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장스님─부처님이 그리워서

부처님이 그리워서 전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

사바세계의 교주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신 후 부처님의 진상(眞相)이 점점 멀어져가니 세상에서 인연 중생이 원력을 세워서 부처님의 거룩하신 상을 지극한 정성으로 조성하여 모시게 된 것입니다.

그 덕분에 제자들이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부처님의 상에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고, 그 선업으로 인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되었으니 이로써 부처님의 형상을 통하여 우주에 가득하시어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며 이름 지을 상이 없으신 부처님의 실상을 뵙게 되었고 아무 말씀이 없으신 부처님의 상을 통하여 일체 세계의 진리의 말씀을 가슴 깊이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상(像)을 모시는 것은 상이 있는 도리에서 상이 없는 도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불에도 타고 물에도 풀어지고 용광로에도 녹고 세월에 무너지는 유형의 부처님 상에 예경한 인연을 통해 원히 변치 않는 광대묘용한 무형의 부처님의 위신력의 세계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실상이며 변치 않는 근본성품(根本性品)을 우리의 마음속에서 깨달아 중생이 본래 부처님임을 알고 오늘 성상의 부처님을 조성하여 모시는 인연을 계기로 각자 자신을 부처님으로 조성하여 가는 불사를 발원하여야겠습니다.

오늘이 부처님을 봉안하여 모신 불사의 회향일이 아니라 대중 모두 부처님으로 조성되는 성불기도의 입재일로 맞이하였으면 합니다.

유상(有相)을 통해 무상(無相)으로 가는 이치를 명백히 깨달아 앞으로 이 대웅전에 오셔서 참배하시는 분들은 거룩하신 성상 앞에서 정성을 다하여 선연을 맺고 공덕을 짓고 발심(發心)하고 정각(正覺)에 이르기 위하여 정진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부처님의 성상을 처음 조성하여 모신 내역이 조상공덕경(造像功德經)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는데, 시간상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루는 제석천(帝釋天)이 부처님께 도리천(忉利天)에 오르시어 여름 석 달을 지내시면서 어머니이신 마야왕비(摩耶王妃)를 위하여 설법하여 주실 것을 간곡히 청하니 부처님께서 이에 응하시어 도리천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때에 평소 부처님을 잘 모시던 우전왕(優塡王)이 부처님을 그리워하여 매일 목마르게 하늘을 우러러 보았으나 뵐 수가 없자 나라 안의 훌륭한 장인(匠人)에게 부처님의 형상을 조성케하여 모시고 예배공양하려 하니 이에 비수갈마천(毘首羯磨天 : 제석천의 신하로 공작을 맡은 신)이 장인으로 변화하여 “내 솜씨가 세상에서 제일이다.”라고 하자 왕은 곧 향나무를 택하여 스스로 어깨에 메고 천장(天匠)과 더불어 도끼로 나무를 쪼개니 그 소리가 위호 삼십삼천(三十三天:도리천)에까지 뻗쳐 부처님의 회상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 여러모로 왕의 공덕을 찬탄하시고 멀리서 보리(菩提)의 수기를 주셨으니 이로 인하여 이 세상에 부처님의 성상이 모셔지기 시작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성상을 모신 공덕에 대하여 제석천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의 형상을 칠보, 놋쇠, 붉고 흰 동, 백철, 납, 주석, 철, 나무, 진흙으로 조성하거나 아교, 채색으로 장엄하기를 스스로 했거나 남을 시켜 했거나 모두 불도를 이룬다.

심지어는 동자의 유희나 풀, 나무, 붓, 손톱을 가지고 불상을 그린 사람도 불도를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또 관불삼매경(觀佛三昧境)에서는 우전왕이 쇠를 녹여서 부처님의 성상을 조성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부처님께서 쇠불상을 보고 우전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세에 크게 불사를 지으리니 내가 멸도 후 나의 모든 제자들을 너에게 부촉한다.

