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만 생각하면 노랫말 저절로 나와 / 운문 스님
즐거운 노래를 많이 만들고 불러서일까? 서울 홍은동 운문사에서 만난 운문(雲門) 스님은 2년전 뵐때보다 더 해맑아 보였다.
동자승처럼 해맑은 모습에서 반평생을 수행하며 산 수행자다운 풍모가 물씬 전해왔다.
천진불심(天眞佛心) 그 자체다.
1월 12일 운문 스님은 함박 웃음으로 기자를 맞아 주었다.
굳이 바뀐 모습을 찾으라면 오히려 좋아진 건강때문에 보다 의욕적으로 변한 것이다.
“아, 뭐하러 또 왔어, 그동안 내 얘기를 너무 많이 해 독자들이 지루해 하지 않을까?” “스님 근황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에요”라며 기자는 스님의 기우를 풀어드렸다.
지난해 9월 스님은 30여년동안 주석했던 구기동 운문사를 떠나 홍은동에 조그만 빌라를 빌려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삼보불교음악협회가 올해말부터 구기동 운문사에서 불교음악역사관을 건립하기 때문이다.
“법당은 똑같아.
수행자에겐 처처(處處)가 법당 아니겠어?” 스님이 거처하는 빌라에서 이틀간 스님과 생활해 보니 새벽 4시 아침 예불을 시작으로 점심과 저녁때도 예불을 모시며 사찰에서와 다름없는 일과였다.
“난 일상이 단조로워, 점심 공양하고 집앞 공원에 나가 포행하는 것 빼놓곤 거의 두문불출이야.
법당에서 예불모시고 관음정근하고, 노랫말 만드는 것이 다지” 스님은 그랬다.
저녁 공양후엔 노래 가사를 쓰셨다.
40여년간 1천여곡에 달하는 찬불가를 만들었지만 아직도 찬불가포교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요즘들어 쓰여지는 노랫말이 더 가슴에 와 닿아.
인생을 회향할 나이가 돼서 그런지 이제야 비로소 찬불가가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아.
기자양반도 알듯이 내가 건강이 무척 안 좋았잖아.
그런데 왠일인지 지난해부터 차츰 회복돼 지금은 아주 좋아졌어.
더 좋은 노랫말을 만들고 회향하라는 부처님 뜻으로 믿고 노랫말 만드는 일에 더 정진하고 있어.”
이틀동안 지켜보니 스님은 대부분의 시간을 키보드 앞에 앉아 가사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자신이 좋아하지 않으면 정말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팔순을 코 앞에 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스님은 열심이었다.
빼곡히 정리해 놓은 오선지 위에 채워져간 노랫말은 200쪽 분량의 책으로 묶어도 족히 서 너 권이 넘었다.
대부분 요새 쓴 것이다.
오히려 작곡가들이 스님의 노랫말을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할 정도다.
“지난해 말 원고를 넘겼으니 올 6월안으로 내 가사집이 새로 만들어 질거야.
예전에는 가사쓰고 어디 놔 두었는지 모를정도로 정리를 안 했는데, 지난해 몇 달동안 차곡차곡 정리해 출판사에 넘겼어.
불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거야.”
그런 왕성한 창작의 샘물이 어디서 뿜어져 나오는 것일까.
스님은 한마디로 원력이라고 말했다.
“내가 평범한 일반 가요를 만드는 작사가였다면 아마도 이렇게 많은 곡들을 세상에 내놓지 못했을 거야.
평생 번뇌로 방황하는 대중들에게 부처님의 감로수 같은 진리를 쉬운 노랫말로 바꿔 주어야겠다는 원력이 지금까지도 찬불가를 만들게 하는 힘이 되었고 개인적인 수행의 방편도 됐지.”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의 이런 발원과 노력이 불자들에게 전해져 찬불가 한두 곡씩은 부를 만큼 포교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스님은 배가 고프시단다.
“물론 과거에 비해 불자들의 입에서 찬불가가 자주 불리워지는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아직도 법회의식이나 특정 무대가 주를 이루고 있지.
찬불가의 역사도 거의 반백년을 넘어서고 있는데 법회 뿐만 아니라 집에서 생활할 때나 아니면 불자들이 야유회 갈 때도 자연스럽게 불리워 졌으면 좋겠어.”
신기한 것은 제대로 음악교육을 받은 이들도 작사·작곡은 쉽지 않은 일인데 운문 스님은 음악교육을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전문적으로 음악교육을 받은 사람들에 비하면 분명 실력 차이가 많이 나겠지만 불교음악은 실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야.
부처님을 찬탄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하며 가슴에 깊이 새기면 누구든지 좋은 가사를 만들 수 있어.
이건 내 경험에서 비롯된 거니까 불자들에게도 한번 해보라고 권하고 싶어.
부처님만 생각하면 저절로 환희심이 넘쳐 가슴 속에서 노랫말들이 저절로 튀어 나오더라구.”
수북이 쌓여 있는 찬불가 원고 뭉치를 보며 깨달았다.
처음 찬불가 운동을 시작했을 때나 회향할 시기인 지금이나 자신의 원력을 위해 초심을 잃지 않는 여여한 모습이 바로 저런 것임을.
그런 모습 속에서 또하나의 가르침도 배웠다.
새해에 우리가 세운 모든 계획을 연말까지 여여하게 실천하라는 무언의 가르침.
운문 스님은 현재 ‘부처님 일대기’ 등 장편곡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결과 집착말고 과정 즐기세요 운문 스님의 가르침 나는 틈날 때마다 청소년 불자들에게 공(空)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예화를 통해 쉽게 설명해 주려고 노력합니다.
