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을 보지 말고 법을 보세요
-해월스님-
스님들 가운데에는 대단히 존경받을 만한 수행과 원만한 덕성을 지니신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스님을 존경하는 불자들이 모여 스님을 스승으로 삼아 공부 방법을 지도 받고 같은 도반들이 모임을 만드는 등 스님의 사후에도 자신들의 스승을 자랑스러워 하며 추모하고 그 뜻을 펴고자 애를 쓰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성향 가운데서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부지불식간에 스님과 우리라는 하나의 관계가 맺어 지다 보면 그것이 공부의 큰 힘을 얻는 계기도 되려니와 오히려 반대의 효과도 나타날수있는 것이어서 부처님조차도 부처를 보려 말고 법을 보라고 제자들에게 간곡히 이르시는 것입니다.
스님을 존경하고 공경하는 것까지는 나무랄것이 없지만 잘못하다 보면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얻어야 하는 깨달음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자기 환상 속에서의 만족에 그치기 쉽다는 말이 됩니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박칼리라는 나이 많은 제자는 임종에 이르러서도 깨달음은 얻지 못하고 마지막 소원으로 죽기 전에 부처님의 육신을 한번이라도 뵙는게 소원인 제자였답니다.
부처님은 그 말을 듣고 가셔서 위로하시며, “그대가 보고자 하는 부처의 색신인 이몸은 언젠가 소멸되어 가는 허망한 것이라.이 허망한 몸울 보기를 원하기보다 법을 보는 것을 원하는 것이 더 좋으리라.
나를 보려면 법을 볼것이요.법을 보는 자는 곧 나를 본것이니라.”하고 간곡히 이르시는 가르침을 듣고 박칼리는 마침내 그동안 이르지 못했던 마지막 깨달음의 관문을 넘어 섭니다.
부처님처럼 위대한 스승께서도 당신의 몸을 보려는 자는 법을 보라는 말씀으로 완곡하게 부정하신 스승의 몸이신데, 후대로 이르러 우리는 법을 보는 것보다 색신으로나 음성으로의 부처와 스승을 구하는 경향이 많아진 것이 사실상의 현실입니다.
그렇다 보니 내 스승 우리 스승 내절 우리 절이라는 구분이 없어도 안될것이지만 굳이 법을 보는데는 그다지 도움이 안되는 분리된 의식 속에서 법을 따라 배우려는 노력과 공부보다는 모습과 무늬만 불자인 경우가 늘어만 갑니다.
이것은 스님들도 만찬가지 경향입니다.
처음에는 공부를 탁마하는 문중이나 도반으로서의 친목을 겸한 모임이 시간이 지나면서 애초의 목적한 바는 외면한 채 세력을 형성하거나 무슨 무슨 단체로 형질 변경을 하여 마침내는 돌이키기 어려운 정황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조금 지나친 말로 열반당 도깨비라는 말이 있는데 절집의 언저리에서나 큰 스님의 주위를 맴돌며 주워 듣고 보고 아는 것은 적지 않아서 사중의 일이든 대중의 일이든 자리만 있으면 옳은 소리는 혼자 다 하면서도 마음 속 어둠은 제거하지 못해 오히려 대중의 화합을 방해하고 자기 공부는 뒷전이면서 그 입에 오르내리는 바른 신심을 가진 불자나 스님들은 온전히 몸을 보전하기 힘들 정도로 입심은 대단합니다.
부처님이 나를 보려거든 법을 보라하신 말씀도 만약 박칼리의 요청에 부처님이 시간이 안되어서라거나,멀리 게신 까닭에 찾아 위로하지 못하였을 경우에 박칼리는 잘못된 생각에 자신을 찾아 주시지 않은 부처님에 대한 서운함으로 돌아 간다면 박칼리에게 금생 혹은 다음 생에의 공부에 막대한 지장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기에 부처님은 애써 박칼리에게 말씀 하시는 것을 빌어 오늘날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보려 말고 법을 보거나 법을 보려 노력하는 삶을 살라 하신것입니다.
믿음이란 참으로 삶의 이정표 같은 것이어서 바른 믿음을 이루어야만 자신과 상대를 이롭게 하는 것이니 우리 자신의 믿음을 한번 정도 되돌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불법佛法입니다.
스님들은 다만 불법이라는 보물이 있는 곳을 가리켜 주는 이정표에 불과하다고 스님들을 생각하면서 그 수고에 감사하고 공경하는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요즘처럼 스님들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마음 속에 깊은 신심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는 방법이라는 것이 이미 부처님과 박칼리와의 만남 속에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이정표를 감싸 안고 고마워하며 목표를 설정하는 지도가 아무리 감사해도 그것만 안고 있다가는 모두 헛일입니다.
이 말에 조금은 어패가 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우리는 승가를 삼보의 하나로 여겨 귀의의 대상으로 삼고 부처님과 법과 승가를 동일선상에 놓는데 주저하지 않는데, 지금 스님의 말은 스님들을 믿음과 귀의의 대사에서 제외하란 말인가 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는데, 다만 귀의의 대상이 될수 있는 승가가 아닌 무늬와 모양이 스님인 스님들의모습 때문에 자칫 법을 보아야 할 신심있는 대중들의 마음에 상처가 생김을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공부에는 출가와 재가가 없습니다.
또한 승가라는 말도 출가 승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재가 대중들도 승가의 중요한 일원입니다.
그런데 승가의 일원인 재가 대중들은 자신의 가정이나 가족 직장들을 경영하면서 수행이라는 과정을 복수적으로 실천해야 하니 일반 사람보다는 두배 세배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여간해서는 목적을 이루기 쉽지 않지만 일단 한 고비를 넘으면 이사무애하고 이사겸전한 도리로 두가지를 두루 완수 할수 있는 기회가 뒤따릅니다.
스님을 보지 말고 법을 보십시요.
이렇게 말할수밖에 없는 현실이 조금 슬퍼지만 그래도 법을 아는 사람은 사람의 모습에 있어서 불편한 점이 보이더라도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자칫 스님은 절대적으로 믿고 정작 법을 구하는 일은 소홀히 하다가는 우리 아난 존자처럼 사십여년을 모시면서 부처님의 그림자와 같이 머무르고 되새겨 말씀 하시는 녹음기는 될지언정 법을 깨달음은 요원할수 있습니다.
아마 아난 존자는 부처님을 향한 지극한 사랑과 공경같은 해바라기가 오히려 장애가 되어 깨달음을 부처님 열반 후에 증득하셨다 전하는것도 우리에겐 진정한 공부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가르치시려는 선사 스님들의 방편과 지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절에 평생을 살거나 다닌다해도 법을 깨쳐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도량내에 평생을 뿌리내려 사는 나무와 바위에 다름없음을 생각해 시비에 휘말리지 말고 모양 만드느라 애쓰지 말며 다른 사람의 삶에 호오好惡를 논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바로 보고 법을 깨닫도록 정진하여 가십시다.
매초롬하니 법복 곱게 빼어 입어 외양은 아름다운 보살인데 속 마음은 야차 나찰과 진배없다면 법복이 아깝다 소릴 듣지 않겠습니까.
부처를 보려거든 법을 보라 법을 보는 이가 부처를 본것이라 하시는 부 처님 말씀을 머리에 새기는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