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唯識)의 심(心)과 분석심리학(分析心理學)의 정신(精神) – 두 개념의 분석적 비교를 중심으로

Freud로부터 시작하여 Jung을 거쳐 발전해 나가는 정신분석학 내지 분석심리학의 여러 이론들은 마음을 중시하여 일체 현상계를 설명해나가는 불교유식사상과 많은 비교연구를 통해 발전해왔고, 지금은 생물학적, 의학적, 사회과학적인 많은 이론들과 상호 연결되어 계속해서 연구 ․ 발전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연구들이 오늘날 불교적 심리치료라는 면에서 더욱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心)과 분석심리학적 입장에서의 정신(精神)의 개념에 대한 비교는 모든 연구의 출발점으로서 우선적으로 고찰되어야할 내용이 될 것이다.

따라서 본지에서는 유식사상에서의 심리분석이라 할 수 있는 팔식설(八識說)을 서구 분석심리학에서 주장하는 정신의 개념 및 분류와 비교하여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아보고, 심리치료 및 대극합일(對極合一)의 분석심리학적 목표와 해탈(解脫)이라는 불교적 목표와의 차이점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유식의 마음(心)과 분석심리학의 정신(精神)

-. 제6의식과 의식

유식에서의 의식(意識)은 전5식과 결합하여 대상을 총괄적으로 판단, 분별하는 심적인 작용을 가리키며 감각기관과의 관계여부에 따라 오구의식(五具意識)과 독두(獨頭)의식으로 대별하고, 다시 하위개념으로 더욱 세분화되어 설명된다. 하지만 분석심리학에서의 의식은 자아(自我)에 의해서 지각되고 있는 정신적인 내용물(內容物)을 가리키고, 이에 지각되지 않는 것은 무의식(無意識)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적 내용을 합리적 판단작용인 사고와 감정, 비합리적 판단작용인 감각과 직관에 따른 내용물로 나누고, 또다시 각각을 주체와 객체에 따라 내향성(內向性)과 외향성(外向性)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것은 서구의 이원론적 학문태도가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유식론에서는 의식을 그 성질에 따라 세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분석심리학에서는 그 성질에 관계없이 자아에 의해 지각되고 있는 정신적 내용물을 통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의식은 자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분석심리학적 자아가 의식의 내용을 이루는 동시에 의식이 의식일 수 있는 조건이 되고, 유식론의 자아는 의식의 소의근(所衣根)으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유식론의 제6의식과 분석심리학의 의식은 심적작용과 정신적 내용물이라는 약간의 개념적 차이를 가지지만, 각각 자아라는 관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된다.

-. 제7말나식과 자아

Freud의 정신분석학을 확장, 발전시킨 Jung의 분석심리학이론에서는 의식의 주체로서 자아(ego)가 외적인격인 ‘persona’와 무의식적 측면인 ‘shadow’의 모습을 동시에 가졌으며, 그것은 의식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사고, 감정, 감각, 직관의 작용을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자아관념은 의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에 전 인격의 중심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고 하였다. 따라서 분석심리학의 착각된 자아관념은 유식론에서의 아집작용(我執作用)에 의한 편계소집성(偏計所執性)으로서의 가아(假我)의 개념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개념상의 모습은 집착된 관념이란 측면에서 비슷할지도 모르나, 작용적인 측면에서 분석심리학적 자아가 네 가지 정신적작용을 직접 일으키면서 의식이라는 내용물을 이루는 것과 달리, 유식론의 말나식에 의한 자아는 대상세계를 대립적으로 분할해내면서 가립된 자아관념을 일으키고 있지만, 직접 정신적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제6의식에 의해서 표면적 정신활동을 일으킨다는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고 본다.

