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스님─아상이 있는 자가 어찌 나를 보리오

아상이 있는 자가 어찌 나를 보리오

-해월스님-

어느 고을에 홀로 된 여자 한 분이 날마다 남의집 품팔이로 방아를 찧어주고는 거기서 나오는 쌀겨를 품삯으로 받아 돌아와 그것으로 밥이라고 해 먹고 살아 갑니다 그렇게 궁색하고 어렵다 보니 그저 입에 풀칠하는 것이 우선일 뿐 그외의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는데 시월 초하루 상달이 되자 마을의 부녀자들이 너도 나도 신곡을 조금씩 장만하여 치성을 들이러 가까운 절에 간다고 분주합니다 이 가난한 여인도 마을 부녀자들을 보며 나도 저 부인들을 따라 절에 한번 가서 부처님 전에 간절한 마음으로 절이라도 해야지 하고 뒤를 따르는데 마을 부녀자들은 어디 거지같은 사람이 우리들 절에 가는데 따라 오느냐 핀잔을 하고 못 따라 오게 하니 이 여인은 하는 수 없이 절에는 못 들어 가고 먼 발치에서 합장하고 부처님께 발원합니다 제가 너무 어렵고 딱한 처지여서 부처님 전에 나아가 공양도 못 올리고 이렇게나마 부처님께 인사 드립니다 하고 흐느끼며 집으로 돌아 옵니다 너무 서러운 나머지 밤을 새워 눈물을 흘리다가 문득 잠이 들었는데 비몽 사몽간에 밖에서 목탁 소리가 들려 옵니다 여인이 나가 보니 어린 동자 스님이 탁발을 나왔는데 동자승의 모습 또한 추레하고 시장해 보이는지라 어서 들어 오시라 하여 쌀겨 가운데 그래도 미음이라도 끓일만한 부분을 골라 죽을 쑤어 한 그릇 대접을 하니 동자스님은 맛있게 잘도 드십니다 동자스님은 마파람에 게눈 감추 듯 다 먹고 나서 상도 물리기 전에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보기에 아주머니의 처지가 나보다 더 어려우면 어려웠지 나을게 없는데 어찌 이리 환대를 하십니까 하자 여인은 어제 절에 가다가 있었던 일을 울면서 이야기 하며 전생에 지은 복이 부족해 금생에는 이렇게 어렵게 살지만 다음 생에라도 넉넉한 집에 태어나 부처님과 스님들께 좋은 공양 올리고 불교 공부도 하고 싶다 합니다 동자 스님은 웃으며 마음을 내면 그 즉시에 이루어 진다고 우리 스승님은 늘 말씀 하시는데 아마 곧 이루어 질 것입니다 하고는 작은 걸망에서 솥단지 하나를 꺼내 줍니다 이 솥단지는 조금 특이한 것이어서 물만 붓고 불을 때면 저절로 밥이 될터이니 이제 쌀겨로 밥을 지어 드시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고는 떠나 갑니다 여인은 동자의 말이 하도 신기하여 시키는 대로 하고 솥 뚜껑을 열어 보니 정말로 하얀 쌀밥이 솥 안에 가득하고 그 밥에서 풍기는 향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여인은 우선 밥 한그릇을 떠서 절에 부처님 계신 곳을 향해 공양 올리고 밥을 먹는데 정말로 살다 살다 내게 이같은 날이 오기도 한 것인지 다리를 꼬집어 보아도 분명히 꿈은 아닌 생시입니다 여인은 그 다음부터는 마을 사람들을 청해 함께 밥을 해서 먹는데 아무리 아무리 밥을 해 내도 물만 부은 솥단지는 여전히 흰 쌀밥을 지어 내니 이제 마을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도 달라 지고 마음에 점점 여유가 생겨 납니다 매일 매일 밥을 지으면 부처님 전 먼저 공양 올리고 하던 여인은 마을 사람들이 장난하는 소리로 만약 물을 붓지 않고 불을 때면 어찌 되는지 시험해보자 하는 소리에 다들 돌아 간 뒤에 정말로 그렇게 해보는데 솥을 열어 보는 순간 솥 안에서 광채가 납니다 솥안 가득 금은 보화가 가득했던 것입니다 여인은 이같은 모든 공덕이 마을 사람들의 은혜라 생각해 함께 나누어 쓰며 가정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을 뵙고 싶어 마음이 한결같이 사무친 여인에게 부처님과 보살님의 가피가 그렇게 나투셨으니 그저 우스개 소리거니 하거나 왜 나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는데 내게는 그같은 일이 없냐 하지 마시고 열심히 기도하고 공부하십시다 인생사 난득이라고 우리가 부처님 법을 만난 인연만 하더라도 백천만겁에 난조우요 맹구우목에 비유되는 크나큰 복과 공덕 아니면 어찌 이같은 공부의 길에 도반이 되어 만나겠습니까 아침에도 감사 점심에도 감사 저녁에도 감사 그저 감사와 공경의 마음으로 정진하고 노력한다면 어느 집엔들 부처님의 가피가 없겠습니까 둥근 만월이 빈부귀천 차별없이 두루 밝게 비추듯이 어디에나 나투시지 않음이 없는데 내가 문을 닫고 빛을 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방안은 깜깜 한것이 마치 열심히 불러서 어렵게 찾아 오신 문수 보살을 거렁뱅이 노인이라고 쫓아 보내고 나서 크게 후회하던 자장 율사의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아상이 있는 자가 어찌 나를 보리요

