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스님─남의 허물 보지 않으면 도는 절로___

“남의 허물 보지 않으면 도는 절로 이뤄 진다”

[7인 선사 초청 대법회]화엄사 선등선원 선원장 현 산 스님

설통급심통(說通及心通)이여여일지허공(如日至虛空)이니라.

유전돈교법(惟傳頓敎法)하야출세파사종(出世破邪宗)이니라.

(설법도 통달하고 마음도통달하여 해가 허공에떠오름과 같나니 오직 돈교의 법만을 전하여세간의 삿된 가르침을 부수는도다.

)

육조 혜능 스님의 무상송(無相頌)에 나오는 첫 번째 구절입니다.

늘 말을 하고 있지만 말하고 있는 그 당체를 우리는 모릅니다.

그 당체를 바로 보는 것, 이것이 설통(說通)입니다.

다음은 심통(心通)인데.

마음의 본 바탕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내 면목을 깨닫는 것, 이것을 심통이라고 합니다.

내가 내 면목을 깨닫는 그 자리는 해가 허공에 가득 찬 것과 같습니다.

해가 허공에 찰 것 같으면 삼라만상 모든 것이 환하게 잘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내 면목을 깨달을 것 같으면, 두두물물(頭頭物物) 산하대지(山下大地)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우주(宇宙)와 인생(人生), 진리(眞理)를 남김없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견성법(見性法)이라고 합니다.

‘돈교법(頓敎)하야 출세파사종(出世破邪宗)이니라.

’ 견성법으로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잡는다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별별 종류의 종교가 많습니다.

불교만 해도 많은 가르침이 있는데, 너무 많다보니 팔만사천법문이나 됩니다.

중생의 근기가 다르니, 수준에 따른 많은 대기설법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저나 여러분들도 멋진 형상의 모습으로 이생에 태어났지만 우리는 결국 늙고 병든 후 죽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인생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내 면목을 모르고 갑니다.

결국 캄캄한 동굴에서 헤매다 한 세상 마칠 뿐입니다.

그 캄캄한 동굴에 촛불 하나만 켜 놓아도 환해지듯이 바로 깨달을 것 같으면 나 자신은 물론 세상 이치와 진리를 확연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내 면목 깨달으면삼라만상-인생남김없이 볼 수 있어

부처님은 견성법만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 가난하고 병든 사람은 어떤 기도를 하고, 어떤 염불을 해야 재앙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많은 방법들을 일러주셨습니다.

그러나 종국에는 성품을 바로 보는 견성법을 설하셨습니다.

나고 죽는 고통에서 벗어난 영원한 행복의 자리.

무한한 공덕이 본래 갖춰진 내 면목을 깨달아 삶의 모든 고뇌에서 해탈할 수 있도록 최상승법을 일러주셨던 것입니다.

교즉무돈점(敎卽無頓漸)이건만미오유지질(迷悟有遲疾)이니라.

약학돈교법(若學頓敎法)이면우인불가미(愚人不可迷)이니라.

(가르침에는 돈과 점이 없으나미혹함과 깨달음에 더디고 빠름이 있나니만약 돈교의 법을 배우면어리석은 사람도 미혹하지 않느니라.

)

깨달음의 자리, 깨닫는 데에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문이란 없습니다.

깨달음 당체에는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는 선후가 있습니다.

숙세에 많이 닦은 사람은 바로 깨닫습니다, 언하(言下)에 바로 깨닫습니다, 그렇지만 업장이 두터운 사람은 어떻습니까.

애를 써도 금방 되지 않습니다.

금생에 안 되고 몇 생을 공부해야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 그 자체, 거기에는 빠르고 더딘 것이 없습니다.

순간에 대오했건, 천생만생 선근을 닦아 깨달았건, 깨달음의 당체는 한결같이 똑 같습니다.

그러면 깨달음의 그 자리는 어떤 것일까요.

신령하기 한량 없고 밝고 밝은 자리.