만약 어떤 중생이 나의 형상을 조성하고 여러 가지로 공양을 올린다면 그 중생은 후세에 반드시 염불청정삼매(念佛淸淨三昧)를 얻으리라.”고 하셨으니 부처님의 성상을 조성하여 모시고 공양을 올린 공덕에 대하여 무딘 제 재주를 가지고 어찌 다 설명드릴 수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부처님의 성상을 조성하여 모시면 항하사겁(恒河沙劫)의 생사의 죄를 멸하고 미래에 미륵부처님의 처음 회상에서 모두 해탈을 얻을 것이고 세세생생에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 인간 중에 태어나면 금색신(金色身)을 받고 제왕이나 천주(天主)가 된다고 하시며 축생이라도 부처님 상에 엎드려 절하면 해탈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축생에 대하여 예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부처님 당시에 해율제일(解律第一)인 교범바제(憍梵婆提)스님은 전생에 소의 몸이셨을 때 물과 풀을 구하러 다니다가 정사(精舍)를 우측으로 돌았는데 이 때 부처님의 존귀하신 용모를 뵙고 환희심을 내어 절을 한 그 복으로 인하여 해탈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거룩한 인연입니까? 어리석기 짝이 없는 축생도 이런 복락을 누리거늘 사람이 신심을 내어서 정성을 다해 부처님의 성상을 조성함에 있어 그 공덕을 어찌 다 말로 옮기겠습니까? 저 수(隋)나라 때 응관사(凝觀寺)의 법경스님(法慶大師)은 개황 3년에 높이가 한 장 육척(一丈六尺)되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조성하시다 완성치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법경 스님이 돌아가신 날 먼저 돌아가신 대지 스님(大智大師)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서 말씀하시길 “내가 염라대왕 앞에서 법경스님을 보았는데 그 때 법경 스님이 조성하시던 석가모니 부처님상이 계단에서 내려 와서 예를 올리는 염라대왕에게 ”법경스님이 나를 조성하시다가 아직 마치지 못했는데 어찌하여 죽게 하였는가?“하시니 염라대왕의 좌우에 신하들이 ”법경 스님의 수명은 아직 마칠 때가 안 되었으나 먹을 복이 다하였습니다.

“하니 이에 염라대왕이 명하되 ”법경 스님에게 연꽃 잎을 주어서 그 복된 일을 마치도록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법경 스님이 다시 살아나셨는데 저승에서 있었던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 대지 스님과 똑같았으며 그 후 법경 스님은 공양하실 때에 연꽃잎으로 만든 음식 외에는 목에서 내려가지 않아서 연꽃잎만을 잡수시며 석가모니 부처님상을 원만히 조성하여 모시고 수년을 더 사셨다고 『법원주림(法苑朱林)』이라는 책에 실려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생사를 초월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성상을 조성하는 사람도 불생불멸의 존재로서 영원한 생명이신 부처님을 믿고 정성을 다하여 조성에 임하면 그 공덕으로 자신의 생사도 초월할 수 있는 불가사의한 가피가 있다는 것을 법경 스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호력에는 예와 지금이 없고 이곳과 저 곳이 없으니 과거 수나라 법경 스님에게 있었던 가피가 지금 우리에게 없을 수는 없을 겁니다.

우리도 대원력(大願力)을 세우고 정성을 다하여 불사에 임하면 우리의 안목(眼目) 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신통의 세계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석가모니 부처님상을 모시면서 이 거룩한 불사를 통해서 진실한 부처님 의 상을 눈에 담고 마음에 담아서 세세생생 부처님의 세계에 태어나야겠습니다.

끝으로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부처님을 모시는 공덕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며 정성으로 예배하면 다섯가지 공덕이 있다 하셨으니, 첫째는 얼굴이 단정해지고, 둘째는 음성이 맑고 청아해지며, 셋째는 부귀하게 되고, 넷째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며, 다섯째는 목숨을 마치면 하늘에 태어나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 이유로는 부처님 모습을 뵙고 환희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에 얼굴이 단정해지고, 부처님께 귀의하고 찬탄하기 때문에 목소리가 곱고 청아하게 되며, 부처님을 뵐 때 꽃과 향 등불로 공양을 올리기 때문에 부귀하게 되며, 부처님전에 겸허한 마음으로 고개 숙여 예배하며 마음에 집착을 버렸기 때문에 좋은 집과 하늘에 태어난다고 하셨습니다.