월호스님─ ‘묵은 나’와 ‘새로운 나’

‘묵은 나’와 ‘새로운 나’

-월호스님-

“일년 삼백 육십일이 오늘로써 끝나건만 / 열에 다섯 쌍은 참선하되 선을 알지 못하고(不知) / 도를 배우되 도를 알지 못하는구나.(不識) / 다만 이 부지불식(不知不識) 네 글자가 / 삼세제불의 골수이며, 팔만대장경의 근원이로다.” (선요) 달마대사는 양 무제를 만나 자신을 알지 못한다(不知)고 했다.

육조대사는 법달에게 자신은 문자를 모른다(不識)고 했다.

그런데 이 부지불식 네 글자야말로 삼세제불의 골수이며 팔만대장경의 근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강조하고 다녔다.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노상 그런 말을 들은 사람들은 마침내 화를 내며 소크라테스에게 되물었다.

“그러는 당신은 자기 자신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 나도 모르지.” “그렇다면 우리와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네.”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나는 나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네.

하지만 그대들은 그것조차 모르고 있단 말일세.” 스스로 모르고 있음을 아는 것, 이것이 진정한 앎의 출발점이다.

그것은 ‘묵은 나’를 보내고 ‘새로운 나’를 맞이하는 것이다.

이야말로 연말연시의 가장 좋은 덕목이다.

‘묵은 나’는 무엇인가.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몸과 마음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나’는 무엇인가.

스스로를 모른다고 정확히 아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몸과 마음이라고 확실히 아는 것이다.

마성스님─방생(放生)의 공덕

방생(放生)의 공덕

마성스님

방생의 공덕 방생은 다른 이가 잡은 산 물고기·날짐승·길짐승 따위의 산 것들을 사서, 산이나 물에 놓아 살려주는 일이다.

또한 방생은 살생과 반대되는 말이다.

살생을 금하는 것은 소극적인 선행(善行)이지만, 방생은 적극적으로 선(善)을 행하는 작선(作善)이다.

그런데 중화민국의 인광대사(印光大師)는 방생을 하면 열 가지 큰 공덕을 받는다고 하였다.

인광대사가 지은 ‘방생십대공덕'[1]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소개한다.

첫째는 전쟁의 위험이 없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모두 사람들의 마음 속에 죽이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개인이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을 지키고, 나아가 방생을 하게 되면 생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므로, 자연 전쟁의 기운은 형체도 없이 소멸된다.

그러므로 방생은 이러한 전쟁의 위험을 막는 적극적인 운동인 것이다.

따라서 정치가나 교육자, 사업가들이 이것에 주의하여 힘으로나마 방생운동을 제창한다면 반드시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둘째는 기쁘고 길상스러운 일들이 모두 모인다.

우리들이 자비의 마음을 한번만 일으켜도 그 몸에 기쁜 기운이 모이는데, 하물며 죽어 가는 생명을 놓아서 살려주는 방생을 행한다면 기쁘고 성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은 필연적인 원리이다.

셋째는 건강하고 오래 산다.

경에 이르되, “불살생의 계율을 지키고 방생한 사람은 두 가지 복덕의 과보를 받는다.

