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스님─부처님만 생각하면 노랫말 저절로 나와

부처님만 생각하면 노랫말 저절로 나와 / 운문 스님

즐거운 노래를 많이 만들고 불러서일까? 서울 홍은동 운문사에서 만난 운문(雲門) 스님은 2년전 뵐때보다 더 해맑아 보였다.

동자승처럼 해맑은 모습에서 반평생을 수행하며 산 수행자다운 풍모가 물씬 전해왔다.

천진불심(天眞佛心) 그 자체다.

1월 12일 운문 스님은 함박 웃음으로 기자를 맞아 주었다.

굳이 바뀐 모습을 찾으라면 오히려 좋아진 건강때문에 보다 의욕적으로 변한 것이다.

“아, 뭐하러 또 왔어, 그동안 내 얘기를 너무 많이 해 독자들이 지루해 하지 않을까?” “스님 근황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에요”라며 기자는 스님의 기우를 풀어드렸다.

지난해 9월 스님은 30여년동안 주석했던 구기동 운문사를 떠나 홍은동에 조그만 빌라를 빌려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삼보불교음악협회가 올해말부터 구기동 운문사에서 불교음악역사관을 건립하기 때문이다.

“법당은 똑같아.

수행자에겐 처처(處處)가 법당 아니겠어?” 스님이 거처하는 빌라에서 이틀간 스님과 생활해 보니 새벽 4시 아침 예불을 시작으로 점심과 저녁때도 예불을 모시며 사찰에서와 다름없는 일과였다.

“난 일상이 단조로워, 점심 공양하고 집앞 공원에 나가 포행하는 것 빼놓곤 거의 두문불출이야.

법당에서 예불모시고 관음정근하고, 노랫말 만드는 것이 다지” 스님은 그랬다.

저녁 공양후엔 노래 가사를 쓰셨다.

40여년간 1천여곡에 달하는 찬불가를 만들었지만 아직도 찬불가포교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요즘들어 쓰여지는 노랫말이 더 가슴에 와 닿아.

인생을 회향할 나이가 돼서 그런지 이제야 비로소 찬불가가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아.

기자양반도 알듯이 내가 건강이 무척 안 좋았잖아.

그런데 왠일인지 지난해부터 차츰 회복돼 지금은 아주 좋아졌어.

더 좋은 노랫말을 만들고 회향하라는 부처님 뜻으로 믿고 노랫말 만드는 일에 더 정진하고 있어.”

이틀동안 지켜보니 스님은 대부분의 시간을 키보드 앞에 앉아 가사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자신이 좋아하지 않으면 정말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팔순을 코 앞에 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스님은 열심이었다.

빼곡히 정리해 놓은 오선지 위에 채워져간 노랫말은 200쪽 분량의 책으로 묶어도 족히 서 너 권이 넘었다.

대부분 요새 쓴 것이다.

오히려 작곡가들이 스님의 노랫말을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할 정도다.

“지난해 말 원고를 넘겼으니 올 6월안으로 내 가사집이 새로 만들어 질거야.

예전에는 가사쓰고 어디 놔 두었는지 모를정도로 정리를 안 했는데, 지난해 몇 달동안 차곡차곡 정리해 출판사에 넘겼어.

불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거야.”

그런 왕성한 창작의 샘물이 어디서 뿜어져 나오는 것일까.

스님은 한마디로 원력이라고 말했다.

“내가 평범한 일반 가요를 만드는 작사가였다면 아마도 이렇게 많은 곡들을 세상에 내놓지 못했을 거야.

평생 번뇌로 방황하는 대중들에게 부처님의 감로수 같은 진리를 쉬운 노랫말로 바꿔 주어야겠다는 원력이 지금까지도 찬불가를 만들게 하는 힘이 되었고 개인적인 수행의 방편도 됐지.”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의 이런 발원과 노력이 불자들에게 전해져 찬불가 한두 곡씩은 부를 만큼 포교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스님은 배가 고프시단다.

“물론 과거에 비해 불자들의 입에서 찬불가가 자주 불리워지는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아직도 법회의식이나 특정 무대가 주를 이루고 있지.