거룩하신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을 조성해 모시고 점안식에 동참하신 여러 불자님께서는 이 무량한 공덕을 지은 인연으로 모든 업장을 소멸하시고 속히 성불하십시오.

성불합시다.

– 석가삼존상 점안식 에서 –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은 9월 11일 새벽 입적하시기 전 시자 진광 스님의 요청에 따라 평소 법문 시 불자들에게 즐겨 하시던 말씀을 글귀로 남겼다.

법장 스님이 시자 스님의 노트 뒷장에 친필로 남긴 내용은 다음과 같다.

我有一鉢囊 나에게 바랑이 하나 있는데 無口亦無底 입도 없고 밑도 없다.

受受而不濫 담아도 담아도 넘치지 않고 出出而不空 주어도 주어도 비지 않는다.

법장 스님은 또 시자 스님을 비롯한 후학들에게 “크게 한 소리 버럭 지르매 다시금 별스러운 의심이 없음이로다.

그르쳐 가지 말고, 그르쳐 가지 말지어다”라고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엄히 경계하는 말씀을 남겼다.

조계종 총무원은 총무원장 권한대행 현고 스님의 담화문 발표와 함께 법장 스님이 남긴 이 같은 친필 유훈을 공개했다.

지관스님─의지하고 실천해야 할 가르침

의지하고 실천해야 할 가르침 –

지관스님

스님이나 신도나 사부대중, 누구를 막론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이 세상에 올 때에 어디서부터 왔는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면 인생 철학을 바로 느낄 수 없습니다.

30세 된 사람은 30년 전에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어머님 모태로부터왔다고 하겠지만 어머님, 아버님, 자기 자신도 없을 때는 어디서부터 왔는가는 쉽게 답이 없습니다.

이것은 일대사입니다.

근본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며 자기를 찾는 근본이기에 일단 그 생각을 우리는 마음에 가지고 한 번이라도 내가 어디서 왔는가 반조를 해 봐야합니다.

둘째,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부처님의 제자가 됐거나 안됐거나 우리는 어떤 사람을 의지해야 하겠는가? 우리는 의지해야만 마음의 안도를 얻고, 의지해야 재앙이 소멸되고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물론 부모님, 친구, 가족, 선생님, 선배를 의지해야겠지만, 불자로서 가장 의지할 대상은 부처님입니다.

부처님과 그 가르침입니다.

만약 나쁜 사람을 의지한다면 앞길은 암흑의 불행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문에 들어와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기에 그 문제는 해결 됐지만, 불문에 들어왔어도 삿된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부처님께 의지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야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스스로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경전에 기록만 있을 뿐입니다.

경전은 스스로 들려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전달하는 분이 승가, 즉 나 보다 먼저 부처님을 안 분으로 그 첫째로 스님을 뽑습니다.

그래서 불법승(佛法僧)에 의지한다.

즉, 부처님, 부처님의 가르침, 스님에게 의지하는 것으로 삼귀의(三歸依) 라고 합니다.셋째, 우리는 어떤 행을 닦아야 하느냐?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마음 가짐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 바탕은 하나지만 그 속에서는 악한 마음도 생길 수 있고 착한 마음도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악한 마음은 억제하고 착한 마음은 일어나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을 가르쳐 준 것이 부처님 경전이며 계율입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돌아가신 후에는 누구에게 의지해야 합니까?” 부처님이 답하시기를 “내가 설해 놓은 계율로서 스승을 삼아라.” 라고 하셨습니다.

계율에는 신도의 계가 있고 사미승의 계, 비구의 계, 비구니의 계가 각각 다릅니다.

재가 신도의 계는 오계입니다.

알기는 잘 아는데 실천이 안됩니다.

살생하지 말라 하지만 살생하게 되고, 도둑질 말라지만 또 하게 되고……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신행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부처님이 일러준 경전에 있는 대로 본래 마음은 청정합니다.

그런데 한 생각 잘못해서 근본무명이 일어나 구름이 낀 것처럼 꺼멓게 되었습니다.