이 자리는 밝음과 어둠을 초월한 밝음이요, 그러한 당체이기 때문에 천지와 삼라만상이 이 신령스런 근원에서 다 나타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무한한 지혜 자리를 등지고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량없는 세월 동안 부처님 처소에 무한한 선근을 심지 않았던들 어찌 이 법의 끝자락인들 만날 수가 있었겠습니까.

말 그대로 맹귀우목(盲龜遇木)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은 귀에 잘 들어오지요.

아주 ‘삭삭’ 들어 올 것입니다.

그러나 내 면목, 내마음을 깨닫는 도리는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고 믿지도 않습니다.

선근이 없으면 결코 만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춤을 추고 노래 부르는 곳엔 즐겨 갑니다.

정신없이 광대처럼 춤을 추는 것은 좋아하지만 법문을 듣기 위해 법당에 가는 것은 꺼려합니다.

왜 일까요.

선근이 없기 때문입니다.

법문도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이 있어야 바른 법도 만날 수 있습니다.

설즉수만반(說卽雖萬般)이나합리환귀일(合離還歸一)이니라.

번뇌암택중(煩惱暗宅中)에상수생혜일(上須生慧日)이니라.

(말하자면 비록 일만가지이나모두 합하면 도로 하나로 돌아가나니번뇌의 어두움속에서항상 지혜의 해가 떠오르게 하라.

)

말로 법을 설할 것 같으면 온갖 말을 다할 수 있습니다.

팔만사천법문.

얼마나 많은 법문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치로 볼 것 같으면 모두가 하나요, 한자리입니다.

(손바닥으로 법석을 내리지며)이 소리가 들립니까?

이 소리를 듣는 그 자리를 바로 볼 것 같으면 모든 문제가 단박에 해결됩니다.

친소(親疎) 증애(憎愛), 선악(善惡), 시비(是非)에 마음이 얽혀 참된 이치를 보지 못할 뿐입니다.

범소유상(凡所有相)이요.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

금강경에서 현상이란 환(幻)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다고 했습니다.

인연따라 왔다가 인연 다하면 흩어지는 꿈과 같은 것이 우리네 삶인데, 이것에 집착해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도 여러분의 마음은 각종 번뇌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 찰나 사이에 백번도 더 바뀌는 뜬 구름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중생의 삶입니다.

번뇌암택중(煩惱暗宅中)에 상수생혜일(上須生慧日)이라.

이렇게 깜깜한 번뇌의 마음 가운데 항상 지혜를 발현 해야합니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항상 지혜를 내서 현상의 선악 시비를 벗어난 청정한 마음을 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참선법입니다.

여러분, 세월은 너무나 빠르고 허망합니다.

제가 1965년도에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는데 비구계를 주셨던 삼사칠증(三師七證) 스님들은 모두 돌아가시고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세상사는 이렇게 순식간입니다.

비단으로 몸을 감고 잘 먹여 보호하고 온갖 욕락 다 취해봐도 한 호흡지간에 무너져 버리는 것이 우리 육신입니다.

그런데 허망한 이 몸뚱이를 내 것으로 믿고 정신없이 욕락 채우며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이요,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그러나 미혹한 중생도 한마음 돌리면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같습니다.

깨닫고 나면 또한 모든 것이 한 자리인 것입니다.

옛날 임제 스님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고 묻자 “여기 법문을 듣는 여러분이 바로 부처다”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몸뚱이를 나로 보지 않고 말을 듣고 있는 그 자리를 바로 볼 것 같으면 여러분이 곧 부처라는 말씀입니다.

부처는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그런 번뇌 고통과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성인이라고 해서 우리와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불성(佛性)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부처입니다.

멱도불견도(覓道不見道)하고도두환자오(到頭還自懊)니라.

약욕탐멱도(若欲貪覓道)인데행정즉시도(行正卽是道)로다.

