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스님─목숨은 무상하니 지금 당장 노력하라

**목숨은 무상하니 지금 당장 노력하라**

임진년 하안거 결제법어…“언행일치한 수행자 돼야” 우리 수행자들은 매일 매일 정성스런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항상 선(善) 의지로 살아야한다.

설사 지식과 능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선 의지가 없으면 사람냄새가 나지 않고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

선 의지야말로 인간성격(人間性格)의 근본이 되고 가치가 되기 때문이다.

그 기초위에서 정진도 해야 하고 지식, 기술, 근면, 건강, 협동, 침착 등의 조건부 선을 쌓아가야 한다.

이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교육이고 생활의 원리다.

양심(良心)없는 수행자 덕성(德性)없는 수행자를 상상해보라.

불조에게 죄송하고 중생에게 부끄럽다.

양심 없는 능력, 덕성 없는 지식은 악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신(信)이 있는 삶을 살아야한다.

신의는 인간관계의 기본질서며 사회생활의 가장 중요한 자본이다.

믿으면 뭉칠 수 있고 뭉치면 힘이 생긴다.

힘이 생기면 번성 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언행이 일치가 안 되면 믿을 수가 없다.

믿지 못하면 단결이 안 되고 힘이 안 생긴다, 힘이 없으면 허약해지고 쇠퇴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힘의 근본은 신의다.

이런 화합의 기본에서 우리는 정진해야 한다.

사람의 목숨은 무상하여 오늘 비록 존재하나 내일 또한 보장하기 어렵다.

사지가 멀쩡할 때 정신 차려 정진하여 생사문제를 해결해야한다.

비록 지금은 빈둥거리면서 잘 산다 해도 죽음에 다달아 사지를 도려내는 아픔 속에 허둥댄들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목마를 때 샘 파면 힘만 들고 목은 추기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노력하여 일대사(一大事)를 요달할 일이다.

참선에 많은 말이 필요 없다.

다만 자동차가 달리듯 갈뿐이다.

화두에 달라붙어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언제나 간절한 마음으로 오나가나 밥 먹으나 대· 소변 볼 때도 일할 때나 고요 할 때나 앞뒤 돌보지 말고 앞으로 달려라.

그렇게 달리다 보면 헐떡거리는 마음도 쉬어지고 적멸보궁에 들게 될 것이다.

妙道堂堂何處在(묘도당당하처재) 莫從外去苦追尋(막종외거고추심) 一朝兩眼能開豁(일조양안능개활) 山色水光是本心(산색수광시본심) 묘한 도는 당당히 어느 곳에 있나 밖으로 애써 찾아다니지 말라 하루아침에 두 눈이 활짝 열리면 물빛이나 산 빛 본래 마음이니라.

불기 2556년 4월 15일 덕숭총림 방장 설정

혜덕스님 법문

●평생을 빚쟁이로 살지 않으려거든● 묵거 혜덕스님 “물 한 모금 마시고 밥 한술 떠 넣으면서도 더불어 먹고 더불어 감사해야 하는 원리를 알아야 한다.

일부러 “부처님 감사합니다.

부처님께 회향합니다.

” 하는 생각을 지어서 하지 않아도 일상 속에서 깊이 감사하는 마음과 믿음이 있으면 자동적으로 모든 행동이 일체 중생, 일체제불과 같이 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살아가는 것이 그대로 회향이 된다.

아침 예불시에 국가의 은혜,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 베푸는 이의 은혜, 좋은 벗의 은혜를 명심하여 잊지 말자고 다짐하는 데 어찌 그 다섯뿐이겠는가.

이웃의 은혜, 땅의 은혜, 물 바람 불의 은혜 등 어느 것 하나라도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다.

모든 것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나 하나 잘나서 독불장군이라 할 것이 없으니 절로 둘 아닌 도리를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더불어 사는 존재이다.

혼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다.

자급자족도 실은 불가능하다.

모든 생명체는 베풀고 나누는 관계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렇다고 생명체끼리만 더불어 사는 게 아니라 의당 자연도 한 몫 톡톡히 거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 속에서 산다.