진실한 마음은 뒤로 사라지고 구름 망상과, 나쁜 무명의 어머니, 탐심의 어머니로부터 팔만사천가지 고뇌망상을 내 놓습니다.

좋은 일 못하고 그른 일만 합니다.

그러니 행복하지 않고 불행한 과보를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계율을 다 못지키지만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부처님 법 가운데 육바라밀, 팔정도 등 좋은 법이 많이 있는데 잘 안 지켜집니다.

육바라밀을 해야만 성불한다고 하는데 실천하기 쉽지 않습니다.

첫째는 보시입니다.

돈 없다고 못 한다는 사람도 있는데, 돈 없어도 보시한다는 법이 있습니다.

생각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자기 불행처럼 생각한다면 이것은 바로 무애보시입니다.

또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혼자만 알지 않고 주위에 알려주는 것은 법 보시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보시인데 그것을 못하게 하는 육패라는 방해자가 있습니다.

육패가 있으면 육바라밀이 안됩니다.

보시를 방해하는 것은 방탕이요 인색한 마음입니다.

검소한 마음은 해야하지만 내것 아닌 것에 욕심을 내고, 써야할 때 안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바라밀이라는 것은 돈을 벌어서 절약하고 그것을 좀 떼서 나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을 때까지 쌓고 모아도 만족치 못하는 마음이 방해를 합니다.

사람이 백년도 살지 못하는데, 천년 만년 사는 것처럼 계획을 세웁니다.

또 생과 죽음 사이에 머물러 있는 이 정체가 무엇인지도, 이 몸뚱어리만이 내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살다가 생명을 떠나는 날이 분명히 있습니다.

한물건이라는 자리가 있는데 그것은 어디로 갈 것인가?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알라고 하셨고 그래서 참선행을 해야합니다.

참회하고 기도 해야합니다.

우리는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릅니다.

누구에게 의지하느냐? 부처님, 관세음보살, 신장님에게 의지하고, 과거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액난이 적게 해달라 하는 참회를 해야합니다.

부처님에게 백년 살게 해달라, 백억 벌게 해달라, 자식 잘되게 해달라.

이렇게만 바란다면 광명을 해서 구원의 손을 뻗치려해도 우리에게 닿지가 않습니다.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행을 닦아야 할 때, 계율을 지키고 마음을 닦아야 합니다.

보시 하는 것은 마음 닦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지계.

계를 지키기는 힘들죠.

술 먹지 말라해도 안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계를 방해하는 오염된 마음이 있기에 못 지키고 마음이 탁해졌습니다.

곧은 마음, 깊은 마음,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해야합니다.

그래야 계율을 지킬 수 있습니다.

셋째, 인욕.

참아야 합니다.

안 참으면 살 수 없습니다.

일의 어려움 참아야 성공이 오고, 어떤 대상이 괴롭게 해도 참아야 편합니다.

부딪치면 깨집니다.

그러면 피차 손해 보게 됩니다.

가정에서도 참아야하고 직장에서도 참아야 합니다.

일단 참고, 다음에 권고해서 일러주고, 그래도 안 들으면 그만입니다.

참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것은 진심입니다.

진심은 마음 가운데의 불길입니다.

공덕의 숲을 다 태우고 맙니다.

공덕을 태우면 아무 것도 없어 불행하고 지옥가게 됩니다.

그래서 진심을 안 내야 인욕 바라밀이 됩니다.

화엄경에 보면 한번 진심을 내면 백가지 천가지 장애가 생긴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참으면 병이 되기에 화를 내기도 해야 합니다.

화를 내도 털어버려야 합니다.

그것을 잘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넷째, 선정바라밀.

마음을 고요히 집중하는 것입니다.

일념으로 기도하는 것.

기도하면서 딴 생각하면 백날 기도해야 소용 없습니다.

기도할 때 일념으로 해야합니다.

선방에 앉아서 하는 것만이 정진이 아닙니다.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에 집중해서 하는 것이 선정입니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지혜가 나타나고 그러면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진리를 보는 것이 견성입니다.

마음이 산란하면 안됩니다.