성인불자들에게도 어려운 얘기지만 어릴때부터 자꾸 듣다보면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깨우칠 것 같다는 생각에서지요.
불교에서 공사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공사상의 이치를 깨닫치 못하는 사람이 불자들중에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스님은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과정을 즐기라고 말한다.
일체 만법은 인연에 따라 생겨나서 인연이 끝나면 사라져 버립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실체(實體)가 없지요.
이것이 공의 기본 이치입니다.
우리 인간사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인연의 모임으로 태어나서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거치면서 조금씩 변화하다가 마침내 인연의 모임이 끝나면 본래의 자리인 죽음으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하지만 공을 잘못 생각하면 허무하다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허무는 공에 대한 편견에 불과합니다.
공의 이치를 깨달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진실한 가치의 발견을 위해서입니다.
모든 사물을 영원한 것처럼 집착하는 데서 비극이 생겨나니까요.
그래서 이 집착을 깨뜨리기 위해선 잠시 인연에 의해서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져 버리는 공의 이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새해부터는 우리 불자들이 정말 계획이나 결과에 집착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요즘 내 자신을 돌이켜 보니 1천여곡에 달하는 무수한 곡들도 찬불가 포교에 대한 집착에서 나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차피 대중들에게 회자되다가 허공속으로 사라지는 노래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노랫말을 탄생시키는 결과에 집착하기 보다는, 그 과정을 즐깁니다.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만든 노랫말이 대중들에게 불려지면서 같이 즐거워지길 바랍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노랫말도 더 많이 만들어 지는 것 같아요.
세상이치가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왜 ‘열심히 하다보니 저절로 유명해 졌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떤 결과나 현상에만 집착하면 오히려 그 뜻을 더 쉽게 이룰 수가 없어요.
새해에 내가 무엇을 하겠다, 꼭 이루겠다는 계획을 누구나가 두세가지씩은 세워놨을 것입니다.
반드시 이루려면 오히려 모든 것을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몰두하고 그것을 즐기십시요.
예컨대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일이면 일,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그것들을 즐기십시요.
그러다보면 자신이 목표한 결과에 성큼다가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해부터는 기도 못지 않게 찬불가도 큰 소리로 목청껏 불러 주었으면 합니다.
찬불가를 듣고 부르는 일 또한 사찰에 나가 법문 듣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신행 생활이지요.
찬불가는 다른 노래처럼 단지 멜로디가 좋아 듣는 것이 아니라 그속에는 부처님이 설한 진리의 말씀이 녹아 흐르기 때문에 흥에 겨워 듣고 부르다 보면 어느새 법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가사를 짓는데 있어 내 개인적인 감정보다도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말씀을 노래로 잘 옮길 것인지 고민을 많이 합니다.
노랫말을 짓기전에 경전과 게송을 갖다 놓고 공부합니다.
그래서 조사스님 게송을 인용해 지은 곡들도 몇곡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찬불가의 가사를 열심히 되새기며 부르는 것도 경전공부를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왜 찬불가를 새해부터는 목청껏 부르라고 했는지 이제 알겠지요?
그리고 하나 더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꼭 화두를 하나씩 가지라고 말입니다.
특히 나는 가사가 안 써지거나 마음이 안잡힐 때면 화두인 ‘이뭣고’를 잡고 참선을 합니다.
화두는 바로 깨달음을 열어주기 위한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는 수단이지요.
스님이 좌선을 하고 참선을 할 때만 던지는 물음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수학문제라든가, 과학문제, 또는 수수께끼 같은 문제도 일종의 화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단지 지식이나 경험에 의해 해결되는 문제이지 인생의 본질에 대한 문제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문제가 풀렸다고 해서 인생의 문제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화두하고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나 불교의 화두는 인생의 본질, 즉 마음을 해결하는 문제 제기로서, 이것은 오히려 지금까지 배우고 익혀온 모든 지식이나 경험들을 내던짐으로써, 지식으로 인해 가리워졌던 자신의 본 마음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사바세계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은 마음이 앞장서 일어난 것이고 마음에 의해서 이뤄지기 때문에 본 마음자리를 찾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들도 인생의 큰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것에만 골머리를 썩히지 말고, 오히려 그 문제를 떠나 화두를 잡아 보세요.
정신이 맑아지면 오히려 난관을 헤쳐나가는 지혜도 열립니다.
또한 우리가 아무리 부처님을 위해 보배의 탑을 가득히 쌓고, 불전에 많은 공양과 예배를 올린다 해도 부처님께서 중생 교화를 위해 세우신 큰 서원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큰 빚을 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시대 감각에 알맞는 포교방안을 수립해 젊은 청소년을 교화 육성하고 불교의 생활화, 대중화, 현대화에 힘쓰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정리=김주일 기자
운문 스님은
1928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다.
1944년 망월사서 인곡스님을 은사로 득도했으며, 1953년 해인사 전문강원을 수료했다.
1956년 여수 흥국사 주지를 거쳐 1963년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1971년 조계종 총무원 재무부장을 지냈다.
청소년 포교에 큰 뜻을 둔 스님은 1966년 청소년교화연합회를 창립했고, 64년에는 불교동요집을 발간했다.
이후 40여년동안 1천여곡에 달하는 찬불가(찬불동요 포함)를 만들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제 1회(1987)와 제 3회(1990) 조계종 포교대상을 두 번씩이나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 스님은 삼보불교음악역사관 건립 때문에 잠시 구기동 운문사를 떠나 홍은동 운문사에 주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