찬불가의 역사도 거의 반백년을 넘어서고 있는데 법회 뿐만 아니라 집에서 생활할 때나 아니면 불자들이 야유회 갈 때도 자연스럽게 불리워 졌으면 좋겠어.”

신기한 것은 제대로 음악교육을 받은 이들도 작사·작곡은 쉽지 않은 일인데 운문 스님은 음악교육을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전문적으로 음악교육을 받은 사람들에 비하면 분명 실력 차이가 많이 나겠지만 불교음악은 실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야.

부처님을 찬탄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하며 가슴에 깊이 새기면 누구든지 좋은 가사를 만들 수 있어.

이건 내 경험에서 비롯된 거니까 불자들에게도 한번 해보라고 권하고 싶어.

부처님만 생각하면 저절로 환희심이 넘쳐 가슴 속에서 노랫말들이 저절로 튀어 나오더라구.”

수북이 쌓여 있는 찬불가 원고 뭉치를 보며 깨달았다.

처음 찬불가 운동을 시작했을 때나 회향할 시기인 지금이나 자신의 원력을 위해 초심을 잃지 않는 여여한 모습이 바로 저런 것임을.

그런 모습 속에서 또하나의 가르침도 배웠다.

새해에 우리가 세운 모든 계획을 연말까지 여여하게 실천하라는 무언의 가르침.

운문 스님은 현재 ‘부처님 일대기’ 등 장편곡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결과 집착말고 과정 즐기세요 운문 스님의 가르침 나는 틈날 때마다 청소년 불자들에게 공(空)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예화를 통해 쉽게 설명해 주려고 노력합니다.

성인불자들에게도 어려운 얘기지만 어릴때부터 자꾸 듣다보면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깨우칠 것 같다는 생각에서지요.

불교에서 공사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공사상의 이치를 깨닫치 못하는 사람이 불자들중에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스님은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과정을 즐기라고 말한다.

일체 만법은 인연에 따라 생겨나서 인연이 끝나면 사라져 버립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실체(實體)가 없지요.

이것이 공의 기본 이치입니다.

우리 인간사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인연의 모임으로 태어나서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거치면서 조금씩 변화하다가 마침내 인연의 모임이 끝나면 본래의 자리인 죽음으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하지만 공을 잘못 생각하면 허무하다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허무는 공에 대한 편견에 불과합니다.

공의 이치를 깨달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진실한 가치의 발견을 위해서입니다.

모든 사물을 영원한 것처럼 집착하는 데서 비극이 생겨나니까요.

그래서 이 집착을 깨뜨리기 위해선 잠시 인연에 의해서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져 버리는 공의 이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새해부터는 우리 불자들이 정말 계획이나 결과에 집착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요즘 내 자신을 돌이켜 보니 1천여곡에 달하는 무수한 곡들도 찬불가 포교에 대한 집착에서 나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차피 대중들에게 회자되다가 허공속으로 사라지는 노래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노랫말을 탄생시키는 결과에 집착하기 보다는, 그 과정을 즐깁니다.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만든 노랫말이 대중들에게 불려지면서 같이 즐거워지길 바랍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노랫말도 더 많이 만들어 지는 것 같아요.

세상이치가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왜 ‘열심히 하다보니 저절로 유명해 졌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떤 결과나 현상에만 집착하면 오히려 그 뜻을 더 쉽게 이룰 수가 없어요.

새해에 내가 무엇을 하겠다, 꼭 이루겠다는 계획을 누구나가 두세가지씩은 세워놨을 것입니다.

반드시 이루려면 오히려 모든 것을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몰두하고 그것을 즐기십시요.

예컨대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일이면 일,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그것들을 즐기십시요.

그러다보면 자신이 목표한 결과에 성큼다가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해부터는 기도 못지 않게 찬불가도 큰 소리로 목청껏 불러 주었으면 합니다.

찬불가를 듣고 부르는 일 또한 사찰에 나가 법문 듣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신행 생활이지요.