사람이 생활을 간소하게 해야지, 친구도 너무 많이 만나면 안됩니다.

도움이 될 사람을 만나야지 아무나 만나면 화투치고 노래방 가면 오염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항상 간결하게 일념을 가져야 하는 것이 선정입니다.

그것을 못 하게 하는 것은 산란심 때문입니다.

책을 보고 있는데 집중이 안되고 딴 데 생각이 있으면 들어오지 않습니 다.

그러면 자세가 비딱해지고 마음 자세도 삐뚤어집니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선정을 닦아야 됩니다.

꼭 선방에 와 참선하는 것만 선정이라 생각마세요.

기도할 때 집중하고 일 할 때 자기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정진.

마음을 내면 시간이 빨리 가고 힘들지 않지만 억지로 하려면 허리도 아프고 지겹습니다.

뿐만아니라 하는 일에 재미를 붙이고 충실히 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정진이라는 것은 하는 일에 일념을 내는 것인데 못하게 하는 것은 해태입니다.

게으를 해, 게으를 태자.

게으른 사람은 자성할 수 없습니다.

학생이 게으르면 학점이 나쁘고 평생 따라다닙니다.

취직할 때도 안 뽑습니다.

여섯째, 지혜 바라밀.

슬기로운 것입니다.

앞의 다섯 가지 닦는 것은 결과를 맺으려는 원인입니다.

즉, 지혜를 얻으려고 앞의 다섯 가지를 하는 것입니다.

지혜 바라밀은 결과입니다.

남의 화단에 꽃 핀게 좋으면 자기 집에 심으면 됩니다.

그건 안하고 아무개 집엔 화단이 좋은데 왜 우리집엔 없어 하면 안됩니다.

원인을 하지 않고 결과를 바라는 것은 허공에 집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원인을 소홀히 여기고 귀중한 결과를 지망하는 것을 있을 수 없습니다.

좋고 행복한 결과를 얻으려면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을 해야 지혜라고 하는 것이 생깁니다.

지혜가 최고입니다.

지혜가 있으면 잘못할 일이 없습니다.

지혜가 있으면 보시바라밀도 필요 없습니다.

다 알아서 하니까요.

우리가 옳고 그른 것을 판단 못하는데 지혜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지혜를 방해하는 것은 우치라는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지 않으려고 글을 배우고 참선하고 기도, 염불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업장이 녹아지고 산란심도 녹아지고 선정이 생깁니다.

물이 고요해야 거기에 비칩니다.

탐진치가 있으면 안 보입니다.

언젠가는 우리가 죽습니다.

그때를 정해 놨습니까? 세상에서 옮기려면 이사하면 됩니다.

집 알아보고 예약해서 팔고 가면 됩니다.

그러나 중생이 금생에서 다음 생으로 이사할 때 어느 마을로 이사할 것인가? 육도, 지옥, 아귀, 축생, 천상, 인간, 아수라라는 육도의 마을이 있습니다.

죽으면 몸과 영혼이 재가 되면 그만이지만 불생불멸이라고 했습니다.

본래 마음은 죽지도 태어나지도 않고 몇 천겁이 지나도 현재일 뿐입니다.

미래가 미래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디로 갈 것인가? 마침내 어느 곳으로 갈 곳인가? 라고 할 때 우리는 역시 부처님을 의지하듯이 극락세로 가야합니다.

그러려면 아미타불에 의지해야 합니다.

나이 많으신 분들은 아미타불 염불을 하세요.

모든 인간은 다 죽기에 제행무상을 바로 알고 사는 것이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어떤 행을 할 것인가? 그것이 육바라밀입니다.

인생을 돌아보면 지나온 것이 눈은 눈에 보이지만 앞은 예측불허입니다.

그렇기에 가르침, 선배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늘 마음을 놓지 말고 조심조심 신심을 높게 해서 어려움이 닥쳐도 좌절 말고 신심이 풀리지 말고 정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지광스님─감사는 가피의 원천이자 우리 운명이다

감사는 가피의 원천이자 우리 운명이다 –

지광스님

능인선원 원장- 우주는 무량한 은혜에 감싸여있다.

