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오스님─ 관음기도에 대하여

관음기도에 대하여

원오스님

관음 염불*

염불이나 정근하면

관음염불을 많이 수행하고 계심은

우리 불자들이 익히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면 왜 관음염불 즉 관음신앙이 유독

우리 불자님들이 많이 신봉하는지에 대해

먼저 알야야 할 것은 구고구난의 자비를 베풀어

언제 어느곳이나 일심으로 중생이 부르고 염하면

바로 응답을 해주는 보살님이며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32응신으로 몸을 나투시어

시공을 초월하여 중생들을 구제해 주시는 유일한 보살님 이므로

우리는 누구나 어렵고 힘들면 관세음을 염하고

염하는 소리에 바로 응하여 줌으로 관세음이라 하였고

바로 구원을 청하는 불자를 구제하여 주는

보살님이기 때문 일 것입니다.

관세음은 우리가 급하면 엄마! 하고 부르듯

원음으로 관세음을 부르고 있다고 보아 집니다.

불자님들이 가정에서나 언제 어디서나 쉽게

행할 수 있는 관세음 염불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많이 염하지만,

어떻게 하면 지극한 마음으로 일심의 염불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선 염불 행자는 매일 정기적인 때를 정하여

30분 정도 시간에 합당한 향을 꽂고 단정히 앉아 합장한다

.

관음상이나 탱화, 사진이 없을 경우에는 거울 앞에 앉아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염불함도 바람직 하다.

관세음보살의 염불을 꼭 고성이 아니어도 좋다.

오히려 집안에서 작은 소리로 입끝에서 염불이

이루어 지게 하는 것이 마음을 모으는 데는 더욱 효과적이다.

처음에는 천천히 염하다가 차츰 차츰

명호를 부르는 속도를 빨리하여,

마침내는 명호의 앞뒤가 간격이 없을 만큼 되어야 한다.

들숨, 날숨에 관계없이 염불이 끊임없이 이어 지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마음가짐은 관세음보살로만 채워져야 한다.

번뇌가 일어나면 번뇌를 물리치려고 하지말고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그 자비 속으로 귀의하면 된다.

그리고 향이 다 타면 마음 속의 소원을

3번 반복하여 지긋이 기원하는 것이다.

일체 번뇌가 텅비고 관음으로 가득찬 마음의 기도는

그대로 관세음보살의 관하는 바가 되어

수행과 소원을 함께 이룰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러나 소원이 다급할 때는 입으로 관음을 염하면서

지극한 마음으로 소원하는 바를 생각하면 된다.

배고픈 아이가 어머니를 찾듯이.

불치의 환자가 명의를 찾듯이…….

끝으로 옛 설화 한 편을 인용하여 가정에

불보살의 불상이나 탱화를 봉안하면 가정에 불화가 있고

불길하다는 속설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중국 제나라(550-577)에 손경덕 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는 가정에 관음상을 모시고 항상 공경해 섬겨온 관음 신자였다.

어느 때 손경덕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에 처해질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 누명을 벗기 위해

일심으로 관음보살을 염송하였다.

어느날 비몽사몽간에

한 노승이 와서 (구고관음경(救苦觀音經))을 가리켜 주고

“이 경을 천 번만 일심으로 외우면 죽음을 면하리라”하였다.

손경덕은 이 경을 지성으로 외워 형장에

이르기 직전에 겨우 천번을 왜워 마쳤다.

형장에 이르니 형졸이 칼을 번쩍 들어 경덕의 목을 내리쳤다.

뜻밖에도 칼은 세 조각이 나면서 뿌러졌고

경덕의 몸은 흠하나 없었다.

세 번이나 칼을 바꾸어서 형을 집행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 사실은 지체없이 황제에게 보고 되자

사면과 동시에 누명까지 벗게 되었다.

손경덕이 집에 돌아와서 관음상 앞에 경건히 예배하고

관음상을 살펴보니 관음상의 목에 칼 맞은 자국이 세 군데나 있었다.

관세음 보살이 대자비로써 경덕의 고통을 대신 받은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설화는 무수히 많으나

이 한편의 설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경덕의 집에 모셔진 관음상은 경덕의 원불(願佛)이였다.

이 원불은 믿는 자의 지극한 마음에 감응하여

그 죽음까지도 대신 받았던 것이다.

집안에 불상을 모심이 왜 불행의 원인이 된다는 말인가?

오히려 잦은 기도와 불상을 모심으로 해서

경견해지는 집안 분위기 불상에 예배를 통한 마음의 정화는

우리의 생활을 맑고 윤택하게 한다.

