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도스님─참다운 불자가 되려면

참다운 불자가 되려면 /

월도스님

불자 여러분,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인연은, 모든 중생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입니다.

행, 불행의 근본은 바로 ‘만남’에 있는데, 우리의 삶은 수많은 만남의 와중에 순간적인 판단의 연속이므로, 항상 예리한 판단력을 유지해야 합니다.

바른 판단을 위해서는 마음을 안정시켜야 하며, 바르게 보는 안목을 키워야 합니다.

누가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거나 길을 밝혀주지는 않습니다.

내 운명은 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바른판단을 위해 마음의 안정이 필요하고, 마음의 안정을 위해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는 겁니다.

불교는 법칙과 원리를 존중하는 불교입니다.

기적을 바라는 종교가 아닙니다.

법칙과 원리란 무엇입니까?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게 ‘법칙과 원리’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배제하고 기적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에 가라앉는 조약돌을 떠오르라고 기도한다고해서 돌이 떠오르겠습니까? 기적을 찾아다니지 말고 마음의 안정을 통해 법칙과 원리를 제대로 보는 정견(正見)의 눈을 떠야 합니다.

그러므로, 재가불자로서 올바른 신행생활을 하려면, 목숨이 마치는 그 날까지, 허황된 것을 바라지 말고 될 수 있는 부분을 보고 노력하는 바른 믿음을 지녀야 하는 것이 첫번째로 요구되는 덕목입니다.

창조주는 하늘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스스로의 마음에 의해 순간순간 창조되어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두번째로 필요한 덕목은, 계율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가불자가 지켜야 할 대표적인 계율은 바로, 살(殺), 도(盜), 음(淫), 망(妄), 주(酒) ..

이렇게 다섯가지 입니다.

첫째 살생하지 말라.

살생하지 말라고 해서 산 목숨을 죽이지 않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주는 것,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배려하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되는 개념입니다.

그러려면 항상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내어야 하며, 측은지심은 ‘인연(因緣)’을 생각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나는 수 많은 생명 중에 인간으로 태어났구나, 나는 수십억 인류중에 대한민국에 태어났구나, 그리고 수많은 대한민국 사람중에 내 남편 내 아내와 이렇게 만났구나..’ 하는 인연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모든 대상이 소중합니다.

계율의 두번째, 도둑질하지 말라..

주지않는 물건을 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큰 건 남 주고, 작은 걸 내가 갖겠다는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

마치 옛날 우리 어머니들의 마음같이 말입니다.

밥을 하면 위에 쌀밥은 식구들 먹이시고 아래에 가라앉은 보리밥만 드시던 어머니..

당신의 혀가 보리밥만을 좋아해서가 아니셨습니다.

그런 숭고한 희생이 바로 보살행이요 공덕입니다.

그렇게 내 가족을 위하듯 모든 사람을 위한다면 바로 보살이요 부처의 마음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마치 인드라망(網)과도 같습니다.

밥 한그릇을 먹어도, 내가 농사지어, 밥을 해서, 내 손으로 먹는다고 완벽한 자급자족이라 할 수 없습니다.

벼가 영글기까지 수많은 비와 햇살, 바람이 필요했고, 솥이 만들어지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세상은 서로서로 연결되고 관련되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부분에 감사하는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

계율의 세번째, 사음(邪淫)하지 말라..

이는 믿음을 소중히 하는 마음입니다.

믿음이 깨지면 질서가 무너지고 혼돈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계율의 네번째, 망어(妄語)를 하지 말라..

입을 가리켜 구시화문(口是禍門)이라 하였습니다.

말을 잘못하면 재앙을 부를 수도 있다는 교훈입니다.

되도록이면 말을 적게 해야 합니다.

꼭 필요한 말, 좋은 말은 하되, 언짢은 말을 해선 안됩니다.

중생의 말은 화를 부르고, 보살의 말은 이익을 줍니다.