-. 第8아뢰야식과 무의식

분석심리학의 이론에서 무의식이 의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적인 부분을 포괄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범주상의 특징으로 인해 유식론의 아뢰야식(阿賴耶識)과 많은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Freud는 반사회적이고 비도덕적인 id의 내용들이 초자아(superego)의 작용으로 억압되어 무의식의 영역으로 쫓겨났다가 인간의 행위를 지속적으로 제약한다고 하였다. 또한 Jung은 Freud의 무의식관에서 좀 더 확대 발전되어 개인이 겪은 체험내용 가운데 잊어버린 것, 억압된 것, 의식에 도달하기 미약한 지각의 내용들이 개인적 무의식을 형성하며, 개인의 특성이 아닌 인류일반의 잠재된 요소를 집단적 무의식이라 보았다.

이것은 제8아뢰야식이 가지는 보존주체로서의 능장(能藏)과 보존처로서의 소장(所藏)의 기능과 거의 유사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인간의식과 판단에 영향을 주어 행위를 제약한다는 측면에서는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이라는 아뢰아식의 특성과 닿아있다. 다만 정신분석학과 분석심리학의 이론에서 본다면 반사회적이고 비도덕적인 내용들의 함장을 얘기한 Freud의 이론보다 확대된 Jung의 이론에 더욱 가깝다고 하겠다. 또한 유식에서 개체의 아뢰아식 종자가 삼세에 걸친 양중인과(兩重因果)로서 설명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분석심리학에서의 무의식은 집단무의식으로서 선험적의식(先驗的意識)을 상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삼세에 걸친 인과가 아니라는 측면에서 아뢰아식보다 그 범주가 좁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아뢰야식(阿賴耶識)의 견분(見分)을 제7말라식이 실재적 주체로 착각하는 것처럼 자아가 무의식적으로 투사된 심리적 상을 실재하는 사물로 착각하여 집착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나, 아뢰아식은 분석심리학의 무의식이 갖는 보상기능이 결여되어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대극합일(對極合一)과 해탈(解脫)

분석심리학 이론의 목표는 인간심성의 분석과 그 치료에 있다. 그 방법으로는 적극적명상법을 통해 깨어있는 상태에서 무의식의 내용인 환상상(幻想像)을 관조하고 직면하여 초월기능을 일으켜 대극합일(對極合一)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착각된 자아성을 버리고 분석심리학적 정신의 본질인 자기로 돌아감으로서 실현되는 것으로 자기화는 분석심리학적 목표이다. 이에 반해 제법(諸法)을 5위100법으로 분석한 불교유식의 목표는 유루(有漏)의 세계인 현상계를 분석하여 그 실상(實相)을 간파하여 무루(無漏)의 세계로 이끎에 있다. 결국 심리분석이라는 측면에서는 공통적인 취지를 가지고 있지만, 궁극적인 목표에 있어서는 오히려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유식의 목표가 조화와 전체성이라면, 해탈은 자기실현이라는 일차적 목표를 넘어 현상적 측면으로부터의 완전한 초월에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불교유식에서의 마음(心)과 분석심리학에서의 정신의 개념을 구성요소별로 대응하여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아보았다. 또한 두 사상의 목표로서의 대극합일적 자기화와 해탈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도 고찰해 보았다. 각각의 의식요소의 고찰에 있어서는 Jung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불교의 유식사상은 서구의 분석심리학과 많은 부분에 있어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그 분석방법이나 태도에 있어서는 상이점을 보이고 있고, 그 목표에 있어서도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음은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하지만 그 궁극적 지향점에 대한 논의가 아닌 인간심리의 분석이라는 측면에서 두 사상이 가지는 연결성은 앞으로 불교가 서구의 분석심리학에 상당한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의 두 사상의 정신분석적 개념에 대한 논의는 미래 심리치료학 발전의 초석으로서 계속적으로 연구 보완되어야할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오늘날 티벳의 명상수행이 서구의 뇌신경생리학과 만나 이미 그 효용성이 증명되고 있는 사실에서, 불교의 심층심리학인 유식이 서구의 분석심리학과의 소통과 발전적 모색을 통해 실천적 측면에서 불교심리치료와 같은 현실적 적용과 응용이라는 긍정적 측면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신경스님, 반야사, 월간반야 2010년 6월 제115호

축제의 나라

우리나라의 가을은 결실의 풍요로움과 이에 대한 감사의 축제 계절이다. 예전에는 산업이 단순히 농업에만 의존해 왔기에 추수 감사의 뜻으로 가을에 첫 수확한 햇곡식으로 제천의식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즈음은 산업도 다양해졌지만 농작물의 수확도 정해진 계절이 없어졌고 축제의 종류도 각양각색이다.

