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나’와 ‘새로운 나’
-월호스님-
“일년 삼백 육십일이 오늘로써 끝나건만 / 열에 다섯 쌍은 참선하되 선을 알지 못하고(不知) / 도를 배우되 도를 알지 못하는구나.(不識) / 다만 이 부지불식(不知不識) 네 글자가 / 삼세제불의 골수이며, 팔만대장경의 근원이로다.” (선요) 달마대사는 양 무제를 만나 자신을 알지 못한다(不知)고 했다.
육조대사는 법달에게 자신은 문자를 모른다(不識)고 했다.
그런데 이 부지불식 네 글자야말로 삼세제불의 골수이며 팔만대장경의 근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강조하고 다녔다.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노상 그런 말을 들은 사람들은 마침내 화를 내며 소크라테스에게 되물었다.
“그러는 당신은 자기 자신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 나도 모르지.” “그렇다면 우리와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네.”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나는 나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네.
하지만 그대들은 그것조차 모르고 있단 말일세.” 스스로 모르고 있음을 아는 것, 이것이 진정한 앎의 출발점이다.
그것은 ‘묵은 나’를 보내고 ‘새로운 나’를 맞이하는 것이다.
이야말로 연말연시의 가장 좋은 덕목이다.
‘묵은 나’는 무엇인가.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몸과 마음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나’는 무엇인가.
스스로를 모른다고 정확히 아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몸과 마음이라고 확실히 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