첫째는 장수(長壽)요, 둘째는 복이 많고 병이 없이 오래 산다”고 하였다.

넷째는 자손이 번창한다.

방생이란 하늘과 땅의 체성(體性)과 같아 태어남을 좋아하는 마음이다.

방생은 생명을 살려주는 것이므로 자손이 창성할 것은 당연하며, 자식 가운데에서도 남자를 얻는 경사를 맞게 된다.

다섯째는 모든 부처님께서 기뻐하신다.

일체의 생물을 부처님께서는 모두 자식과 같이 본다.

따라서 죽어 가는 한 생명을 구하면 바로 부처님의 한 아들을 구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한결같이 크게 기뻐하시는 것이다.

여섯째는 은혜에 감응한다.

죽음에 임박한 생물을 구하여 살려주면 모두 크게 환희하여 은혜에 감응하게 되므로 만겁(萬劫)의 좋은 인연이 된다.

일곱째는 모든 재난이 없다.

자비로운 사람은 복덕이 날로 늘어나기 때문에 일체의 우환과 재난이 모두 형체도 없이 소멸된다.

여덟째는 천상에 태어난다.

불살생의 계율을 지키고 방생하는 사람은 내세에 사왕천에 태어나 끝없는 복을 누린다.

만약 이런 사람이 정토행(淨土行)을 겸하여 수행하면 곧바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왕생하며, 그 공덕은 실로 다함이 없다.

아홉째는 모든 악이 소멸된다.

현대는 극도로 위험한 시대이다.

잘못된 음주의 버릇과 성(性)의 문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방생하여 은혜에 보답하면 모든 악이 소멸되고 태평하게 된다.

열째는 복덕과 수명이 영원하다.

동물은 하급에서 고등으로, 인류는 야만에서 문명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이런 점은 동물과 인간이 서로 같다.

일반적으로 생물학자들이 말하길, “무릇 생물은 외계의 상태에 따라 변화한다.

사람들이 불살생계를 지키고 방생하는 것을 세세 생생토록 쉬지 않으면 착한 마음이 서로 상응하여 자자손손(子子孫孫)으로 서로 전하여 복덕과 장수를 누린다.

이상의 열 가지가 방생을 함으로써 얻게 되는 공덕이다.

인간은 본래 자기의 생명을 귀중히 여긴다.

동물이건 식물이건 모든 생명이 있는 존재는 모두 존엄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생명의 존엄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살생을 금하고 있다.

그런데 전쟁과 싸움은 상대를 죽이려는 살생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계에서는 널리 방생을 권해서 살생하려는 악의 씨를 뿌리뽑고, 방생으로 자비의 마음을 기르는 것이다.

적석도인의 칠종방생 적석도인(赤石道人)은 다음의 일곱 가지 경우에는 꼭 방생을 하라고 권하고 있다.

첫째는 자식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방생하라.

세상 사람이 자식을 얻고자 약 먹기에 힘을 쓰나 한 평생을 먹더라도 효험을 보지 못하는 자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병이 있거든 약을 먹고, 자식이 없거든 방생하라.’고 권한다.

천지의 큰 덕은 태어남이다.

진실로 남의 생명을 살려주면 곧 나를 살려주는 것이다.

방생을 하면 원하는 자식을 얻을 수 있다.

둘째는 자식을 잉태하면 반드시 방생하여 산모(産母)를 보전하라.

잉태하여 자식을 보는 것은 사람과 만물이 다르지 않다.

사람과 짐승도 모두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짐승의 새끼 뱀을 내가 구해 주는데, 내가 자식을 잉태하였음을 아시면 하늘이 어찌 보호하지 않겠는가.

셋째는 기도함에 반드시 방생하여 복을 많이 지어라.

태어남을 좋아하는 덕[好生之德]은 제신(諸神)과 부처님이 동일하다.

이러한 제신과 부처님의 호생지덕을 생각하여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인 생물들을 살려주어라.

만일 자신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는 염불이라도 해주면 자연히 하늘이 감동하여 복을 얻음이 한량없을 것이다.

넷째는 미리 닦고자 하거든 방생부터 먼저 하라.

세간의 자선(慈善)은 방생 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내가 자비의 마음으로 방생하면 반드시 불보살님의 가피의 덕을 입을 것이다.