독불장군으로 살 수는 없다.

은혜 속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는 갚으면서 살아야 한다.

어떤 한정된 대상에 대해서만 갚으면 되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향해 갚으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흔히 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듣는다.

그것은 욕심을 억제하라는 의미이기 이전에 빚을 지지 말라는 뜻이다.

어느 한 순간이라도 나 이외의 것으로부터 뭔가를 꾸준히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인 이상 나의 삶은 순간순간이 빚을 지는 삶인 것이다.

고로 사는 동안에 빚은 늘어만 간다.

꾸준히 되갚지 않는다면 누구나 눈을 감는 순간에 엄청난 빚더미를 남겨 놓고 가게 된다.

그러므로 더 갖기를 바라지 말고 주어진 것에 만족할 줄 알라는 것이다.

더 갖겠다는 욕심은 빚을 더 지겠다는 것이니 어찌 일생을 통해 빚 잔치나 하고 살아가려 하느냐는 물음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분수와 만족을 넘어 은혜에 감사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성의를 다 기울여서 회향해야만 한다.

먼저 감사한 줄 알아야 갚을 마음도 생긴다.

감사한 줄 모르는데 베풀고 나눌 마음인들 생기겠는가.

실은 베푸는 것도 나누는 것도 없다.

오직 되갚음이 있을 뿐이다.

감사하게 느끼니까 의당 갚아야 하겠노라는 마음이 생긴다.

절로 무주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일상 속에서 감사할 줄 모른다.

특별하게 주고 받는 관계가 아니면 으례 그러려니 생각한다.

그래서 예불 때마다 오종대은(五種大恩)만이라도 명심하여 잊지말라고 가르친다.

얼마나 은혜를 모르고 살면 아침마다 이를 외우라고 했던가.

하물며 땅의 은혜, 물 불 바람의 은혜이겠는가.

쓰레기를 마구 버리고 공기를 더럽히고 물을 오염시키는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먼저 지금의 나 자신에게 감사해 보자.

내 정신이 바르고 사지가 멀쩡하다는 사실에 감사해 보자.

팔이 하나 없는 사람, 다리에 장애가 있는 사람, 몸에 병이 들어 고통받는 사람이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은 온전한 사지육신, 건강을 되찾는 일일 것이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나 자신에게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다음에 감사의 대상을 주변으로 확대시켜 보자.

내 가족 한사람 한사람이 감사한 존재로 마음에 떠오를 것이다.

내 이웃, 내 직장의 동료 중에도 감사하게 느껴지는 얼굴이 생각보다는 많을 것이다.

나아가서는 저 푸른 하늘도 감사하고 바람 물 불에도 감사할 일이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부루나존자는 부처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했다.

“남이 나를 비방한다면 그가 몽둥이를 들지 않음에 감사할 것이고 그가 몽둥이를 들고 덤빈다면 칼을 들고 찌르지 않는 데 감사할 것입니다.

그가 나를 찌른다면 죽이지 않는 데에, 그가 나를 죽인다면 옷을 벗게 해준 데에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나를 위해 베풀어 주고 나눠주는 데에 감사하지 못할 것인가.

감사할 줄 알면 공감하게 되고 공감을 하면 공생이 되고 공생이 되면 내게 기쁨이 찾아온다.

평생 빚지고 살지 않으려거든 주위에 감사의 마음을 보내자.

그것은 마땅히 해야하는 갚음이다.

돈관스님─문턱 하나 넘을 때도 원력을 점검해라

문턱 하나 넘을 때도 원력을 점검해라

-돈관스님-

부처님이나 스님들이 하시는 말씀을 법문이라고 합니다.

이 법문이란 글자에는 ‘글월 문(文)’이나 ‘들을 문(聞)’을 쓰지 않고

‘문 문(門)’자를 씁니다.

이것은 이 말씀이 읽을꺼리나 들을꺼리가 아닌

법으로 향해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은 귀로 들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글로 써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직접 걸어 들어가야 되는 문입니다.