경전에 이르기를, ‘口無多言(구무다언)하고 身不輕動(신불경동)하라’ ‘多言多慮(다언다려)하면 轉不相應(전불상응)이요, 絶言絶慮(절언절려)하면 無處不通(무처불통)’이라 하였습니다.

‘말 많이 하지 말고, 신중하게 행동하라’ ‘말 많고 생각 많으면 오히려 그르치게 되고, 말과 생각을 세우지 않으면 통하지 못할 게 없다’는 말씀입니다.

말 많은 집안치고 편안한 집이 없고, 말을 많이 하다보면 스스로도 다치게 됩니다.

말을 줄이고 입을 철저히 단속하다보면 번뇌가 끊어집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으면, 법당에 나와 부처님한테만 얘기하세요.

그래도 속이 후련하지 않거든

무오스님─열반당 도깨비

열반당 도깨비

-무오스님-

염불 기도만을 10년간 계속해 온 ○○보살이 있었다.

전국의 대소사찰을 찾아 다니며 백일기도에도 동참하고 집안에도 기도실을 마련, 관세음보살님을 봉안하고 하루 세 번씩 정진하며 수선 안거철이면 수행하는 스님들 공양을 지어드리고 공덕을 짓겠다고 집을 나섰고 대소 불사에 권선 화주하는데 아주 열성인 보살이었다.

겉으로 나타나기는 신심이 깊고 수행력이 많은 지극한 불자이지만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이기적인 마음과 고집 또 불같은 성격 때문에 원만한 대인관계는 이뤄지지 않았다.

한 도반이 그 보살의 잘못된 신심을 고쳐 볼까 하여 그 보살이 기도하는 법당을 찾았다.

법당에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정진성과 함께 구슬땀이 흐르는 것을 씻을 새도없이 절을 하는 보살을 보게 되었다.

친구는 법당 문을 두드리며 ○○보살님! ○○보살님 하고 불러댔다.

기도 시간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 보살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관세음보살을 계속 부르며 절만 하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절만 하는 그 보살의 뒤에 대고 도반은 더 큰소리로 ‘○○보살’을 불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된 보살은 염불을 그치고 법당 밖의 도반에게 화를 벌컥 냈다.

” 왜 보살님은 남의 기도시간에 내 이름을 그렇게 불러 댑니까?” 도반은 웃으며 “보살님 내가 보살님 이름을 10분간 불렀는데 보살님은 그 정도에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보살님이 관세음 보살님을 10년간이나 불러댔으니 관세음보살님이 얼마나 힘이 드셨겠습니까?” 하였다.

마음 공부를 위해 염불하고 참선을 하지만 이기심이 바탕이 된 신앙과 수행은 자신의 업만 두텁게 할 뿐이다.

(대중불교에서 인용) 관세음보살님이란 자비와 구원의 화신을 일컫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치심은 자신의 구원으로부터 출발하여 세상을 향한 크나큰 사랑으로 조건없이 베풀어지는 것이므로 무연 자비라 하지요.

우리 불자들이 관세음보살을 칭명함은 적게는 자신과 가족의 안녕과 평안을 위하지만 부처님의 본원을 온갖 생령들 속에서 실현코자하는 회향의 크고 넓은 마음으로 쓰여 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때에는 단순히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관세음이라는 위대한 정신을 한갖 자신의 장엄물로 삼으려는 소아적인 발상에 그치고 말게 됩니다.

절에 10년 아니라 30년, 평생을 다녔더라도 관세음을 부르는 우리들의 마음이 관세음의 마음으로 변형되어 가지 못하고 여전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충만하여 겉으로 짓는 상과 신심은 정신과 시간을 허비할 뿐입니다.

비록 단 한번을 염불하고 단 한번을 절할지언정 관세음의 마음으로 간절하게 일념이 만년되게 정진함이 진정한 불자의 기도입니다.

큰절에서 흔히 쓰는 말 중에 ‘열반당 도깨비’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냥 듣기에는 열반에 이를 정도의 신행을 잘한 분을 일컫는 것 같아도 그 진짜 뜻은 이렇습니다.