찬불가는 다른 노래처럼 단지 멜로디가 좋아 듣는 것이 아니라 그속에는 부처님이 설한 진리의 말씀이 녹아 흐르기 때문에 흥에 겨워 듣고 부르다 보면 어느새 법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가사를 짓는데 있어 내 개인적인 감정보다도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말씀을 노래로 잘 옮길 것인지 고민을 많이 합니다.

노랫말을 짓기전에 경전과 게송을 갖다 놓고 공부합니다.

그래서 조사스님 게송을 인용해 지은 곡들도 몇곡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찬불가의 가사를 열심히 되새기며 부르는 것도 경전공부를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왜 찬불가를 새해부터는 목청껏 부르라고 했는지 이제 알겠지요?

그리고 하나 더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꼭 화두를 하나씩 가지라고 말입니다.

특히 나는 가사가 안 써지거나 마음이 안잡힐 때면 화두인 ‘이뭣고’를 잡고 참선을 합니다.

화두는 바로 깨달음을 열어주기 위한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는 수단이지요.

스님이 좌선을 하고 참선을 할 때만 던지는 물음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수학문제라든가, 과학문제, 또는 수수께끼 같은 문제도 일종의 화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단지 지식이나 경험에 의해 해결되는 문제이지 인생의 본질에 대한 문제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문제가 풀렸다고 해서 인생의 문제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화두하고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나 불교의 화두는 인생의 본질, 즉 마음을 해결하는 문제 제기로서, 이것은 오히려 지금까지 배우고 익혀온 모든 지식이나 경험들을 내던짐으로써, 지식으로 인해 가리워졌던 자신의 본 마음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사바세계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은 마음이 앞장서 일어난 것이고 마음에 의해서 이뤄지기 때문에 본 마음자리를 찾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들도 인생의 큰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것에만 골머리를 썩히지 말고, 오히려 그 문제를 떠나 화두를 잡아 보세요.

정신이 맑아지면 오히려 난관을 헤쳐나가는 지혜도 열립니다.

또한 우리가 아무리 부처님을 위해 보배의 탑을 가득히 쌓고, 불전에 많은 공양과 예배를 올린다 해도 부처님께서 중생 교화를 위해 세우신 큰 서원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큰 빚을 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시대 감각에 알맞는 포교방안을 수립해 젊은 청소년을 교화 육성하고 불교의 생활화, 대중화, 현대화에 힘쓰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정리=김주일 기자

운문 스님은

1928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다.

1944년 망월사서 인곡스님을 은사로 득도했으며, 1953년 해인사 전문강원을 수료했다.

1956년 여수 흥국사 주지를 거쳐 1963년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1971년 조계종 총무원 재무부장을 지냈다.

청소년 포교에 큰 뜻을 둔 스님은 1966년 청소년교화연합회를 창립했고, 64년에는 불교동요집을 발간했다.

이후 40여년동안 1천여곡에 달하는 찬불가(찬불동요 포함)를 만들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제 1회(1987)와 제 3회(1990) 조계종 포교대상을 두 번씩이나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 스님은 삼보불교음악역사관 건립 때문에 잠시 구기동 운문사를 떠나 홍은동 운문사에 주석하고 있다.

해월스님─스님을 보지 말고 법을 보세요

스님을 보지 말고 법을 보세요

-해월스님-

스님들 가운데에는 대단히 존경받을 만한 수행과 원만한 덕성을 지니신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스님을 존경하는 불자들이 모여 스님을 스승으로 삼아 공부 방법을 지도 받고 같은 도반들이 모임을 만드는 등 스님의 사후에도 자신들의 스승을 자랑스러워 하며 추모하고 그 뜻을 펴고자 애를 쓰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성향 가운데서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부지불식간에 스님과 우리라는 하나의 관계가 맺어 지다 보면 그것이 공부의 큰 힘을 얻는 계기도 되려니와 오히려 반대의 효과도 나타날수있는 것이어서 부처님조차도 부처를 보려 말고 법을 보라고 제자들에게 간곡히 이르시는 것입니다.