집안에서 사찰처럼

멋진 예불문과 공양을 올리지 못한다고 하여

배고픈 불보살이 노여움으로 벌이라도 내린다는 말이가?

적어도 불보살은 젯밥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하루 단 한 번의 지극한 합장 배례를

칭찬하고 보살펴 줄 자비의 대성(大聖)들이다.

납승은 오히려 권하고 싶다.

우리의 집안에다 관음상을 모시자고,

우리의 집안에다 원불을 봉안하자고,

신라, 고려 때의 우리 조상들이 집안에 불상을 모셨듯이.

그 관음상은 우리 손으로 갂아 만든 목불이라도 좋으리라.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이라도 좋으리라.

다만 그 관음상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

관음의 자비를 배우는 기도인이 된다면 족하리라.

단 5분의 시간이라도 분향하며 지성의 염원을 심어보자.

그 원이 이 몸에 충만하고,

이 집안에 충만하고,

이 법계에 충만하다면,

이 국토는 관음의 국토가 아닌가!

지성의 염원을 심는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관음전에 되지 않겠는가!

관음의 빛 속으로 중생의 빛이 향할 때

중생의 소리를 마음으로 포용하는 관세음!

지극한 마음의 기도 속에 관음은 이미 와 있다.

관음 대성은 지성의 기도인과 언제나 함께 하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나무 관세음 보살..!

현웅스님─내안에 부처를 만나려면 내가 아는 부처를 버려라

내안에 부처를 만나려면 내가 아는 부처를 버려라

美 버클리 육조사 현 웅 스님

마음을 한곳에 머물지 말고

새 마음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라

얼마전 현대 그룹 정몽헌 회장이 높은 빌딩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정몽헌 회장같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왜 죽었을까요.

그의 자살을 통해 인간이 중도(中道), 자기 안에 일어나는 지혜의 길을 놓쳤을 때 얼마나 위험한 지 다시 한번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 해 전 그의 아버지 정주영 씨가 전두환 정권이 끝난 뒤에 5공 청문회에 나온 것을 봤습니다.

국회의원들이 “장세동 씨한테 빌려준 돈 6억을 다시 받았습니까?” 묻자 “안받았습니다.

저는 제 주머니에서 나간 돈은 더 이상 제 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합디다.

그리고는 “그 돈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대신 다른 데서 60억을 벌 생각을 합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그것이 바로 불교적인 생각입니다.

좬금강경좭에서는 “마음을 한 곳에 머물지 말고 새 마음을 내라.

부처님의 가르침으로도 새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정주영씨가 실천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리저리 궁리를 하다보니 사업의 중용을 알고 나아

가고 물러갈 데를 알아 그 길을 헤쳐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착하게 생겼더니만 앞으로만 나가다가

뒤로 못가고 길이 막혀 죽었어요.

자신은 최선을 다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려고 했는데, 사회구조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의식을 옴짝달싹 못하게 한거에요.

이 양반이 불교의 이치를 알았더라면 그런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좋은 능력과 재산으로 여러 사람에게 이익되게 했을텐데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전에 찢어지게 못살아서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할 때는

안죽던 사람들이 요즘에 와서 왜 그렇게 죽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생의 방향을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미국에서도 골든게이트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미국인들 중에서 아무데서도 답을 찾지 못해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박사학위가 두 개나 되고 미국 최고 명문대를

나온 사람들이 가장 높은 것, 최고로 즐거운 것만 생각하다 몸과

마음이 망가져서 찾아옵니다.

그것이 물질문명의 결과입니다.

불교에서 육도 중에 아귀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아귀의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눈에 좋고 보기에 좋은 것은 무조건 먹는 것.

그것이 바로 문명사회의 모습이요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특히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렇습니다.

그렇게 몸이 비대해져 균형을 잃어가다 보면

자연히 마음도 혼탁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헛것인지 모르고 자꾸 욕심을 내면 그게 바로 업이 됩니다.

업이 쌓이면 어리석음에 갇히고 자기 안의 지혜를 등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안의 부처를 무시하게 되고 스스로를 천하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은 더욱 낮은 사람이 되는 반면 내 속에 부처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남에게 존경받는 부처가 됩니다.

번뇌와 고통은 자아를 깨닫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내 지식을 보물단지처럼 꽉 붙들고 있으면 진리의 넓은 바다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잊어버려야할 불교를 왜 배워야 하느냐.

우리가 깨닫는 사람의 그림자라도 배워서 흉내라도 내다보면

내 안의 생각이 정제됩니다.

