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서산문에 들어와

일입서문고로망 一入西門古路忘 한 번 서산문에 들어와 옛길을 잊었으니

수류수처몰사량 隨流隨處沒思量 흐르거나 머물거나 아무 생각 없다네.

산중세월수능기 山中歲月誰能紀 산중의 세월 그 누가 기억하랴.

기견괴음청우황 只見槐陰靑又黃 괴목나무 잎들이 푸르다 노래진다.

조선조 중엽 보응영허(普應暎虛 : 1541~1609)대사는 사대부의 가문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나 글을 잘 하였다. 8살 때 대학을 공부하고 그 뜻을 이해하였으며, 어른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15살 때 과거에 응시하여 낙방을 하고는 충격을 받아 인생무상을 느끼고 19살 때 출가를 한다. 실상사에 계시던 인언(印彦)스님을 은사로 축발을 하고 5년간 시봉을 하면서 경론을 열람한다. 이후 제방으로 다니며 선교를 두루 섭렵하다 마침내 묘향산 서산스님의 문하로 들어가 서래밀지(西來密旨 : 禪旨)를 터득하고 다시 천하를 주유하다가 65세 때 다시 실상사로 돌아와 대법회를 열어 경론을 강하였다. 그가 남긴 문집 <영허집>에는 주옥같은 시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위의 시는 서래밀지를 터득한 후 읊은 시로 원제목은 번뇌를 일으키던 모든 것을 잊었다는 망기(忘機)로 되어 있다. 사람 사는 것, 그저 세상을 관조 하면서 물이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10월 제83호

[불교용어사전]사성제(四聖諸)

제(諦)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진실, 사실, 진리등을 가리키는데 쓰이며, 동시에 엄숙 한 단어를 의 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성제는 “네가지 거룩한 진리”라는 말이다. 즉 고(苦) 집(集) 멸 (滅) 도(道)의 네가지를 설하여 이것을 신성한 종교적 진리로 삼고 있는데에서 사성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치 의사가 병을 치료함에 있어 병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원인을 알아 낸 다음, 건강한 상 태의 정상적인 표준을 알아서 거기에 맞는 치료 방법을 강구하듯이, “고→ 집→멸”을 알고 멸에 이 르는 바른길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고성제(苦聖諦):우리 인생의 현실은 고(苦)라는 것으로 경전은 8가지 괴로움(八苦)을 들고 있 다. “어떤 것이 고성제인가?” 생(生)하고, 늙고, 병들어, 죽고, 미운것과 만나고, 사랑하는 것과 헤 어지고,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오취온(五取蘊, 나라고 取着 된 몸과 마음)은 괴로움이다. 불교에서 “괴롭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인생에서의 행복을 전면 부 정한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일반적으로 물질적 정신적인 여러 형태의 행복을 인정하였다. 그러한 행복을 인정하고 찬양한 후, 그것들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쉽다”라고 하였다. 즉 무상한 것 은 무엇이든지 괴롭다는 속성을 가진 의미에서 괴로움인 것이다. 집성제(集聖諦):괴로움의 집(苦集)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 는가의 이유를 밝혀주고 있다. 집(集)아리는 술어는 원래 “결합하여 일어난다”는 뜻으로 한자의 뜻 대로 “모은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집기(集起)라고 하면 뜻이 더 잘 통할 것이다. 이는 괴로움 은 연기(緣起)한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다. 경에서는 집성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그것(集)은 재생(再生)의 원인이 되는 갈애로서 격렬한 탐욕에 묶여 있으며, 여기 저기 새로운 기쁨을 찾아 나선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욕애(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 유애(존재 그 자체와 형성에 대한 갈망), 무유애(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망)등이다” 인간에게 온갖 괴로움 과 윤회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여러가지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탐욕 욕망 갈애 열망등이다. 그러나 연기법에서 보았듯이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하나의 절대적인 원인 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고의 근본 원인으로 가주되고 있는 탐욕도 다른 것, 즉 느낌(受) 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며, 이 느낌은 접촉(觸)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어 이러한 과정이 반복적으 로 순환되면서, 결국 연기적 의미의 “집 (集, 緣起)”이 되는 것이다. 멸성제(滅聖諦):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는 집제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개념이다. 고의 원 인이 애 탐등의 집기라면 멸제는 그것을 없애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괴로움 또는 고의 지 속에서 해탈하고 벗어나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라면 무 명의 멸진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 제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을 깨우쳐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그러한 종교적 경지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지를 원적, 혹은 열반이라고 하여,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 고 생사를 초월하여 불생불명의 진리를 체득한 경지를 말한 것이다. 도성제 (道聖諦):도제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 곧 실천하는 수단을 말한다. 그 방법은 여덟가지의 수 행 방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가 곧 팔정도의 수행방법이다.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도 성제는 위에서 제시된 멸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즉 고의 멸진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항목 인 것이다. 종교의 생명은 말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는데 있다는 말이 있다. 걸어간다는 것은 곧 실천수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도성제의 구체적인 실천 항목으로서는 “성스러운 팔지(八 支)의 길”이라 불리우는 팔정도가 있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 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여덟가지 실천사항을 가리킨다. 사성제는 이처럼 고 집 멸 도의 네 가지 진리이다. 이 진리는 고제집제를 유전(流轉)하는 인과로 나타내고 멸제도제는 깨달음을 위한 인과로 나타낸다. 곧 고 집은 세간의 인과속에서 흘러가는 것 이고, 멸 도는 세간의 인과를 초월하여 깨달음을 얻는 행위이다.

한 그루 그림자없는 나무를

일주무영목 一株無影木 한 그루 그림자 없는 나무를

이취화중재 移就火中栽 불 속에 옮겨 심으니

불가삼춘우 不假三春雨 봄비가 오지 않아도

홍화난만개 紅花爛漫開 붉은 꽃 어지럽게 피어나리라

무엇이 그림자 없는 나무일까? 굳이 말하자면 식물의 나무가 아닌 마음의 나무다. 곧 일체 중생의 본래각성을 나무에 비유했다. 보리수는 깨달음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불교경전에 나오는 나무는 본래 피팔라(pippala)라는 나무인데, 석가모니가 그 나무 밑에서 정각을 이루고부터 깨달음을 이룬 나무라는 뜻으로 보리수로 부르게 되었다. 이 보리수가 사람의 마음 속에 심어져 있다. 음양에 관계되지 않으므로 그림자가 없고 불에 타지도 않고 물에 젖지도 않는다. 때문에 물이 없어도 이 나무는 자란다. 물론 계절에 따라 피는 꽃도 아니다. 봄비도 필요 없고 훈풍도 필요 없다. 불 속에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중생들이 번뇌와 욕망의 불길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번뇌와 욕망 속에서도 깨달음의 꽃은 핀다.

『소요당집』에서 하나 뽑은 이 시는 소요태능(逍遙太能1562∼649)스님의 작품이다. 그는 편양언기(鞭羊彦機)와 함께 서산문하를 대표하는 선승이며 탁월한 선지를 터득한 인물로 널리 추앙받았다.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모였는데, 그의 문하를 소요파라고 부르고 있다. 한때 부휴선수(浮休善修) 밑에서 대장경을 배우다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나중에 서산문하에 들어가 법을 전해 받고 금강산 오대산 등지에서 교화를 펴다 만년에 지리산 연곡사에서 머물다 입적했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5월 제4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