻는 것은 아니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니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꼭 심신을 금강석보다 더 단단히 굳히실 때 여러분들이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라고 또 한번 강조의 말씀드립니다.

성철스님─마음의 눈을 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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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스님─염불삼매 들게되면 깨달음 얻을 수 있어

◆염불삼매 들게되면 깨달음 얻을 수 있어/

보광스님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달음을 성취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것에 있다.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은 상구보리이며, 중생을 제도하는 것은 하화중생의 일이다.

정토교학에서는 신심과 원력으로 깨달음과 중생제도를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타력적인 힘에 의해 가능하다고 한다.

여기서 타력이란 불보살의 본원력과 가피력에 의해 우리가 구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염불이다.

염불이란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입으로 명호를 부르는 칭명염불(稱名念佛)과 부처님의 상호나 공덕을 관하는 관념염불(觀念念佛)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염불의 기원은 부처님 당시부터 있었다.

부처님의 교단은 불,법,승,삼보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불교도로서 최초의 의식이자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도리이다.

초기에는 불교교단에 귀의하고자 하면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을 외우면서 부처님 주위를 세 번 돌게 되면 부처님께서 “선래비구야”라고 하여 출가가 허락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나무불”이 바로 염불의 시초이다.

따라서 염불은 불교교단에 대한 신앙의 표명이며, 귀의의 방법이었다.

오늘날까지도 대소승을 막론한 모든 불교의식에는 반드시 삼귀의로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깨달음에 들어가는 첫 번째의 관문이며, 사홍서원은 중생구제와 보살도 실천의 마지막 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대승불교의 모든 신앙행위는 믿음의 표현인 삼귀의와 대비원력의 발원인 사홍서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염불로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 논사는 인도의 용수보살이다.

그는〈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娑論)〉‘이행품(易行品)’에서 부처님을 믿는 신불(信佛)만으로도 아유월치(阿惟越致) 즉 불퇴전지(不退轉地)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불법에는 무량한 문이 있다.

세간의 도(道)에 난(難)과 이(易)가 있으니 육로로 걸어가는 것은 고행이며, 수로로 배를 타고 가는 것은 편안하고 쉬운 일이다.

이와 같이 보살의 도에도 난행정진(難行精進)하는 사람도 있으며, 또한 신방편(信方便)의 이행(易行)으로 빠르게 아유월치(阿惟越致)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는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방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어려운 정진방법을 선택하는 난행도(難行道)와 쉬운 방법인 이행도(易行道)로 구분하고 있다.

그 중에서 이행도인 부처님을 믿는 믿음에 의해서도 불퇴전지인 야유월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부처님의 다겁생래 동안 닦은 무량한 수행력과 한량없는 중생구제의 본원력의 공덕력에 의해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용수보살은 염불로서 현세에 아유월치에 이르러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친보살은 〈왕생론(往生論)〉에서 극락왕생행으로 찬탄문(讚歎門), 예배문(禮拜門), 작원문(作願門), 관찰문(觀察門),회향문(回向門)의 오염문(五念門)을 설하면서 염불을 찬탄문으로 설명하였다.

그런데 용수가 염불로서 현세에 아유월치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으나, 세친은 염불로서 내세에 왕생하여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중국의 담랑(曇鸞),도작,선도 등에게도 계승되었다.

칭명염불.관념염불 수행으로 부처님 친견.견성 가능 간절한 신심과 불보살 본원력.가피력에 힘입어 성불 그런데 〈무량수경〉,〈관무량수경〉,〈아미타경〉 등의 정토삼부경과 〈반주삼매경〉에서는 염불로서 견불(見佛)과 왕생을 설하고 있다.

정토계 경전에서는 견불은 깨달음으로 여기며, 왕생은 성불로 보고 있다.

〈무량수경〉의 제18원 십념왕생원(十念往生願)에서는 오역죄와 정법을 방방한 자는 제외하고 누구나 십념염불(十念念佛)로 왕생이 가능하다고 설하며, 왕생은 삼배구품(三輩九品)에 따라서 왕생한다고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왕생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아미타불의 설법을 들어서 성불을 보장받으며, 결국은 모습과 이름이 모두 아미타불과 같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동명동호(同名同好)가 되어 모두가 아미타불이므로 부처와 극락성중이 둘이 아님을 설하고 있다.