또 그 문은 반드시 스스로 통과해야 하는 실천의 문이기 때문에

‘법 법(法)’자에 ‘문 문(門)’자를 써서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임을 뜻합니다.

어느 집에나 다 문이 있고 또 그 문으로 들어갈 때는

노크를 한다거나 인사를 한다거나 인기척을 하는 등의

적당한 예절과 절차가 있듯이 절에 오시기 위해

절문을 통과할 때에도 여러분이 반드시 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절문을 통과할 때 해야

할 것들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불교에서는 우주의 중심을 수미산이라고 합니다.

수미산을 기준으로 그 땅 밑을 지옥이라 하고,

수미산 기슭을 인간의 세계, 그 정상이 도리천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우주관이며 사찰은 이 수미산을

땅위에 재현해 놓은 공간입니다.

따라서 사찰의 문을 차례로 통과한다는 것은

번뇌와 고통의 세계인 지상에서 수미산을 오르듯

부처님의 세계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찰에는 수미산을 가상해 산 입구, 중턱, 절위에

세 가지 문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 세가지 문을 삼문이라고 하고 총문이라고도 합니다.

이 세 문은 수미산 입구에 있는 문을 일주문,

중턱에 있는 문을 사천왕문, 도리천이라고 하는 수미산 정상,

그 바로 위에 있는 문은 불이문, 또는 해탈문이라고 했습니다.

우선 수미산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일주문에 들어설 때는 합장하고

세 가지 서원을 해야 합니다.

‘인과응보를 믿겠습니다.

십선을 닦겠습니다.

기필코 성불하겠습니다.’

사천왕문에서는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고집을 버리겠습니다.

교만하지 않겠습니다.

탐내지 않겠습니다.

화내지 않겠습니다.

어리석게 살지 않겠습니다’의 여섯 가지를 발원합니다.

마지막 불이문, 또는 해탈문에 들어설 때에는

‘모든 것을 다 베풀겠습니다.

해탈을 하겠습니다.

어떠한 고통도 참고 견디겠습니다.

나날이 좋은 날이니 항상 즐겁겠습니다.

모든 번뇌를 잠재우겠습니다.

지혜롭게 살겠습니다.’를 발원해야 합니다.

그렇게 삼문을 통과하면 만나는 곳이 법당입니다.

진리가 가득한 곳입니다.

법당에 들어서서는 ‘부처님께 참회합니다.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스님들께 발원합니다.’

를 고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절에 들어 올 때는

꼭 이렇게 발원하면서 들어와야 합니다.

아무리 경전을 많이 외우고 법문을 많이 듣는다 해도

각각의 문에서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가졌을 때

비로소 진실로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일주문을 통과 할 때 가장 먼저 다짐하는 것이

‘인과응보를 믿겠다’입니다.

불교는 인과의 종교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는 법입니다.

뿌리는 만큼 거두는 것입니다.

부처란 깨달은 사람을 뜻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 보편타당한 진리는 바로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만큼, 행동만큼 거두어지고 돌아온다는 진리였습니다.

진리를 뜻하는 ‘법(法)’ 자는 ‘물 수(水)’변에 ‘갈 거(去)’자를 씁니다.

부처님의 법을 불법이라고 하는데 이 법이라는 것이

곧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처님을 어떤 분이라고 설명하십니까.

부처님께서는 삼라만상에 깃들어 있는

모든 보편타당한 진리를 깨우친 이입니다.

그 보편타당한 진리가 곧 인과응보였습니다.

따라서 인과응보를 믿겠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교의 어떤 수행이나 기도 보다도

중요한 신행의 출발이자 밑거름입니다.

불교의 수행은 모두 52단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 52단계의 첫 번째 10가지 단계가 십신, 즉 열 가지 믿음입니다.