부처님의 은혜가 그러하고 법의 은혜가 그러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무량중생들은 태어남으로부터 은혜로움 한가운데 존재한다.

부모님의 은혜, 조상의 은혜는 물론, 나라의 은혜, 스승의 은혜, 친구의 은혜 등등 많은 은혜로움에 싸여 산다.

그런데 그 같은 은혜로움에 제대로 감사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또 그 같은 은혜로움에 얼마나 보답할까? 여기에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대목이 하나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들 때문에 산다고 한다.

실제 아이들에게 모든 걸 걸고 산다.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살면서도 자신의 어머니, 아버지 역시 자신에게 모든 걸 걸고 살다가 떠나가셨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경우가 많다.

안다 하더라도 애써 외면하는 경우는 없을까? 자식들이 부모의 마음을 몰라 줄 때 얼마나 서운할까? 우리는 부모에게 얼마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던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경에 보면 처절한 원수가 삼생전에 네 어미임을 알라고 가르친다.

무량한 은혜로움의 대상인 어머니가 왜 처절한 원수가 되고 악령이 되는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큰 원수가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자식들이 부모의 마음을 모르듯 우리 모두 그렇지 않은가? 부모의 은혜가 하늘같다 하는데 스스로 얼마나 그에 보답하는가? 은혜를 갚는 것을 보은이라 하고 은혜를 등지는 것을 배은망덕이라 한다.

부모의 은혜를 모르는 이가 제대로 되겠는가? 경에 보면 우리 모두는 사랑의 열매라 하셨다.

열매는 어디에 달리는가? 튼실한 열매는 나무에 달린다.

나무는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

뿌리가 튼튼하지 않으면 열매는 제대로 자랄 수 없다.

뿌리는 조상이요 부모다.

그것만으로도 되는 게 아니다.

하늘에서 비가 잘 내리고 바람이 잘 불어주고 햇살이 쨍쨍해야한다.

바람, 비, 햇살은 모두 부처님 영역이다.

결국 부처님과 조상님, 부모님을 잘 모시는 것이야말로 튼실한 열매인 자손이 창성하게 되는 첩경이다.

경에 보면 현명한 왕.

지혜로운 왕은 아침 공양 전 부처님과 역대 선조에게 공양을 올린 다음 수라를 든다고 한다.

진실로 부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 재앙의 길에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불효한 자는 지상 최대의 도둑이다.

무서운 재앙을 받는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는 무량중생들이 한없는 은혜에 감싸여 있는 때문에 감사가 우리들의 숙명이라 말한다.

감사는 진실로 우리의 숙명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은혜 부모님의 은혜를 제대로 갚지 못했기에 중생들이 지은 죄와 업장은 산과 바다와 같다고 한다.

그렇기에 참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참회는 우리의 진정한 의무인 것이다.

왜 기도하라 하는가? “기도는 진심으로의 참회요 헌신적인 참회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운명은 감사가 결정한다.

참회가 결정한다.

그래서 감사가 우리의 운명이요 참회가 우리의 의무라 하는 것이다.

진정 감사를 모르면 은혜를 모르면 기본을 모르는 사람처럼 불행에 떨어질 우려가 크다.

은혜를 모르기에 항상 불행한 법이다.

경전에는 오종대은명심불망(五種大恩銘心不忘)이 있다.

부처님의 은혜를 바탕으로 하여 다섯 가지의 중요한 은혜를 말씀하셨다.

나라의 은혜, 부모의 은혜, 친구의 은혜, 스승의 은헤, 시주자의 은혜 등을 일컫는다.

부처님의 진정한 가피는 참된 감사에서 현현한다.

나라에 항상 감사하고 사랑해야 좋은 나라에 태어나고.

부모에 항상 감사해야 좋은 부모 만나며.

항상 친구를 소중히 여길 때 소중한 친구를 만나며, 웃어른을 잘 모셔야 좋은 웃어른을 만난다.

부처님께 항상 감사하고 공양을 올려야 부처님의 가피가 있지 않겠는가? 왜 기도를 강조하는지 알겠는가? [출처:능인선원 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