지금의 축제는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후 더욱 다양해졌고 많아졌다. 경상남도만 하더라도 홈페이지에 올라있는 축제의 수는 아흔일곱개나 된다. 기초자치단체인 시ㆍ군에서는 너 나 할 것 없이 경쟁적으로 축제를 만들어 인근의 시ㆍ군들과 더불어 일년 내내 축제 분위기다. 축제의 유형도 다양하다. 각 시ㆍ군에는 시ㆍ군민의 날이 있는데 이와 때맞춰 열리는 문화예술체육 대회는 기본적으로 어느 곳이나 다 있고, 지역의 문화예술단체나 문화원 등이 주관하는 예술제가 있고, 지역의 특산물을 홍보하는 행사의 성격이 짙은 도자기ㆍ단감ㆍ수박ㆍ미더덕ㆍ전어ㆍ고로쇠ㆍ야생차ㆍ사과ㆍ국화축제도 있다. 자연환경을 배경 삼아 관객을 끌어 모으는 벚꽃ㆍ진달래ㆍ온천ㆍ철쭉ㆍ공룡화석ㆍ억새축제가 있는가 하면, 역사나 문화유산을 내세워 한산대첩ㆍ당항포대첩ㆍ옥포대첩ㆍ의병ㆍ3. 15ㆍ오광대ㆍ서원ㆍ소싸움ㆍ연날리기ㆍ팔만대장경ㆍ표충비각ㆍ선비문화축제도 있다. 그런가 하면 역사 속의 인물의 출생지나 연고가 있는 지역에서는 이들을 내세워 노산ㆍ남명ㆍ논개ㆍ사명당ㆍ김달진ㆍ충무공제전을 개최하기도 한다.

이렇게 지방자치단체들이 경쟁적으로 잔치를 벌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순수하게 문화예술의 진흥이나 주민의 단합은 물론 사기의 앙양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지방자치의 가장 중요한 조건인 자치재원 즉 재정자립도를 높이기 위한 경제적 이유도 큰 몫을 차지한다. 지역의 새로운 문화유산의 발굴도 가능할 것이며,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역할도 한다. 체력 증진이나 교육적 효과를 통한 후손들의 자긍심 고취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사에는 순기능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대개의 경우 이들 행사는 천편일률적이고 대동소이하다. 체육대회가 있고, 전시회가 있고, 먹거리 장터가 있는가 하면 각종 물건을 파는 장사꾼들이 동원된다. 이들은 전국의 축제현장을 누비고 다니는 프로 장사꾼이다. 축제가 있는 곳에는 바가지 상혼이 항상 기다리고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이곳 축제나 저곳 축제나 다를 바 없다. 행사자체의 진부함이나 비창의적인 기획은 한번은 보러 갈지 모르지만 두 번은 속지 않는다.

이제 축제도 좀 달라져야 할 때가 되었다. 무조건 행사를 벌려놓고 보자는 식도 안 된다. 가능하면 행사를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알차게 치러야 한다. 자치단체장들이 혹시나 이런 행사를 벌여놓으면 다음 선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불필요한 예산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시민의 혈세를 아껴야 한다. 얼마 전 어느 고을 의 자전거축제의 일환으로 준비되었던 공연장에서 일어난 사고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축제는 축제다워야 한다. 그러려면 지역 주민이 가능한 많이 참여해야 한다. 소수의 요원이 기획하고 진행하고 참여하는 행사에 주민은 들러리이고 구경꾼이어서는 안 된다. 많은 주민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모자를 쓰고 나오든지 손수건을 흔들든지 아니면 독특한 신발을 신고 나오더라도 같이 참여해야 한다. 행사 내용도 창의적이고 좀 독특한 게 있어야 한다. 그곳 축제에 가지 않으면 볼 수 없다거나, 이런 놀이는 그 지역 축제가 최고라는 찬사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물건을 믿고 싸게 살려면 그곳 축제에 가면 된다는 믿음을 주는 행사가 될 때 그 축제는 성공한 축제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5년 11월 제60호