수십년 절에 다녀 절에 행사나 염불 기도등은 열심히 하지만 그 마음을 부처요, 보살의 마음으로 바꾸지 못하고 어느 일에나 나서면서 사중과 대중들의 흉허물을 들춰 내어 분란과 시비의 일을 만들어 내는 보살이나 불자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도 흉이나 허물은 쓸어 덮어주고 오히려 사랑과 자비의 손길로 덜깨인 제자들을 이끄신 것을 우리는 주리반특가나 라훌라 난타등의 예화에서 봅니다.

좀 부족한 제자일망정 부모가 못난 아들 아끼듯 더욱 따뜻하게 감싸고 보살필 때 본성속에 숨어있는 지혜와 자비의 싹이 움터 나와 온전한 사람보다 더 뛰어난 성취를 이룬 이들이 그들이지요.

혹 들리는 말로 “절에 수십년 다녔어도 배운 것이 없다” “되는 일이 없다”는 등의 말로 평소에는 열심히 복을 닦고도 한순간에 복을 털어 버리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이런 경우는실제로 절에 왔다 갔다 한 것은 몸 뿐이요 마음은 세간의 분요한 잡사에 사로 잡혀 마음 닦는 공부를 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이 절뿐만 아니라 여러 사찰의 신도님들을 보아도 법회를 통해 법문을 듣고 마음닦는 공부를 하여 안심입명을 얻고자 하는 분들은 틈틈이 혹은 일요법회 정기 법회등을 동참하여 한구절의 법구라도 열심히 듣고 공부 하고자 하나 대부분의 불자들은 ○○기도 ○○불사 하는등의 일에는 서로가 열을 내면서도 공부하러 모이자 하는 법회에는 흔한 말로 내놓은 보살입니다.

불자라고 하면 부처님의 아들과 딸이거나 제자라는 뜻을 가리킵니다.

이 몸은 부정모혈을 빌어 나왔을 망정 수계를 받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면 그것을 가리켜 진리의 아들, 법의 계승자라 하는 것이지요.

한번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해 봅시다.

나 자신의 참 가치가 진정한 법의 계승자요.

진리의 아들 딸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확연하게 다가 온다면 그 기쁨 즉 법희 선열 속에서의 삶 또한 안정과 행복이 약속된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불자요.

법의 계승자요.

진리의 아들 딸임을 각성한 이들이 자신의 삶이 곧 부처님의 삶이요.

법의 삶이 되도록 함에는 부단한 정진과 노력이 함께 요구 됩니다.

법과 진리의 이름뿐인 계승자와 상속자가 아니라 법과 진리의 참다운 구현자요, 전법자로서의 자세를 갖추고자 함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학생은 학생대로 청년은 청년대로 거사는 거사대로 보살은 보살대로 함께 모여서 법을 논의하고 법에 의해 생각하고 법에 의해 잠드는 생활이 계속 되면서 은연중에 중생으로서의 구습이 하나하나 닦여져 나가고 불보살의 지혜와 자비의 정신으로 훈습된 자신과 만나게 될 것이며 그와 같은 불자들이 모이고 만나는 것을 불자공동체, 불국정토의 구현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며 비로소 부처와 조사의 은혜를 제대로 갚았다 할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중에 인생 4난득이라 하신 것이 있습니다.

사람으로 나기 어렵고 남자 몸 받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렵고 부처님 재세시 뵙기가 어렵다는 것이 그것이지요.

우리는 백천만겁을 지내도록 만나기 어려운 불법의 가르침을 만난 사람들이지만 이생을 바르고 진리적인 삶으로 살지 못하고 비껴갈 때 다시 어느때 후일을 기약할 것인지 심사숙고할 일입니다.