또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다보면

상식과 지식이 쉬워지면서 내 속에서 부처님의 싹이 나오게

됩니다.

그 경험이 바로 믿음이에요.

우리들의 어리석음이 믿음으로 변하게 되면서 신심도 생기고

부처님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눈 앞에 보이는 것들에 상을 내지 말고 항상 자신의 마음을 정제시키십시오.

108배, 1000배도 하고 불교대학에서 공부도 하시고, 주력도 열심히 하십시오.

열심히 기도하다 보면 내 마음이 정제되는 순간을 딱 만나게 됩니다.

정제라는 것은 영어로는 silence, 우리말로는 고요하다고 하는데, 그것을 고상하게

말하면 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부처님 마음이 내 마음에 뿌리를 내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내 속의 세포가 깨어나고 내 안의 부처가 마음대로 작용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을 모르고 공부하면 어리석음만 늘어난다”는 서산 스님의 말씀을 숙지하시고,

꼭 내 안에서 부처를 만나시길 바랍니다.

원산스님─중생 마음속에서 부처 깨달아야

“중생 마음속에서 부처 깨달아야” 통도사 백련암 감원 원 산 스님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에는 같은 점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괴로움 없이 즐겁게 살려한다는 점이 똑같습니다.

예술, 종교, 철학도 그 근본 목표는 전부 고통 없이 즐겁게

사는 데 있습니다.

불교도 이 세상은 괴로운 것이다, 어떻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나고 죽음이 없는 열반의 세계에 가느냐.

거기에 근본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려고 하면 부처님이 어떤 분이냐, 어디에 계시느냐,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흔히 타종교인들이 말하기를 불교는 우상을 숭배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모신 분이 부처님입니까.

부처님이라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이 되는데 불상이라고

생각하면 불상이 됩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불상이 되기도 하고 부처님이 되기고 하고

골동품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불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과연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부처님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화엄경』 소초를 낸 통현 장자라고 하는 유명한 거사가

있습니다.

그 분이 『화엄경』에 대해서 지은 글 중에는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의 마음속에 있다.

자기 근기가 감당하는 바를 따라서 부처가 되고 중생이

되는 것이지 다른 물건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일체 제불의 근원 자리를 알고자 할진 데는 자기의 무명

자리 그것을 깨달으면 그것이 본래의 부처더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명이라는 것 때문에 부처가 안 되고 있는 겁니다.

밝음이 없다는 겁니다.

밝음이 없으면 깜깜한 밤중과 같은

것입니다.

눈을 감아 버리면 바로 깜깜한 밤중입니다.

무명을 깨달으면 본래 자리가 부처가 된다.

눈을 감았다가 떠버리면 온갖 것을 다 알잖아요.

그것이 바로 깨달은 부처의 자립니다.

눈을 감았다가 뜬다는 것이 다를 뿐이지 감았을 때도

눈이요, 떠도 눈입니다.

그러나 눈을 감았을 때와 떴을

때는 엄청나게 다르지요.

부처와 중생이 그와 같다는 겁니다.

중생에게도 그 마음이 있고 부처에게도 그 마음이 있다는

겁니다.

마음, 부처, 중생이라고 하는 이 세 가지가 다 차별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부처가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감았던 눈을 뜨기만 하면 되는데.

일체가 다 마음에서 시작돼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유를 할 것 같으면 금반지, 금시계, 금목걸이와

같은 것이 처음에는 금광에서부터 나왔습니다.

금광의 금은 중생과 같습니다.

번뇌, 망상, 이 생각, 저 생각, 과거에 지은 팔만 사천 업장이

거기에는 다 섞여 있는 겁니다.

그것을 제련하고 달련해서 99% 금이 되는 것이 부처님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금과 같이 제련 기간을 거치면 금이 될 수

있겠지요.

염불을 하고 참선을 하고 경을 보고 하는 것은 정신이 일치가 안 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정신 일치하는 것이 곧 공부입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를 때도 일심칭명하고, 화두를 할 때도

일념삼매, 일심삼매, 일행삼매, 한 생각 다른 잡념이 들어오지 않는 것.

그래서 참선하는 사람은 칠일칠야, 일주일 밤낮 한 생각만

연속이 된다고 한다면 대도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뭐꼬’ 한 생각만 있어야지 다른 생각이 들어오면 안 됩니다.

망상이 들어오면 안 되고 졸아도 안 됩니다.

물론 온갖 생각이 다 일어납니다.

간절한 신심과 대 분심과

대 원력과 대 의심이 없으면 화두 일심이 안 되죠.