다섯째는 재계(齋戒)를 가짐에 반드시 방생하라.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계율 지키는 것을 좋아하심은 만물의 자비심 두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이 부처님의 아들 아님이 없다.

진실로 재계를 가지는 날에 방생하면 제불보살이 환희심을 낸다.

여섯째는 복록(福綠)을 구함에 먼저 방생하여 복을 쌓아라.

부귀명복(富貴冥福)은 요행으로 되지 않는다.

오직 복을 짓는 자 반드시 명복(冥福)을 얻는다.

사람이 어진 마음으로 생물을 어여삐 여겨 그 목숨을 구제해 주면 나의 구제를 입은 자가 기회를 보아 보답할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일곱째는 염불함에 반드시 방생부터 하라.

세상에 살면서 염불하는 사람은 자비심으로써 방생을 주로 하라.

생물을 구제함이 사람을 구제함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이 극형(極刑)을 범하는 것은 대부분 장난 삼아 하지만 동물들은 무슨 죄로 참혹한 환난을 만나야 하는가.

그러므로 누구든지 연지(蓮池) 대사와 영명연수(永明延壽) 선사의 방생으로써 급무(急務)를 삼아야 할 것이다.

연지대사의 칠종불살생 앞에서 살펴본 적석도인은 방생을 권하였다.

하지만 연지대사는 방생과 반대되는 살생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연지대사(蓮池大師)의 일곱 가지 불살생에 대한 교훈은 안진호(安震湖) 스님이 편찬한 석문의범(釋門儀範)에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고문체로 씌어졌기 때문에 현대인이 읽기에는 난해하다.

그래서 그 취지만 살리고 현대문으로 필자가 개작하였다.

첫째는 생일에 살생하지 말라.

자신이 출생한 날은 어머님께서 거의 죽을 뻔했던 날이다.

이 날에 결코 살생해서는 안된다.

재계(齋戒)를 지니고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

이러한 공덕으로 선망부모를 왕생케 하고, 현재 부모의 복덕과 수명이 증장케 해야 한다.

둘째는 자식을 낳거든 살생하지 말라.

모든 사람이 자식을 잃으면 슬퍼하고, 자식을 얻으면 기뻐한다.

일체의 동물도 자기 새끼를 사랑한다.

내 자식의 출생은 기뻐하면서 남의 자식을 죽게 하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

자식이 태어나는 날 남에게 적선(積善)하여 복덕(福德)을 짓지 못할지언정 도리어 살생업(殺生業)을 지어서야 되겠는가.

셋째는 제사 지낼 때 살생하지 말라.

망령(亡靈)의 기일(忌日)에 살생을 경계하여 명복을 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살생하여 제사 지내는 것은 악업(惡業)만 증대시킬 뿐이다.

넷째는 혼례에 살생하지 말라.

결혼이란 새로운 가정의 시작이다.

삶의 시초에 살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한 혼례는 좋은 날의 길사(吉事)인데, 이날 흉한 일을 행하는 것은 참혹한 것이다.

또한 결혼식을 하면 반드시 부부가 해로(偕老)하기를 축원한다.

사람은 해로하기를 원하면서 짐승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인간들의 만행이다.

다섯째는 연회(宴會)를 베풀 때 살생을 말라.

손님을 맞이함에 정결히 마련한 채식과 다과로 정성껏 대접하면 된다.

연회를 핑계로 살아있는 짐승의 목과 배를 갈라 비명소리가 진동하게 해서야 어찌 사람의 마음인들 좋겠는가.

식탁의 맛있는 고기는 도마 위의 살육에서 나온 것이다.

짐승의 원한을 나의 기쁨으로 삼아서야 되겠는가.

여섯째는 기도할 때 살생하지 말라.

사람들은 병이 들었을 때 기도하여 쾌차하기를 바란다.

남의 목숨을 죽여서라도 나의 목숨을 연장하고자 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결코 목숨을 연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살생업만 더하는 꼴이다.

일곱째는 살생하는 직업을 갖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서 살생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지만 가능한 그러한 직업을 갖지 않는 것이 좋다.

살생하는 것을 직업으로 시작하면서부터 나쁜 과보를 받을 인(因)을 이미 지은 것이다.

어찌 내세의 악과(惡果)를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어찌 생계를 꾸려갈 다른 방도를 찾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