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인스님─세상에서 가장 수승한 말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세상에서 가장 수승한 말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혜인 스님

오늘 열린 이 성스러운 법회에서는

관세음보살님과 나무아미타불의 은덕에 대한 법문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모든 스님들이 수행정진과 중생제도에 열심이시지만

각각의 스님들마다 생각이 다르고 말씀이 다르고 추구하는 것이

조금씩 다르다보니 능엄주, 대다라니, 금강경, 법화경, 지장경 등

각자가 좋다고 생각하시는 것들을 불자님들께 권해주십니다.

그러니 신도님들은 그 중에 과연 무엇이 가장 좋은지 헷갈리는 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돈이라고 하면 동전도 돈이고 천 원짜리도 있고 만 원짜리도 있고

수표도 있지만, 바닥에 돈이 뿌려져 있어서 주울라치면 동전보다는

수표를 줍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팔만대장경 모든 말씀에 버릴 것이 하나도 없고 좋고 덜 좋음에 차이가 없지만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돈을 줍기 위해서는

다섯 글자 중 ‘관세음보살’보다 더 훌륭한 글귀가 없고,

여섯 글자 중에는 ‘나무아미타불’보다 더 좋고 더 큰 이익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합쳐서 열한 글자인데 이 열한 글자가 우주를 덮고도 남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혜택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출가해 절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어려서 절에 왔는데 아무도 나를 상좌 삼으려고 하질 않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볼품이 없었나 봅니다.

나중에야 일타 대화상을 뵙고는 스님의 상좌가 되겠다고 하자

대화상께서 껄껄 웃으시는 것으로 대답을 해주셔서 은사로 모시게 되었지만

그전까지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은사도 제대로 못 정하고 있다 보니 누가 옷 한 벌 해주는 사람이 없고

양말 한 켤레 해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배를 곯고 고무신이 떨어져 발가락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 다반사일 정도로

어렵게 살았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그만큼 이 혜인이라는 사람이

전생에 잘못 닦아 지어놓은 복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한 가지 많은 것이 있다면 잠이 많을 뿐이었습니다.

어찌나 잠이 많은지 논두렁길을 걸어 가다 졸아서 몇 번이나 논에 빠졌는지

모릅니다.

밥을 짓다가도 잠이 와서 벽장에 들어가 졸다가 야단을 맞기도

했습니다.

법문은 고사하고 대중들 앞에서 인사를 할 때도 덜덜덜 떨려

말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관세음보살보문품을 보니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마음과 뜻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전생에 몸과 입과 마음으로 한량없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니라.

그 죄를 없애고 모든 일이 마음과 뜻대로 성취하고자 하는 자는

언제나 관세음보살을 명심해서 부르라.

관세음보살을 항상 부르고 생각하고 공경예배하는 자는

물에 빠지더라도 빠져죽지 안고 불에 들어가더라도 타서 죽지 않고

칼과 몽둥이로 그 사람을 후려친다할지라도 관세음보살을 많이 생각하고

부르는 자에게는 칼과 몽둥이가 조각조각 동강 날 것이니 복이 없는 자는

관세음보살을 부르라.

이 관세음보살보문품을 보고나서 그때부터 항상 관세음보살을 염했습니다.

부산에서 강원도까지 하루 100리씩 15일을 걸었는데

그때 발자국 발자국마다 관세음보살을 불렀습니다.

보현사 가서 하루 3000배 씩 절을 했고,

해인사에서도 하루 5000배씩 200일 동안 절을 했는데 그 절하는 중간에

말문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사방 곳곳을 다니며 법문을 합니다.

조계사에서도 법문을 해달라고 하고 불교방송에서도 초청을 받아 가야하고

괌에서도 와서 법문해 달라고 하니 이것은 모두 관세음보살님의 힘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은 모든 중생의 마음을 살펴 보살핍니다.

아이가 울면 배가 고픈지, 아픈지, 잠이 오는지 어머니가 알듯이

관세음보살님은 관세음보살을 찾는 중생의 마음을 모두 아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어렵고 괴로운 일이 많습니까.

바로 이때 만병통치약 같은 관세음보살 다섯 글자가 뭐가 어렵습니까.

밥하는 사람은 밥하면서 운전하는 사람은 운전하면서

밭 매는 사람은 밭 매면서 그 자리에서 부르면 됩니다.

소리도 안내도 됩니다.

그래도 관세음보살님은 다 듣고 그 마음을 다 아십니다.