(도를 찾아도 도를 보지 못하나니도리어 스스로 고뇌만 하는도다.

만약 애써 도를 찾고자 한다면행동의 바름이 바로 도이니라.

)

그냥 저냥 한세상 보내다 보면 세월은 금방입니다.

눈은 곧 침침해지고 무릎은 이내 아파옵니다.

요즘 사람들은 인스턴트 음식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젊은 사람들도 힘이 없습니다.

청춘인 것 같지만 이내 가을이 오고 조금 있으면 조석으로 추워집니다.

머리에 희끗희끗 내린 서리를 보며 내가 어떻게 세월을 보냈는가 생각하면 후회 막급입니다.

내 면목 모르고 살아온 시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죄 아닌 것이 없습니다.

말 속에 살다보니 거짓말 안할 수 없고, 결혼해 살다보니 애욕에서 벗어날 수 없고, 목숨 유지하려니 다른 생명 죽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죄입니다.

평생을 캄캄한 어둠속에서 지내다 머리에 서리이고 나이 먹어 이렇게 법회에 참석해 법문을 들으니, 그 마음이 어떻습니까! 이제 와서 통곡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이며, 후회한들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견성하는 자리를 알고자 할진데 행정(行正)이 즉시도(卽是道)니라.

바른 것을 행하는 것이 바로 도니라.

그러면 바른 것이 무엇이냐.

남의 선악시비를 보지 않는 것이 바로 도입니다.

미움과 사랑도 끊어야 합니다.

햇볕이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더러운 것이나 깨끗한 것이나 가리지 않고 비추듯이 우리의 참된 마음 자리도 이와 같습니다.

증애(憎愛)나 취사(取捨)나 호오(好惡)와 같은 분별하는 마음 없이 모든 것을 평등하게, 둘이 아닌 몸으로 볼 때 그것이 바른 마음입니다.

그것이 또한 도입니다.

여러분이 바른 마음에 처할 것 같으면 어둠이 사라지고 보고 듣는 그 자리가 본래 면목임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그 자리는 온갖 욕심이 끊어진 자리로 중생에 대한 한량없는 자비가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대자대비입니다.

부처님은 일체 중생을 내 몸과 같이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약무정심(自若無正心)하면암행불견도(暗行不見道)니라.

약진수도인(若眞修道人)인데불견세간우(不見世間憂)니라.

(스스로에게 바른 마음 없으면어둠 속 길이라 도를 보지 못하리라.

만약 참으로 도를 닦는 사람이라면세간의 어리석음 보지 않느니라.

)

스스로 닦는 각고의 노력이 없다면 암행불견도(暗行不見道)입니다.

어둔 길을 가는 것과 같아 진면목을 체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견도(不見道)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 옛 일을 한번 회상해 보십시오.

지난날의 고통들이 하나 둘 떠오를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싸워서 상처받고 업신여김 당하고 일이 잘못돼 좌절하기를 얼마입니까.

세상에 나오는 것도 고통이고 죽는 것도 고통이고, 병든 것도 고통입니다.

다치면 어떻게 됩니까.

몸뚱이가 온통 고통의 덩어리임을 사무치게 깨닫습니다.

이런데도 우리는 도 닦을 생각을 못합니다.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인지 전혀 모른 채 얼마나 캄캄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까.

이 몸 또한 내 것이 아니어서 죽으면 사대로 흩어집니다.

모든 것이 인연따라 와서 인연따라 흩어질 뿐입니다.

밤길을 가는 것처럼 우리는 영원한 행복의 길이 있음에도 이를 모르고 진리에서 빗겨나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도를 닦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불견세간우(不見世間憂)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보지 말아야 합니다.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심이 타인에 대한 증애심을 일으키고 허물을 찾게 합니다.

그러나 만약 남의 허물을 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분별심이 사라집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것은 세상의 허물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남의 허물을 보다 보면 진심(嗔心)이 일어납니다.