기도하는 사람들도 법당에 앉아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도

생각은 아들 집에 갔다가 딸 집에 갔다하며 여러 생각이 일어난다면

법당에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생각이 딱 없어져서 100% 순금이 되는 상태가 공부입니다.

불교가 어려운 것이 하나도 없어요.

내 마음 닦는 것인데, 이 이상 쉬운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눈이 보는 것이 아니잖아요.

귀가 듣는 것이 아니잖아요.

입이 말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의 본래 마음자리 이것이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말하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하고 행복을 느끼기도 합니다.

내 몸뚱이는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이 우주를 조물주가 창조했다고 합니다.

조물주는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인간의 마음에서 조물주가 나왔습니다.

마음이 떠나면 몸뚱이는 송장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있으니까 몸뚱이는 사람이지요.

죽었다는 것은 마음자리가 여기에서 떠났다는 겁니다.

내 몸뚱이도 마음에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이 세계도 우주도 내 마음이 없으면 몸도 없고 우주도 없는 겁니다.

주관과 객관이 전부 다 마음에서 창조 된 것입니다.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천상, 수라가 전부 마음에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 일체가 다

마음에서 지어졌다고 했던 것입니다.

마음자리, 이것이 우리의 근본 자리입니다.

이 자리를 알아야 됩니다.

인간 몸 받았을 때 정진해야

옛날 당나라 때 구지 선사라는 분이 계셨어요.

어느 날 갓을 쓴 비구니 스님이 나타나서 선사 주위를 세 바퀴 돌고 가는 모습에 의문이 풀리지 않을 때 천룡 화상이 찾아왔습니다.

구지 선사가 비구니의 행동을 흉내 내자 천룡 화상이 내민

손가락을 보고 선사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구지 선사의 설법은 누가 법을 묻든지 간에

손가락 법문입니다.

그런데 구지 선사가 외출한 사이, 한 사미가 선사를 찾아오는

납자들에게 “우리 스님은 누가 오든지 손가락을 내미는 것밖에

없습니다”라며 손가락을 내미는 법문을 따라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 사미를 불렀습니다.

아무개야.

네.

어떤 것이 도냐.

손가락을 내 놓는 겁니다.

그 때 그 손가락을 잡고 싹둑 잘라버렸습니다.

이 사미가 놀라서 울며 도망가는데 구지 선사가 아무개야 하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무개가 돌아봅니다.

그 때 구지 선사가 어떤 것이 도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손가락을 내어 놓는데 손가락이 없어진 데서 도를 깨쳤습니다.

그래서 구지 선사는 천룡 화상이 손가락을 내어 놓는 데서 도를 깨쳤고,

이 제자는 손가락이 없는 데서 도를 깨쳤다는 겁니다.

도라고 하는 것이 희한하잖아요.

있는 데도 깨치고 없는 데도 깨치니까요.

그래서 도는 있는 데 속하지도 않고 없는 데 속하지도 않으면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교리를 보면 처음에는 삼라만상 전부 있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전부 있는 데 집착하거든요.

있다고 집착하니까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없다고 생각하니까 분명히 생로병사가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 바로 중도의 이치입니다.

구지 선사의 깨침이라는 것, 상좌의 깨침이라는 것이 모두

진리와 부합되어서 이뤄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열심히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의식주 생활에도 바쁘겠지만 한번 죽게 되면 다시

인간의 몸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 지도 모르거든요.

육도 중생 가운데 인간 몸을 받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천국이 좋기는 하지만 즐거운 곳에만 있으면 공부할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잘 사는 사람이 절에 안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고락이 상반이라,

인간의 몸을 받았을 때 공부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몸을 받더라도 정법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불교만큼 과학적인 종교가 없습니다.

유일신 종교는 계속 전쟁을 하고 싸워야 됩니다.

다른 신은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계속 전쟁을

하는 겁니다.

불교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종교입니다.

인간의 몸을 받고 정법을 만난 여러분,

기도를 하든지 경을 보든지 참선을 하든지 간절한 노력으로

모두 대도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

com 이 법문은 5월 3일 울산 연화사(주지 덕륜)에서 봉행된

선지식 초청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원산 스님은 1964년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 스님을 은사로 득도,

같은 해 사미계를, 1969년 월하 스님에게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97년 6월 교육원장 소임에서 물러난 스님은 1998년 2월부터

2001년 3월까지 통도사 백련암에서 3년동안 하루 한 끼만 공양하며

무문관 수행을 했다.

현재 스님은 최근 초산유원지 반대운동과 함께 영축산 남산 보존을

위한 천일기도를 봉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