이것은 초심자가 가져야할 열 가지 믿음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은 믿음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누구부터 믿어야 할까요.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남편을, 부인을 믿고 자식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안 된다면 절대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그 다음 이웃에 대한 믿음, 스님에 대한 믿음,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옛 스님들이 불공이나 49재를 지낼 때 ‘재를 지내야겠다’고

생각을 하는 순간에 이미 반은 지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이 절에 가는 날이니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절에 가야지’하고 마음먹는 순간

오늘 기도의 반은 벌써 이뤄진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믿음이 수미산과 같이 크고 굳건해야 합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믿음, 인과응보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다면

자기가 뿌린 만큼 거둘 것인데, 의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가사백천겁(假使百千劫)이라도 소작업불망(所作業不亡)이니

인연회우시(因緣會遇時)엔 과보환자수(果報還自受)’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좋은 공덕을 지으면 좋은 공덕을 받고 나쁜 행동을 하면

나쁜 과보를 맡는 것은 백천겁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세인과경』에서는

‘과거를 알고자 하면 금생의 모습을 보고

다음생의 모습을 보고 싶으면 금생에

여러분이 행하고 있는 일을 보라’고 했습니다.

과거에 지은 업이 그대로 올 것이고 금생에 행하고 있는 삶의 모습이

또한 다음 생으로 그대로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생에 잘 닦아 놓아야 합니다.

승찬 대사께서 남기신 『신심명』이라는 책을 보면

‘신심불이(信心不二)요 불이신심(不二信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둘이 아닌 하나라는 것입니다.

옛 중국에 천룡화상이라는 큰스님이 계셨습니다.

그 스님은 누가 도나 부처에 대해 물어보면

항상 손가락 하나를 들어보였습니다.

그 천룡 스님의 제자가 구지 선사인데 이 스님 역시 누가 물으면

스승처럼 손가락을 하나 내밀었습니다.

그것이 화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지 선사를 따르던 동자 하나가 어느 날인가부터 누가 뭘 물으면

스승을 흉내 내며 손가락을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구지 선사가 하루는 동자에게 도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동자가 손가락 하나를 쑥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구지 선사가 그 동자의 손가락을 잘라버렸습니다.

손가락이 잘린 동자가 깜짝 놀라 ‘엉엉’ 울자

구지 선사가 동자에게 다시 도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동자는 손가락이 잘린 줄도 모르고 손을 내밀었다가

그 자리에서 깨우쳤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스님들이 법문할 때 주장자를 세우는 것도,

불자를 들어 보이는 것도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화엄경』에 선재동자가 나옵니다.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다니다 마지막,

53번째 만난 사람은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이들을 스승으로 생각하고 부처님같이 생각하다보니

가장 먼저 만났던 사람이 53번째 선지식이었던 것입니다.

옛말에 아미타불을 10년 하면 내 자신이 아미타불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요즘에는 그 뜻이 왜곡돼 ‘도로 아미타불’이라며

실패를 뜻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10년을 하니 내가 아미타불이 된다는 뜻입니다.

불자들은 믿음을 항상 지녀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면 10가지 좋은 일이 생겨납니다.

믿음을 가지면 첫째 모든 것이 깨끗해지는 정화의 공덕이 있습니다.

둘째는 어려운 일을 결정 내릴 수 있게 되고,

셋째는 슬픔, 괴로움, 번민이 기쁨, 환희로 바뀝니다.

넷째는 남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다섯째는 항상 기쁨의 힘이 솟아나고,

여섯째 남을 존중하는 힘이 일어나고,

일곱째 많은 사람이 자신을 따르게 되고,

여덟째 찬탄하는 힘이 생기며,

아홉째 무너지지 않는 불기의 힘,

열 번째 성취의 힘이 생깁니다.

불자님들께서는 일주문에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시고

사천왕문에서 의심, 교만, 고집, 탐, 진, 치의

여섯 가지 마음을 다스리고

불이문에 와서는 육바라밀을 다짐해야 합니다.

사찰에 온다는 것은 단순히 부처님이나 스님 얼굴

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문 하나를 넘어 설 때에도 자신을 돌아보고 서원을 세우고

조금씩 스스로를 변화시키며 부처님의 세계로 조금씩 더

가까이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여러분 모두 오늘 내가 사찰에 올 때 어떤 마음으로 왔는지를 돌아보고

법당에선 참회와 감사와 발원을 다짐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