진심이 일게 되면 결국 육체가 병들어 무너지고, 마음 또한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됩니다.

옛 조사님들은 그래서 남의 허물 보지 말고 다만 나의 허물을 잘 살필 것이며, 산란한 마음을 화두로 돌이켜서 ‘이뭣고’, 즉 ‘이것이 무엇인가’를 참구하라고 일렀습니다.

이것이 몰록 깨닫는 길입니다.

이것이 돈점법입니다.

누구에게 많은 돈을 받으면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것이 세상 인심입니다.

그러나 돈점법은 돈과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가치가 있습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인연 다하면 모두 사라집니다.

그러나 돈점은 받아 가지면 그것으로 영원입니다.

금생에 닦지 않고 헛되이 보내면내생에 고통 다시 시작돼

합천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이 있습니다.

시골 노인들이 부처님의 보물 중에 보물이라는 소리를 듣고 찾아옵니다.

그런데 대장경을 친견하고 난 소감이 재미있습니다.

특히 할머니들은 ‘대장경이 꼭 빨래판 같다’ 이렇게 말 합니다.

사람에 따라, 보는 각도에 따라 평가는 달라집니다.

서예를 하거나 서각을 하는 이들이 봤다면 글씨로 평가 했을 것입니다.

좋은 법문도 사람에 따라 이해하는 정도가 다릅니다.

좋은 법문도 알아듣지 못하고 믿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지혜가 있고 선근이 있는 사람이 해탈의 문을 바로 찾아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늙어갈수록 열심히 수행해, 내 면목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임종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습니다.

깨닫지 못했는데 자식을 아무리 잘 키운들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깨달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번뇌가 사라집니다.

‘이 뭣고’ 한번 잘하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을 갖게 됩니다.

물론 수행이 쉽게 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쁜 생각하고 탁한 음식 먹으면서 공부한다고 해봐야 되질 않습니다.

이럴 때는 먼저 올바른 신행생활이 선행돼야 합니다.

제가 기운을 좀 볼 줄 아는데, 어떤 탁한 이들이 모여 있어도 천수경을 독경하고 나면 법당에 깨끗한 기운이 가득 찹니다.

탁한 기운이 싹 사라져 버립니다.

왜 일까요? 다리니는 바로 불보살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경을 하게 되면 청정한 마음의 자리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서 좌선을 하면 두개의 날개를 단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해야 공부가 잘 됩니다.

절에 와서 기도도 하고 참선을 하면 죄업이 녹으면서 참 행복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생에 와서 닦지 않으면 다음 생에도 고통 받는 삶은 계속됩니다.

이 법을 만났을 때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내 일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일입니다.

자.

정신을 바짝 차려서 이 법 만났을 때 열심히 수행 합시다.

여러분이 으뜸가는 수행인이 될 것 같으면 그 공덕으로 가정이 평안하고 사회가 평안하고 세상이 조용할 것입니다.

도만 가지고 있으면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신령스럽고 밝은 중생의 근본 자리요.

천지의 근원자리요.

본래 면목자리로 둘이 아닌 자리.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한량없는 이 세계도 모두 그곳에서 생겨납니다.

믿기 힘들겠지만 그러나 믿으십시오.

이것은 진리이고, 또한 거짓 없는 진실입니다.

今生若不從斯語 (금생약부종사어)하면後生當然恨萬端 (후생당연한만단)하리라.

금생에 이 말을 믿지 않고 세상을 헛되이 보내면 그 한은 말로 할 수 없으리로다.

정리=김형규

월운스님─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난 불자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난 불자다

봉선사 조실 월 운 스님

7월 백중을 앞두고 49일 기도에 입재하여 여러 큰 스님들을 청해 법문 듣는 불자님들 참 장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두어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 불제자이시죠? 이 나라에 200년 전에 기독교가 들어왔는데, 당시만 해도 기독교 믿는 사람들은 죽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보면 200년 전에 들어온 기독교가 이 땅의 주인이 되고 우리 불교가 변두리를 헤매게 생겼습니다.