이 관세음보살의 가피력이라는 것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지금 충청북도 단양에 64만평 땅을 매입해

약천사 법당보다 두 배나 큰 법당을 짓고 있습니다.

금년 9월 14일에 봉불식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상상을 해 보십시오.

대웅전 안에 방이 몇 개가 나오고 엘리베이터가 4대나 설치되고

법당 마루에 다다미가 600장이나 깔립니다.

어마어마한 이 불사, 이게 누구의 힘이냐.

저는 분명히 불보살님의 힘이요,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나무아미타불에 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나무는 ‘귀의’라는 뜻이고 아미타는 ‘무량수무량광’이라는 뜻으로

한량없는 수명을 가진 부처님을 아미타불이라고 합니다.

몸이라는 것은 백년도 못 가서 죽어 없어지지만 이 몸속에 들어있는 주인공,

이 마음은 늙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고 썩는 것도 아닌,

문을 들을 줄 아는 이 주인공, 나의 본래 주인공을 아미타라고 합니다.

이 주인공을 찾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부처님은 견성성불한 분이고 우리는 갖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하니

중생입니다.

부처님은 알아서 깨달았으니 부처님입니다.

깨닫고 깨닫지 못한 것만이 다를 뿐이지 갖고 있는 것은 똑같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것은 만고에 불변한 최고의 보물을 찾는 일입니다.

나옹 스님께서 우리에게 설한 가장 훌륭한 수행 방법이 있습니다.

‘아미타 부처가 어디에 있는가

마음을 한군데 모아서 부디 잊지 않도록 노력해라

생각하고 생각해서 생각 없는 곳에 이르면

나도 아미타부처님처럼 금빛 주인공 부처가 될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항상 명심해서 열심히 하십시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낮 12시까지는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부르세요.

관세음보살은 모든 고통을 구해내고 어려움을 해결하는 해결사입니다.

이 세상에 어려운 일이 많고 괴로운 일이 많지 않습니까.

그럴 때 구고구난 관세음보살님을 찾으세요.

나무아미타불은 팔십억겁 무량중죄가 아미타불 한 곡조에 춘설같이

녹아내린다고 했습니다.

겨울에 쌓인 눈이 봄이오면 저절로 녹아내리듯

나무아미타불 한 마디에 한 평생 지은 죄가 춘설같이 녹아내린다는 것입니다.

업장 소멸에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오전에는 관세음보살님을 염해서 모든 어려움을 걷어내고

오후에는 한량없는 복을 지닌 아미타부처님을 염해서 복덕을 쌓으세요.

모든 부처님 중에 아미타부처님만큼 복 많은 부처가 없다고 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을 잘 보시면 머리에 항상 아미타부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항상 잊지 않고 아미타부처님을 모시고 있다는 뜻입니다.

불교는 너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든 하나를 붙잡고 항상 잊지 않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게 되면 몸도 건강해지고 마음도 편해지고 죽을 때를 알고 편하게 죽고

죽은 후에도 정토에 환생합니다.

하나 붙잡고 잊지 않는 게 불교 여러분에게 한 가지 더 당부하자면

화내는 마음을 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라도 성내지 않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우리가 남에게 무시를 당하고 인덕이 없는 것은

나 스스로가 인덕이 없게 생활하고, 말하고, 마음을 쓰기 때문입니다.

마음, 마음 마다, 만나는 사람, 사람마다에게 기분 나쁜 말 하지 말고

칭찬하고 존경하고 내 마음을 낮추고 받들어 모시는

그런 불자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안스님─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인연소치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인연소치

-지안스님-

사람이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인연소치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가장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인연에 의해서 생겨나고

인연에 의해서 없어진다”는 연기의 공식은 마치 1 더하기 1은 2고 2빼기 1은 1이라는 산수의 기본

이치와 같은 말입니다 모든 존재가 인연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므로 인연을 빼면 이 세상은 없는 것입니다.

인연 때문에 우리는 사는 것이고 인연 때문에 공동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인연이 시공을 장악합니다.

시간과 공간이 교직되면서 인연의 繡가 놓아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만상의 형성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시작에서 보면 인연은 언제나 창조의 역할을 합니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들리게 합니다.

새싹이 돋아나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는 것처럼 인연은 자라서 성숙하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꽃이 시드는 과정도 있지만 이는 차라리 인연의 퇴보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연은 생성의 의미요 창조의 의미이므로 인연이 있는 것은 아름답고 축복 받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할 수는 없습니다.