스님을 존경하고 공경하는 것까지는 나무랄것이 없지만 잘못하다 보면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얻어야 하는 깨달음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자기 환상 속에서의 만족에 그치기 쉽다는 말이 됩니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박칼리라는 나이 많은 제자는 임종에 이르러서도 깨달음은 얻지 못하고 마지막 소원으로 죽기 전에 부처님의 육신을 한번이라도 뵙는게 소원인 제자였답니다.

부처님은 그 말을 듣고 가셔서 위로하시며, “그대가 보고자 하는 부처의 색신인 이몸은 언젠가 소멸되어 가는 허망한 것이라.이 허망한 몸울 보기를 원하기보다 법을 보는 것을 원하는 것이 더 좋으리라.

나를 보려면 법을 볼것이요.법을 보는 자는 곧 나를 본것이니라.”하고 간곡히 이르시는 가르침을 듣고 박칼리는 마침내 그동안 이르지 못했던 마지막 깨달음의 관문을 넘어 섭니다.

부처님처럼 위대한 스승께서도 당신의 몸을 보려는 자는 법을 보라는 말씀으로 완곡하게 부정하신 스승의 몸이신데, 후대로 이르러 우리는 법을 보는 것보다 색신으로나 음성으로의 부처와 스승을 구하는 경향이 많아진 것이 사실상의 현실입니다.

그렇다 보니 내 스승 우리 스승 내절 우리 절이라는 구분이 없어도 안될것이지만 굳이 법을 보는데는 그다지 도움이 안되는 분리된 의식 속에서 법을 따라 배우려는 노력과 공부보다는 모습과 무늬만 불자인 경우가 늘어만 갑니다.

이것은 스님들도 만찬가지 경향입니다.

처음에는 공부를 탁마하는 문중이나 도반으로서의 친목을 겸한 모임이 시간이 지나면서 애초의 목적한 바는 외면한 채 세력을 형성하거나 무슨 무슨 단체로 형질 변경을 하여 마침내는 돌이키기 어려운 정황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조금 지나친 말로 열반당 도깨비라는 말이 있는데 절집의 언저리에서나 큰 스님의 주위를 맴돌며 주워 듣고 보고 아는 것은 적지 않아서 사중의 일이든 대중의 일이든 자리만 있으면 옳은 소리는 혼자 다 하면서도 마음 속 어둠은 제거하지 못해 오히려 대중의 화합을 방해하고 자기 공부는 뒷전이면서 그 입에 오르내리는 바른 신심을 가진 불자나 스님들은 온전히 몸을 보전하기 힘들 정도로 입심은 대단합니다.

부처님이 나를 보려거든 법을 보라하신 말씀도 만약 박칼리의 요청에 부처님이 시간이 안되어서라거나,멀리 게신 까닭에 찾아 위로하지 못하였을 경우에 박칼리는 잘못된 생각에 자신을 찾아 주시지 않은 부처님에 대한 서운함으로 돌아 간다면 박칼리에게 금생 혹은 다음 생에의 공부에 막대한 지장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기에 부처님은 애써 박칼리에게 말씀 하시는 것을 빌어 오늘날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보려 말고 법을 보거나 법을 보려 노력하는 삶을 살라 하신것입니다.

믿음이란 참으로 삶의 이정표 같은 것이어서 바른 믿음을 이루어야만 자신과 상대를 이롭게 하는 것이니 우리 자신의 믿음을 한번 정도 되돌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불법佛法입니다.

스님들은 다만 불법이라는 보물이 있는 곳을 가리켜 주는 이정표에 불과하다고 스님들을 생각하면서 그 수고에 감사하고 공경하는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요즘처럼 스님들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마음 속에 깊은 신심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는 방법이라는 것이 이미 부처님과 박칼리와의 만남 속에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이정표를 감싸 안고 고마워하며 목표를 설정하는 지도가 아무리 감사해도 그것만 안고 있다가는 모두 헛일입니다.

이 말에 조금은 어패가 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우리는 승가를 삼보의 하나로 여겨 귀의의 대상으로 삼고 부처님과 법과 승가를 동일선상에 놓는데 주저하지 않는데, 지금 스님의 말은 스님들을 믿음과 귀의의 대사에서 제외하란 말인가 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는데, 다만 귀의의 대상이 될수 있는 승가가 아닌 무늬와 모양이 스님인 스님들의모습 때문에 자칫 법을 보아야 할 신심있는 대중들의 마음에 상처가 생김을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공부에는 출가와 재가가 없습니다.