불교가 무엇을 하려해도 손발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러다 불교 믿는 사람은 취직도 못하고 승진도 못하게 될까 걱정입니다.

옛날에 기독교를 탄압할 때 기독교인들은 “죽여라”하고 맞섰습니다.

그렇게 했습니다.

잘 한건 잘했다고 해야죠.

장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만약에 “불교 믿는 사람들은 싹 죽여라”하면 여러분들 중에 “죽여라, 나는 죽어도 불교다”라고 할 수 있는 분들 손들어 보세요.

내가 불교 신자라는 이유 때문에 나를 죽인다고 할 때 내가 불교를 버릴 것인지 아닌지.

내가 믿는 불교를 나의 운명과 같이 생각하고 이 불교의 이름으로 사회가 맑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불교가 잘못되는 것을 걱정하고 바르게 나갈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불교가 잘못되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믿는 것에만 그친다면 불난 대궐 처마 밑에 제비가 집을 짓고 앉아 깔깔거리며 새끼들과 노래 부르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독교에 밀려 불교 변두리로

기독교나 무속이나, 회교나, 힌두교 같은 이런 종교들에서는 신에 대한 믿음을 강조합니다.

나는 신의 피조물이고 신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생명과 행복은 신의 뜻이니 당신이 알아서 처분하라고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종교들은 ‘의타신앙’이라고 하고 이런 종교의 교역자들은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 말만 믿고 재산도 맡기고 가정도 버리고 가는 그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나 말고 나를 구제해줄 사람이 따로 있으니 그분의 눈에 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타신앙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인간이 왜 괴로운가, 왜 죽을 때 고통을 받는가”를 알기 위해 출가를 했는데, 당시 철학자나 수행자들을 만나서 물어보니 다들 “인간의 행과 불행은 창조주인 브라흐만에게 달려있는데, 그분의 노여움을 사서 불행해지는 것이니 그분을 즐겁게 해드려라.

재물을 바치고 제사를 올려라.”

하고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내 행복 내가 찾는게 불교

결국 인간의 행복을 인간 스스로는 해결할 길이 없고 신이나 법이나 군사력이나 왕의 힘이나 이런 것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청년 싯다르타는 “이것은 아닐 것이다.

나 아닌 누군가가 행복을 준다면 그 절대자가 기분이 상하면 행복을 안 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행복이란 내가 누릴 수 있을 때 누리고 거둘 때 거두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언제나 내가 지니고 있으며 내가 누릴 수 있을 때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내 스스로가 내 행복을 찾는 길입니다.

쉽게 말하면 순간순간 정신 차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렵게 얘기하니 깨달음인 것입니다.

마음 깨닫는 가장 좋은 방법은 법문 듣고 한 순간에 깨닫는 것이지요.

법문을 듣고 깨달아서 내가 한 순간 한 순간 양심에 걸림 없이 깨끗하게 살아가는 습관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도록 마음먹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제자의 자세입니다.

만약 내가 할 도리를 다했는데도 남이 나를 구박한다면 그 때는 그 사람이 바뀔 때 까지 기다려 주고, 또 날 보고 욕을 하더라도 그 사람이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보살의 길입니다.

그런데 생전에 이렇게 노력하고 참고 수행하지 않은 분들은 죽어서 좋은 데 가기가 참 어렵습니다.

오늘 백중 기도를 한다니까 조상을 천도하기 위해 효심을 갖고 오신 분들 참 고맙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여기다 뭘 올리면 부처님이 바로 극락으로 보내드린다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알고 오신 분들은 오늘 생각을 바꾸셔야 합니다.

영가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을 고치도록 해주는 것이 영가천도재입니다.

영가가 여태 고치지 못한 마음을 바꾸도록 해주는 것이 천도재이고 그것이 가능한 것이 또 부처님 법입니다.