정기법회일,일요가족법회하는 오전 10시에는 그날의 모든 일 가운데 법회가 중심이 되도록 하루의 계획을 짜려고 노력 하며 가족과 함께 성전을 모시고 절로 나서는 발걸음이 곧 우리 불교를 흥왕케하고 가정을 복되게 하는 첩경이 되고 지름길이 됩니다.

그렇게 될 때 ‘ “수십년을 다녀도…'” ‘ “열반당 도깨비'” 등의 자랑스럽지 못한 이야기들을 우리 주위에서 방생해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이 계절에 생각해 봅니다.

월서스님─피안은 어디인가

피안은 어디인가

월서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 피안은 결코 멀리있는 것이 아니다 사악한 생각 버리면 저절로 찾아와 어느 때 세존이 사밧티 교외의 제타 숲에 있을 때였다.

그 때 제자 아난다가 세존에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여래, 아라한, 옳게 깨달으신 분이 세상에 없는 동안 외도들이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제 세존께서 나심으로써 그들은 더 이상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 동안에는 반딧불이 빛을 낸다.

그러나 해가 떠오르면 그 빛은 점점 사라져 반딧불은 더 이상 빛나지 않게 된다.

외도(外道)의 빛 또한 그와 같다.” 세상은 항상 ‘양극단(兩極端)을 이루고 있다.

선이 있으면 악이 있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있기 마련이다.

이 극단은 하나가 멸(滅)하면 다른 하나가 새롭게 생성된다.

부처님이 반딧불의 비유를 통해 외도들의 멸을 예견하고 어리석은 제자들을 꾸짖는 이 설법은 우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던져준다.

이와 같이 세상은 바른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고 옳지 않은 것이 있음으로 해서 바른 것이 더욱 빛을 발한다.

여기에 수행의 깊은 정신이 숨겨져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숨을 쉬며 살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세계를 두고 항상 이상형의 다른 세계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 이상형의 세계가 다름 아닌 피안이다.

원래 피안(彼岸)이란 이쪽이 아닌 ‘저쪽 언덕’이란 뜻이다.

수행자는 언제나 저쪽 언덕을 그리워하고 동경하고 있으며 그 피안에 가기 위해 모든 성력(誠力)과 수행을 기우려 정진하고 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피안의 실체를 모른다.

다만, 우리는 그 피안을 두고 해탈의 경지, 성불, 깨달음, 꿈, 희망 등 수많은 언어로서 그곳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막연한 대상에 대한 그리움과도 같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쪽 언덕’이란 과연 어떤 곳이기에 우리들이 그토록 열심히 그곳으로 가기를 원하고 있을까? 또 ‘저쪽 언덕’이란 현실적으로 우주 어느 한구석에 정말 있는 것일까? 이 피안을 두고 불교에서는 극락이라 하고 예수교에서는 천당이라 하였으며 혹은 유토피아니 파라다이스니 하는 이상의 세계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 불교에서는 이 피안을 두고 극락이란 뜻과 동일한 어의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불교에서는 피안을 두고 하나의 가설된 세계로 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또한 이 우주 안 어느 구석에 실재한 세계로도 보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다면 피안이니 극락이니 하는 말들을 불교에서는 어떻게 소화시킬 것이며 어떻게 합법화 할 수 있을까? 아니 합법화가 아니라 대성(大聖) 석가세존의 참마음이 무엇이며 이러한 세계는 실재 어느 곳에 있을까? ‘피안으로 건너간다.’ 이를 단순하게 풀이하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간다는 개념이다.

마치 강물이 있는데 이쪽 기슭에서 배를 타고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 같은 관념을 가지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또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반드시 죽어야만 피안으로 가는 줄로만 알고 있다.

『화엄경』에 보면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와 중생성불찰나중(衆生成佛刹邪中)’이란 말이 있듯이 피안이란 곳에 도달하는 것은 간단하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든 어리석은 생각만 완전히 제거가 되면 찰나에 그것이 피안인 것이다.

결국 피안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며 사악한 생각들과 어리석은 생각들을 버리면 자연히 피안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