또한 승가라는 말도 출가 승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재가 대중들도 승가의 중요한 일원입니다.

그런데 승가의 일원인 재가 대중들은 자신의 가정이나 가족 직장들을 경영하면서 수행이라는 과정을 복수적으로 실천해야 하니 일반 사람보다는 두배 세배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여간해서는 목적을 이루기 쉽지 않지만 일단 한 고비를 넘으면 이사무애하고 이사겸전한 도리로 두가지를 두루 완수 할수 있는 기회가 뒤따릅니다.

스님을 보지 말고 법을 보십시요.

이렇게 말할수밖에 없는 현실이 조금 슬퍼지만 그래도 법을 아는 사람은 사람의 모습에 있어서 불편한 점이 보이더라도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자칫 스님은 절대적으로 믿고 정작 법을 구하는 일은 소홀히 하다가는 우리 아난 존자처럼 사십여년을 모시면서 부처님의 그림자와 같이 머무르고 되새겨 말씀 하시는 녹음기는 될지언정 법을 깨달음은 요원할수 있습니다.

아마 아난 존자는 부처님을 향한 지극한 사랑과 공경같은 해바라기가 오히려 장애가 되어 깨달음을 부처님 열반 후에 증득하셨다 전하는것도 우리에겐 진정한 공부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가르치시려는 선사 스님들의 방편과 지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절에 평생을 살거나 다닌다해도 법을 깨쳐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도량내에 평생을 뿌리내려 사는 나무와 바위에 다름없음을 생각해 시비에 휘말리지 말고 모양 만드느라 애쓰지 말며 다른 사람의 삶에 호오好惡를 논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바로 보고 법을 깨닫도록 정진하여 가십시다.

매초롬하니 법복 곱게 빼어 입어 외양은 아름다운 보살인데 속 마음은 야차 나찰과 진배없다면 법복이 아깝다 소릴 듣지 않겠습니까.

부처를 보려거든 법을 보라 법을 보는 이가 부처를 본것이라 하시는 부 처님 말씀을 머리에 새기는 날입니다.

석주스님─화해(和解)의 길

화해(和解)의 길

-석주스님-

세상이 시끄럽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신문, 라디오, TV에서 종일 떠들어 댄다.

무슨 할말이 그렇게도 많은지? 어디 그것 뿐이랴.

자동차의 소음공해, 거칠어진 인간들의 다투는 듯한 소리, 여기를 가도 저기를 가도 TV, 라디오의 고음(高音)은 귓전을 때린다.

이 소리의 소음공해속에서 정신이 메말라진 우리들은 시달리고 지치고 그러다가 대립하고 투쟁하면서 한도 끝도 없는 인생을 되풀이만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 슬퍼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누가, 도대체 무엇이 이 대립과 투쟁의 불연속선을 그리게 했는지 생각해야 한다.

정녕코 대화합(大和合)의 장은 우리시대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인지를 진지하고도 깊은 사색을 통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

참다운 인간상의 개발없이 감관(感官)에 지배된 욕망의 세계에 휘말리고 그 욕망은 기술과 생산에 촉진제가 되어 현대와 같은 물질적인 번영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생산의 증대와 물질적 풍요가 우리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행복을 가져왔고 평화스러운 사회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산업사회의 발달과 부(富)의 축적은 인간의 욕망을 더욱 자극시켰고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 사고를 더욱 팽창시켜 오늘의 이 귓전을 따갑게하는 소음을 만들지는 않았는지 우리 모두 깊게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산업의 발달은 밑도 끝도 없는 경쟁사회로 치닫게 만들었고 자원과 자연을 고갈시키고 인간 사회의 투쟁을 유발시켰다.

좌절, 불만, 공포는 더욱 우리와 가까워지고 모든이익, 모든 부(富)의 축적은 이기적으로만 사용되고 있는 형편이다.