49재를 계기로 해서 불자여러분들은 자신을 반성해야 합니다.

불교를 얼마나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지를 점검해 보세요.

첫째, 매일 눈뜨고 앉은 자리에서 관세음보살 세 번, 잠자리에 눕기 전에 관세음보살 세 번 부르세요.

바빠서 못하겠다는 사람은 거짓말입니다.

둘째, 계를 지키세요.

그런데 요즘 세상에 계를 다 지키기가 좀 복잡하니 한 달에 하루를 정해 그 하루만이라도 계를 지키세요.

고기를 먹지 말고, 술을 먹지 말고, 남편을 거사님 이렇게 불러보세요.

하루가 다 어려우면 한나절, 그것도 어려우면 하루 중 한 시간만이라도 계를 지키세요.

그게 안 된다면 불자가 아니라는 얘기에요.

하루 한 시간이라도 지계

셋째, 불자의 도리를 다 하세요.

부처님이 하고 싶었던 것은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각자가 마음, 정신 상태를 바르게 해서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어내는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보시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돕는 것입니다.

오늘 말로는 사회봉사입니다.

또 하나, 공동체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기독교는 이것이 아주 잘 돼 있습니다.

이게 안 되면 앞으로 불교는 정부에 건의 하나 할 수 없는 사회가 됩니다.

불교계에서 추진하는 일이 있으면 우리 모두가 동참하고 힘을 합쳐야 합니다.

부처님은 내가 교주요, 생명이요, 빛이요, 길이라는 말씀을 안 하십니다.

‘여래십호’라 하여 부처님은 당신 스스로를 길 안내자요, 나룻사공이요, 의사요, 길동무라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그 길을 한번 다녀온 길이고 제자들은 처음 가는 길이니 부처가 길을 안내해서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이끌어줄 것이지만 그곳에 어떻게 갈 것이며 가서 어떻게 할 것인지는 각자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결국 각자가 자신의 길을 가야하고, 열심히 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길 잘아는 안내자

불제자 한명 한명이 “불교 신자가 돼서 참 다행이다, 불자가되길 잘했다”고 기뻐하기위해서는, 치료 효험을 보기 위해 의사 말을 믿고 처방대로 실천하듯이 부처님 말씀을믿고 익히고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은 지금 선 자리에서 뭐가 잘못됐는지를 생각하고 다시 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요즘 즐겨하는 말이 ‘다시 생각하자’입니다.

길을 가다가 틀렸다면 어디서 틀렸는가를 잘 생각해서 틀린 부분부터 바로 잡아 다시 해야지 계속 틀린 길로 가면 안됩니다.

오늘 오신 모든 불자들의 원력으로 오늘이 한국불교 1600년 사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길 바랍니다.

불자들이 조상님들을 위해 진짜 해야 할 일이 뭐며, 그들에게 진짜 공양해야할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또한 무엇인지를 아셨을 것이라 믿으며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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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문은 7월 4일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인천불교회관(주지 일지 스님)에서 열린 백중 49재 8인 큰스님 초청 대법회에서 봉선사 조실 월운 스님(동국역경원 원장)이 백중기도2재에 동참한 대중들에게 설한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월운 스님은

동국역경원 원장으로 역경사업을 선두에서 지휘하고 있다.

현재 봉선사 조실로 주석하며 능엄학림을 통해 후학 양성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1949년 운허 스님을 은사로 득도해 1965년 조계종 역경위원에 선임됐으며, 1979년부터 1993년까지 중앙승가대 교수를 역임했다.