설사 내가 아무리 불우한 환경에 처해 있고 절망과 좌절을 맛보고 있다 하더라도

내가 태어난 것은 아름답고 축복 받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결코 내 자신의 출생이 원인

무효가 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버리고

죽이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외쳤는지

그 뜻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늘 위나 하늘 아래서 내가 홀로

가장 높다는 것은 모든 생명의 존재라면 누구나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불우하고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내가 아니면 안 되는,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내 목숨을 바치면서 해야 할 그 일을 찾을 때 나의 인격은 하늘보다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육신의 생사를

초월해 있는 절대 생명으로 나의 참 생명 인 것입니다.

이것을 법신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법신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도 그릇된 집착으로 육신만을 위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삶을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육신을 위하는 것은 법신을 위해서입니다.

금생의 일회적인 한 생은 내가 수용해야 하는 많은 생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마치 오늘 하루가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무수한 날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삼생의 인연을 동시에 가지고 삽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사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면서 어제와 내일을 동시에

함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삼생의 인연을 평등하게 관찰하고

살라는 부처님의 말씀도 있습니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떠오른다”는 말처럼 끝나지 않는 영원한 미래를 향해서 내 마음속에 모든 시간을 담아 놓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희망은 곧 원력입니다.

이상을 동경하는 아름다운 마음에 보현보살처럼 큰 행원을 싣고 살아야 합니다.

어느 수도원에 사는 사람의 소원이

평생을 화장실 청소를 하며 사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평생을 화장실 청소하는 청소부가

되겠다는 소원이나 또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소원 중에 어느 것이

좋은 소원이고 어느 것이 나쁜

소원이다 하는 우열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육지에서 먼 낙도에는 아직도

비행기나 기차는 고사하고 버스도 타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를 깊이 명심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늘과 내일이 인과법으로 연결되어 무수한 인연이 그 속에서 맺어진다는 점입니다.

현재의 인연 속에 과거의 인연이 들어 있고 미래의 인연이 들어 있다는 것, 이것을 생각하고 스스로를 타이르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혜암스님─그림의 떡으로는 허기를 채울 수 없구나

그림의 떡으로는 허기를 채울 수 없구나!

-혜암스님-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해도 성취가 없자

공부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돌아다니다 깨친 분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향엄스님은 중국 스님으로서 박학다식하여

그의 글을 당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안하무인이어서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의 지식을 겨루어 보려고 동서남북을 휩쓸고 다녔습니다.

그런 향엄스님이 위산스님이라는 도인을 찾아갔습니다.

위산스님은 어느 날 그 많이 알고 있다는 지식꾼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평생 배운 것이나 경전에서

얻어들은 도리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가 어머니의 태에서 나오기 이전의 본래면목은 무엇이냐.”

그렇게 묻자 향엄은 꼼짝을 못했습니다.

몇 가지 대답을 해 보았으나 위산스님은 고개를 저으며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었습니다 .

“틀렸다.

아니다.”

향엄스님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위산스님에게 매달렸습니다.

“스님, 제발 이 도리를 알려 주십시오.

그러나 위산스님은 냉정히 뿌리치고 말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 도리를 말로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물건, 나의 소견이지 어찌 너의 물건이 되겠느냐.”

향엄스님은 물러나 여러 경전과 어록을 들추어보았으나

어디에서도 그 대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림의 떡으로는 허기를 채울 수 없구나.”

탄식을 한 그는 다시는 선수행 같은 것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공부를 포기하기 전에 그는 밤에 잠도 자기 않고 먹지도 않고

열심히 공부를 했으나 잘되지 않았습니다.

나무를 해 오라고 시키 면 나무를 해 오고,

밥을 지으라고 하면 밥을 지었습니다.

똥을 푸라고 하면 똥을 푸고,

삼동절에 숯 동냥을 해 오라고 시키면 또 그렇게 했습니다.

일하면서 공부해 가지고 가서 물었습니다.

“이것입니까?”

“아니다.” 그러자 공부를 그만두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도인스님 곁을 떠났습니다.

그 뒤로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던 중에

남양 땅에 이르러, 혜총 선사가 머물던 조그만 암자가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곳에 머물렀습니다.

비질을 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돌멩이를 대밭에 버리다가

그것이 대나무에 부딪혀 ‘딱’ 하는 소리에

향엄스님은 활연대오를 했습니다.

실로 스승으로부터 요구받은

[본래면목]을 되찾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동안 얼마나 애를 썼으면 깨달았겠습니까.

때가 되었으므로 곡식이 익는 것처럼,

암탉이 스무 하루가 되어 병아리를 까는 것처럼

공부가 무르익어 마침내 깨달은 것입니다.