자신만의 편리를 위하여 쓰여지기를 갈망하는 각종 편견과 아집 대립과 투쟁으로 우매한 인간군상들은 더욱 참담한 현실에 빠져든다.

생각만 해도 암울한 일이다.

이러한 잘못된 사고의 관념을 만들고 그릇된 생각을 만족시키고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서로는 야합하고 비리를 생산해 낸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거침없이 저질러지는 세태속에서 우리들의 화합은 깨지고 평화는 인간 자신에 의하여 위협당하고 파괴되고 있다.

인간(人間)의 삶의 현장은 전쟁터가 돼버렸다.

인과법(因果法)을 진정으로 이해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의 그릇된 생각은 투쟁과 갈등, 상대를 무너뜨림속에서 자신이 살수 있다는 경쟁적인 사고로 팽창돼 있다.

그것은 혼란만을 가속화 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과 투쟁을 극복하려면 대화합(大和合)을 지향하는 부처님의 연기설(緣起說)을 받아들일 때 지리한 장마도 서풍에 물러 갈 것이며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새로 우리는 푸른 하늘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있음에 의하여 저것이 있고, 저것이 멸함에 이것도 멸한다]는 모든 존재가 존재로서 존립(存立)하고 유지되는 참 모습을 그 근원적인 입장에서 밝힌 부처님의 가르침 즉 이것과 저것, 나와 너 사이가 아무런 관계없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우면서 유지되고 발전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와 현상은 종, 횡으로 직접, 간접으로 서로서로가 상의상자(相依相資)하는 관계성을 맺고 있다는 인과(因果)의 법칙성을 믿을 때 상호 무관한, 그리고 뜨거운 연관관계 속에서 생성 발전의 원리가 된다.

연기적 눈으로 보면 자연의 한 부분이 파멸될 때 다른 나머지 부분도 파멸할 조건을 유발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의 파괴가 저것의 파괴요, 그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기에 너와 나의 협력과 모든 것과의 조화야말로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비결 이다.

연기적 도리에 어두워 자기만을 고집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내세워 온갖 편견과 대립을 유발시키면 그것은 불타는 욕망과 결부하여 끝내 파멸의 구덩이로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일체의 모든 존재양상이 연기적으로 화합된 것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아무것도 없다는 진실앞에 우리는 서야한다.

무자성(無自性)이요, 무실체(無實體)요, 무실체(無實體)이기에 무아(無我)인 것이다.

모든 존재는 오직 인연소생(因緣所生)이며 연기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연기(緣起)는 자기 중심주의 독단과 편견을 파사(破邪)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모순과 편견의 갈등 속에서 업(業)을 쌓고 너의 파멸은 나의 승리라고 착각하는 중생의 슬픈 존재 양상을 보시고 부처님께서는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 유(有)와 무(無), 단(斷)과 상(常)이라는 대립된 두 견해를 완전히 극복할 원리를 제시했다.

그것이 중도(中道)다.

모든 존재는 여러가지 인연이 화합되었기에 고정불변한 실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비유(非有)와 비상(非常)이다.

불무(不無)요 부단(不斷)이오, 유(有)와 무(無), 단(斷)과 상(常)이라는 대립된 개념의 극복과 나아가 그 원인까지도 해결해 버리는 뜻으로서의 극복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중도원리(中道原理)는 인생과 우주의 보편적 원리로서 삶과 죽음, 괴로움과 즐거운 등 일체의 모순과 대립을 원천적으로 해결해 준다.

그리하여 악을 선으로, 모순을 조화로 대립을 협동으로 무지를 지혜로 승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부처님의 중도사상은 상호협조와 평화적 공생공존(共生共存)의 실천 원리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위대한 가르침을 체득하여 마음의 평화 나아가 이 세상 모든 것들과의 조화된 모습으로 자신을 세워야 한다.

이기적인 욕망의 쇠사슬을 끊어버리면 행복의 삶이 성취된다는 교훈을 따라 이제 우리 모두는 동체대비의 정신으로 서로를 미워하지 말아야 하겠다.

서로를 경쟁의 상대로 생각지 말아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극단을 버린 중도(中道)의 연기(緣起)정신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꼭꼭 새겨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