1993년부터 동국역경원장을 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종진스님─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해야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해야 해인총림 율주 종진 스님

地藏菩薩誓願力/지장보살서원력

(지장보살님 세우신 서원의 힘이여)

恒沙衆生出苦海/항사중생출고해

(갠지스강 모래같이 많은 중생 고통에서 구하시고)

十殿照律地獄空/시(십)전보율지옥공

(시왕전에서 재판을 밝게 비춰 지옥을 비우시며)

業盡衆生放人間/업진중생방인간

(업이 다한 중생들 인간세계 나가게 하시니)

莫言地藏得閒遊/막언지장득한유

(지장보살님 한가롭다 말하지 마시오)

地獄門前淚不收/지옥문전루불수

(지옥문 앞에서 눈물을 거두지 못하시네)

명부전 주련을 유심히 보신 분은 이 글귀를 금방 이해하실 겁니다.

사찰 참배하실 때 대웅전이나 선원 등의 전각에 쓰인 주련을 새겨보시면 공부하시는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사찰을 참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지만 주련 공부도 하시면서 순례하시면 더 재미있고 더 깊은 맛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지장보살님의 원력을 쉽게 말한다면 “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보다 더 편안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인생사가 어떠하십니까? 더우면 더워서, 추우면 추워서, 배가 고프면 배가 고파서, 배가 부르면 너무 배가 불러서, 이래도 저래도 고통입니다.

오죽하면 고통의 바다, 고해(苦海)라 하지 않습니까? 이런 중생을 위해 지장보살님은 서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크나 큰 원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원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고자 할 때 우리는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정성입니다. 정성은 한마음입니다. 예경드릴 때 ‘지심귀명례’ 그러죠? 지극한 마음이 한마음이고 한마음이 정성입니다. 정성스런 기도는 꾸준해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한 술 밥에 배부르랴’ 하는 말이 있죠? 한 번으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정성스런 기도를 한 후 결과는 말하지 마십시오.

지극정성으로 꾸준하게 기도를 하면 결과는 저절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이 밭을 매면서 밭고랑을 센다고 합니다. 노력은 손톱만큼 해 놓고 결과는 크게 바라는 것이 사람들의 심성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기도해 보아야 효험 없습니다.

기도는 죽은 사람도 살려

불교에서 기도를 제일 잘한 어른이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석가보살로 계실 때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었습니다. 순간, 그 부처님이 너무 거룩하셔서 신심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 몸에 충만해졌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부처님을 찬탄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기도를 하는데, 학처럼 다리 하나는 땅을 딛고 하나는 들고, 두 손은 합장을 하고, 눈은 부처님 얼굴만 주시 하고, 일주일 밤낮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용맹정진을 하신 공덕으로 무려 5겁이라고 하는 오랜 시간을 훌쩍 뛰어 넘어서 미륵보살보다 먼저 성불 하셨습니다.

울진 불영사 대웅전은 전에 ‘환생전’이라고 했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아주 어렵게 과거를 봐서 울진 군수가 된 사람이 취임 삼일 만에 갑자기 숨을 거둔 겁니다.

그 때 군수 부인은 장례를 치르지 않고 70m 떨어진 곳에 있는 불영사로 군수의 시신이 든 관을 모셔가 기도를 합니다. 자, 그 상황에서 누구를 미워한다든지 좋아한다든지 편안한 생각을 하겠습니까?

극한 상황에서는 모든 생각이 정지 됩니다. 오직 남편을 살려야 되겠다는 생각뿐입니다. 일념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니 그 염불소리가 얼마나 애절할 것이며, 정성이 얼마나 지극할 것입니까.

처음에는 스님들도 관속들도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 한 사람 감동을 하더니 나중에는 스님도, 관속들도 다 동참을 했습니다.

대중이 전부 한 몸, 한 마음이 되어서 기도를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삼일 후, 갑자기 관이 흔들리며 군수가 살아났습니다. 이 사실이 임금에게 보고가 되어 법당 이름을 환생전이라 하고 울진 군수가 며칠 동안 요양을 했던 방을 환희요라고 하사했다는 기록이 불영사 사적지에 적혀 있습니다.

이것은 죽었다 살아난 사람 이야기 입니다. 또, 중국의 예가 있습니다.

송나라 때 한 스님이 인물이 너무 못나고 목소리가 안 좋았다고 합니다.