축구의 계절에

다시 축구의 계절이 돌아왔다. 2002년 서울발 거리응원이 4년이 지난 지금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뜨거운 열기는 그때와는 사뭇 다르다. 거리응원이 광장을 독점계약한 기업과 또 다른 미디어의 주도와 후원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면 방송들은 연일 과잉편성으로 축구 열풍의 국외자들을 짜증나게 한다.

이 짜증은 급기야 사람들이 축구에 들뜨고 환호하는 풍경과 이를 부추기는 주변 여건들을 싸잡아 파시즘의 이름으로 비판하기에 이른다. 솔직한 심경으로 월드컵 또는 축구 열풍이 민족주의나 상업주의를 부추기고, 국민이 아니라 자본이 응원한다는 비판도 무리는 아니다. 좀더 냉정해지면 정치나 경제나 사회적 제반 현안은 몽땅 축구에 파묻혀 버리고 얼핏보아 온 국민이 국가적으로 환호하고 열광하는 가히 병적이라 할 정도다.

환호하고 감동하는 시민들의 정서를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가와 자본의 이름으로 경기에 열광하는 집단행위에는 광적인 도취가 불안하게 어린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경기를 즐기고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면서 단합된 힘을 과시하는데는 스포츠 만한 것이 없고, 그 힘을 과시하는데 다소의 폭력적인 현상이 일어나더라도 지금 한국사회가 처하고 있는 구조적 정황을 인정하여 관대하게 보아주어야 하는가. 지금 우리사회는 알게 모르게 다수의 폭력적 바람에 시달리고 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싸움에 이기고, ‘법’ 위에 ‘떼법’이 있다는 조소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최근 사이버 공간에서 떠도는 내용 중에 어느 미국인이 본 한국ㆍ한민족에 대한 이야기가 괘씸하지만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드물게 보는 단일민족, 암 사망률ㆍ음주 소비량ㆍ양주 수입률ㆍ교통사고ㆍ청소년 흡연률ㆍ국가 부채 등 악덕 타이틀에서 세계3위권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 종족, IMF 경제위기를 2년 남짓만에 벗어나 버리는 희한한 민족, 자기나라 축구장은 텅텅 비워놓고도 월드컵 때에는 수백만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나라, 월드컵에서 단 1승도 못하다가 갑자기 4강까지 후딱 해치우는 미스테리 종족, 조기 영어교육비 세계 부동의 1위를 지키면서도 영어 실력은 100위권 밖의 나라, 물건은 비쌀수록 잘 사는 종족, 아무리 큰 재앙이나 열 받는 일이 닥쳐도 1년 내에 깡그리 잊고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민족, 해마다 태풍과 싸우면서도 다음해 꼭 같은 피해를 계속하는 대자연과 맞짱뜨는 엄청난 종족, 변변찮은 지도자들이 나라를 이끌어가면서도 망할 듯 망할 듯 안 망하는 엄청난 내구력의 종족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욕적(?)인 어구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언뜻 보아 수긍이 가는 점도 있었지만 부인하고 싶은 심경은 나의 알량한 애국심 탓일까.

누가 뭐래도 좋다. 우리 나름의 합리성과 자신감에 바탕을 둔 행위라면 그래도 좋다. 그러나 외적인 자본과 미디어의 충동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이라면 월드컵 이후도 생각해보자. 불안하고 피곤한 현실을 극복하고 타파하기 위해 축구의 힘을 빌린다면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관전하고 응원하고 내일을 맞을 준비도 아울러 하자.

김형춘 香岩 (반야거사회 회장) 글. 월간반야 2006년 7월 제6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