다 된 공부라도 조금 참지 못하면 허탕이 되어 버리고

공부는 영원히 남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처음과 끝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전쟁에 나가 십 리, 오십 리를 가다 돌아온 사람과

백 리쯤 가다 돌아온 사람이

서로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를 것이 없습니다.

향엄스님은 깨친 뒤에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흘러

목욕재계하고 향을 피우면서

멀리 있는 도인스님을 향해 절을 했습니다.

“큰 스님께서 대자대비하시니 그 은공은 부모보다 더하십니다.

그 때 제게 말로 ‘도는 이런 것이다.’ 하고 가르쳐 주었다면,

어찌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도는 말로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의심이 생명입니다.

의심이 불무더기와 같이 뭉치면 탁- 하고 터질 때가 옵니다.

모르는 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아는 것이 있는 사람은 틀렸습니다.

몰라야 합니다.

공부가 안된다고 답답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명히 몰라야 합니다.

공부를 할수록 더 깜깜하고 더 몰라야 합니다.

“공부를 해 보니 아무 것도 없더라.”

그런 말을 하지 말고 한 구멍만 파십시오.

쥐가 쌀자루를 뚫을 때 한 구멍을 뚫다가

주인이 와 도망을 하였다가

다음날 다시 와서 그 구멍만 뚫습니다.

그러니 쌀이 안 나오겠습니까?

공부도 그와 같습니다.

안된다고 답답하다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내면 공부를 못합니다.

알래야 알 수 없고, 재미도 없고,

모르는 자리에만 파고 들어가십시오.

부처님은 “힘이 없는 모기가 입부리로

철통(쇠로된 소가죽)을 뚫으려고 하는 것처럼

재미도 없고 될 것 같지도 안은 안 될 자리,

재미도 없는 자리로 파고 들어가면

몸뚱이까지 쏙 들어갈 때가 있으리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은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무서운 힘,

법력이 있습니다.

마음이 모아지면 활로 바윗돌을 쏘아도

뚫고 지날 만큼 우리 마음이 그렇게 무섭습니다.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법이 있기 때문에 묘법이라고 합니다.

우리 마음은 하늘 땅도 없애 버릴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옛날, 지리산에 포수가 들어가기만 하면

호랑이 밥이 되어 나오질 못했을 적의 이야기입니다.

들어가는 포수는 있어도 나오는 포수는 볼 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날 능수능란한 사냥꾼이 활을 짊어지고 사냥을 나갔는데,

하루 종일 활을 쏘다 보니 저녁 나절에 이르러

화살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짐승이 있어도 쏘지 못하고 아꼈는데 밤이 되자

너무 어두워 산을 내려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위 위에 올라가 망을 보고 있노라니

큰 집채만한 백호가 나타나더랍니다.

화살 한 방을 잘못 쏘 면 도리어 내가 죽는다’ 는 생각으로,

활시위를 당기고는 온 정성을 들이고

힘을 다하여 자신 있을 때에 탁 쏘니

호랑이가 한 방 에 떨어지더랍니다.

다음날 아침 날이 새어 가보니,

큰 바위덩이에 나무화살이 박혀 있더랍니다.

우리 마음이 한곳으로 뭉치면 그럴 수 있습니다.

난리가 났을 때에 열 사람이 들어도 못 들 부처님을

한 사람이 업고 법당 밖 으로 내놓은 일도 있습니다.

거짓말 같지만, 부처님이 불에 타버리지 않게

들어내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무겁다, 못한다.

그런 생각이 들 시간도 없었으니

들지 못할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부처님을 다시 법당 안으로 모시는데

여섯 명이 들어도 들리지 않아 열 명이

달려들어 그 부처님을 모셨더랍니다.

깨달아야 화두의 정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을 해도 그것은 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팔만대장경이 코 닦개,

똥닦개’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향엄은 깨닫자 오도송을 읊었습니다.

하루는 법형이 되는 앙산이 물었습니다.

“그래 요즘 심경은 어떠하오?”

그러자 향엄스님이 대답했습니다.

“갑작스러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리고는 게송을 읊었습니다.

지난해에 가난한 것은 가난한 것이 아니요.

올해에 가난한 것이 비로소 가난한 것이라.

가난하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번뇌망상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지난해에는 송곳을 꽂을 땅도 없었는데,

올 해에는 그 송곳조차 없어졌더라는 말입니다.

도는 이름이 붙을 수가 없습니다.