한편 〈관무량수경〉의 제8 상상관(像想觀)에서는 “제불여래는 법계신(法界身)이므로 일체중생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느니라”고 하면서 “마음이 부처를 지으면, 마음이 곧 부처(是心作佛是心是佛)”이라고 한다.

즉 중생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으로 바뀌면 부처의 마음은 곧 부처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와 같이 ‘마음이 곧 부처 (是心是佛)’라고 하는 말씀은 〈관무량수경〉과 〈반주삼매경〉에서 나오며, 이러한 말씀이 선종에 영향을 미쳐서 선종에서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은 ‘마음이 부처를 지었을 때 마음이 부처’라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부처를 만들지 못한다면, 그는 그대로 중생임을 명심해야 한다.

“부처님을 형상으로 관할 것”을 설하면서, 관념염불로서“무량억겁 동안의 생사의 죄를 소멸하고 현재의 몸으로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성취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염불삼매에 들게되면, 견불을 하게 되며, 견불(見佛)은 견성(見性)과 같은 경지인 깨달음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제9관인 진신관(眞身觀)에서는 “불신을 관하면, 불심을 본다(觀佛身故 亦見佛心)”고 한다.

따라서 부처님의 모습인 불신을 친견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마음인 불심을 보게되며, 이는 부처님의 성품인 불성을 보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정토교에서는 염불삼매를 성취하면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자신이 의심나는 것을 부처님께 물어보게 되며, 부처님은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게 된다.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말법시대의 중생들이 친구의 얼굴을 보기는 쉽지만, 친구의 마음을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모습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부처님의 마음인 불성(佛性)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 중생이 눈에 보이지 않은 마음을 보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을 보기는 쉽다.

중생은 모습과 마음이 다를 수 있지만, 부처님은 모습과 마음이 같으므로 불신은 바로 불심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모습을 보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마음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불심(佛心)이란 무엇인가? “부처님의 마음이란 큰 자비이므로 무연자비(無緣慈悲)로서 모든 중생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불신을 보는 자는 불심을 보게되며, 불심이란 무연자비로서 구현된다고 한다.

따라서 깨달은 자의 인격은 무연자비로서 표현되고 있음을 설하고 있다.

우리가 깨달은 자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하고 있다.

즉 깨달은 자는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임을 밝히고 있다.

〈아미타경〉에서는 “아미타불의 명호를 굳게 지니기를 일일 내지 칠일 동안 한결 같은 마음으로 흐트러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이 임종할 때에 아미타불이 여러 성중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타날 것이니라.

그 사람이 목숨을 마칠 때에 마음이 뒤바뀌지 않고 바로 아미타불의 극락국에 왕생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즉 아미타불의 명호를 일심불란하게 칭명한다면, 반드시 임종시에 마음이 흐트러지지 아니하고 바로 왕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심불란한 경지는 생사를 초월한 경계이므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고도 볼 수 있다.

〈반주삼매경〉은 재가불자인 발타화보살을 상대로 설한 것인데, 아미타불과 제불보살을 친견하는 방법에 대하여 설하고 있다.

아미타불을 친견하는 삼매가 바로 반주삼매이며, 이는 제불이 눈앞에 나타나 설법하는 삼매이다.

그러므로 반주삼매(般舟三昧)야 말로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인 것이다.

반주삼매를 닦는 방법으로 3개월 동안 경행하면서 염불을 지속할 것을 설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을 활용한 것이 천태지자대사의 사종삼매법 중 상행삼매(常行三昧)이다.

90일 간의 상행삼매를 행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고 있다.

이상을 정리한다면, 아미타불을 입으로 부르는 칭명염불법이나 마음으로 관하는 관념염불을 통하여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으며, 이는 바로 견성하는 것과 같은 경지로 보고 있다.

즉 염불로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며, 이는 쉬운 방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왕생은 바로 성불이며, 성불을 보장받는 곳이다.

따라서 왕생은 성불하기 위하여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것은 부처님 본원력의 힘에 의해 가능함을 설하고 있다.

– 불교신문 2065호/ 9월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