화를 많이 낸 사람은 얼굴이 곱지 않습니다.

남 욕을 많이 하면 목소리가 안 좋습니다. 이 스님이 낮에는 관세음보살 앞에서 관음기도를 하고 저녁에는 절을 천 번씩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매일같이 20년을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얼굴이 변하고 음성이 변하더라고 합니다.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해서 한 절의 주인이 되어 무려 700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기도를 통해서 자기 운명을 완전히 바꾼 유형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한 예는, 중국 양나라에 지장이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삼업 깨끗해야 보살

재주가 있어서 젊을 때부터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관상을 보는 사람이 절에 와서 ‘스님은 3년 후에 죽는다’고 합니다. 그 때 스님의 세속 나이가 스물 아홉이었습니다. 스님은 고심 끝에 모든 제자들을 돌려보내고「금강경」을 3년간 불철주야로 독송했습니다.

관상 보는 이가 예견한 날 아침에 스님은 삭발을 하고 목욕을 깨끗이 하고는 죽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왕 가는 것 ‘좌탈하겠다’며 가만히 앉았는데 기다리고 기다려도 안 죽는 겁니다.

그 때 하늘에서 공청(空聽)이 들려왔습니다. “경전을 독경한 공덕으로 천수의 두 배를 살 수 있을 것이다.” 스님은 그로부터 정확히 6년을 더 살고 68세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이것도 지극정성의 기도를 통해서 수명을 연장한 예라 할 것입니다.

송나라 스님은 기도를 통해서 인물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지장 스님은 「금강경」 독경을 해서 수명을 연장했습니다. 그리고 울진 군수는 부인의 기도로 다시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이 세 가지 사례만 하더라도 일심으로 기도를 할 것 같으면 그 결과는 저절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할 때 조심해야 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신(身), 구(口), 의(意) 삼업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몸단속, 입단속, 생각단속을 잘 해야 합니다.

이것을 잘 한 분이 부처님이요, 관세음보살이요, 지장보살이요, 대세지보살이요, 문수보살이요, 보현보살입니다.

100일 동안 기도하면서 세 가지 단속을 잘 하십시오.

정성과 꾸준함으로 열심히 할 것 같으면 이루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게을러서 못할 뿐입니다.

환희심 충만해야 성취

범어사 산 이름이 ‘금정산’입니다. 감로수란 한 방울만 입에 들어가면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신비한 물이라고 합니다. 금정(金井)이 그 감로수가 담겨 있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그 물에 저 하늘 꼭대기에 있는 범천의 고기가 와서 놀았다고 해서 범어사입니다. 고기가 물에서 마음대로 헤엄치듯 살 수 있는 사람은 장애가 없는 사람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고통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고통이 없는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고통은 하나도 없고 행복만 받기 때문에 극락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구조적으로 장애가 있습니다. 그 장애를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괴로움을 가지고 왔습니다.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입니다.

부처님은 공부를 통해서 스스로 그 괴로움을 벗어 버린 분입니다. 인도는 우리 더위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덥습니다.

그런 곳에서도 온갖 괴로움을 이겨내서 대도를 성취해서 부처가 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원이라고 합니다.

이 시간부터는 첫째도 정성 , 둘째도 정성, 셋째도 정성입니다. 입조심, 몸조심, 생각을 조심하며 꾸준하게 기도를 해서 지장기도 회향할 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환희심으로 충만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원은 저절로 성취될 수 있습니다.

부산=주영미 기자

이 법문은 8월 2일 부산 범어사 설법전에서 봉행된 지장 100일 기도 및

고승초청대법회 여섯 번째 법석에서 해인총림 율주 종진 스님이 설한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종진스님

1955년 동화사로 출가해 1963년 해인사 승가대학을 졸업했다.

현재 해인총림 율원의 율주를 맡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법계위원이며, 법계위원회 의제실무연구회 의장을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