크게 깨쳤느니 하는 그런 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도는 본디 닦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깨치지 못합니다.

다만 범부를 대상으로 하려니까 깨쳤다,

닦았다 하는 표현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부증불감(不增不感) 이라고, 허공처럼

그대로 무량겁을 지내도 변화가 없는데,

무슨 닦고 말고 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부처는 그대로입니다.

우리의 무명심이 일어나서

번뇌망상이 되어 마음이 어두워진 것이지

우리 본 마음은 어둡고 깨끗한 것이 없습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묻습니다.

“본디 깨끗한 마음이 어째서 어두워집니까?”

본디 한 물건이 없다고 했는데,

어찌 허공이 벌어지고, 땅이 벌어지고,

산과 물이 벌어지고, 사람이 차별이 많습니까?”

부처님이 오셔도 그것은 대답을 못합니다.

방망이만 때립니다.

나도 처음에 그런 생각이 났습니다.

‘한번 깨치면 다시는 매하지 않는다.

한번 깨치면 다시는 중생으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본디 부처인데

중생으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어찌 중생으로 떨어졌는가’하는 의심이 생겼습니다.

이런 의심을 풀려고 선지식을 찾아가면

방망이로 맞기나 하지 대답은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말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 문입니다.

앙산이 말했습니다.

“여래선은 알았다고 할 수 있으나

조사선에 이르러서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군.”

그러자 공부를 열심히 한 향엄은

다시 게송하나를 지어 바쳤습니다.

내게 하나의 작용이 있으니 눈을 남에게 깜빡여 보여

다른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할 때에는 달리 삼일을 부리리라.

이를 들은 양산스님이 말했습니다.

“이제 조사선도 알았군.”

도인은 속이지 못합니다.

말이 도는 아닌데 말 한자리만 하면

자기가 그 자리에 가 봤기 때문에 다 알아버립니다.

여자라도 도만 깨치면 아무리

큰 스님 백명이라도 때려잡습니다.

내가 비구니 스님들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말세에 비구니 스님 가운데 큰 도인이 나와 호통을 치고 다니면

비구들이 부끄러워 공부를 많이 할 것인데,.

비구 스님보다 비구니 스님들 사이에서

도인이 하나 나오면 우리 나라가 수지 맞을 것이니

빨리 도인이 되어 비구들을 제도하라고 했습니다.

향엄스님도 공부가 잘 안된다고 포기를 한 사람이 아닙니까.

일 주일 동안 용맹정진한다고 해서 장한 사람이 아닙니다.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부처님이 무량겁을 두고 괴로운 행을 다 참고

이겨내 한이 없는 세상을 닦았다.”

말을 듣자 금방 깨치는 사람이라도,

과일이 익을 때가 되어 익은 것처럼

지난 말 고생을 했기 때문에 깨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시절인연이라고 합니다.

세상엔 공짜가 없습니다.

안되는 것이 공부인 줄 알고 원숭이가

흉내를 내듯 ‘이 뭣고, 이 뭣고’ 하시오.

꽤 선근이 있는 보살의 아들이 지난 설에

서울에서 대전으로 내려오다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식구 모두가 신심도 깊고 선근이 있었는데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절에 불공을 들이러 다니고, 참회하고

공부나 조금한다고 재앙이 없기 바라지 마시오.

우리는 업보 중생입니다.

지난날 업을 지어 이 세상, 이 시간에 받으러 온 것입니다.

오늘은 내일 받을 것을 만드는 시간입니다.

그러니 지난날에 지어 놓은 것은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받아야 합니다.

정업은 면하지 못합니다.

부처님도 도인들도 지난날 지어 놓은 일을 다 받습니다.

그러니 나쁜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착한 일하는 것은 다음날 받는답니다.

착한 일을 하면 지난날 지어 놓은 죄를

조금 감할 수 있고 작은 죄는 없어질 수 있습니다.

절에 다닌다고 해서 개인적으로 아무 재앙이 없길 바라지 마시오.

닥치는 대로 받되 난관이 생길 때는

‘내가 전생에 복을 짓지 못했구나.

‘이렇게 깨달아야 합니다.

좋은 일이 올 때는 기뻐하지 말고,

‘언제 이런 착한 일을 했던가’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남이 나를 도와주더라도 그 사람이 착한 사람이 아니고

내가 착한 사람이고 내가 복이 있는 겁니다.

나쁜 일이나 좋은 일이나 똑같습니다.

집안 식구 가운데에서도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절대 원망하지 마시오.

죄가 더 커집니다.

까닭없이 생겨나는 일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