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와 대지가 눈앞의 꽃이요

산하대지안전화 山河大地眼前花 산하와 대지가 눈앞의 꽃이요

만상삼라역부연 萬象森羅亦復然 만상 삼라도 또한 그럴 뿐이네

자성방지원청정 自性方知元淸淨 자성이 청정한 줄 바야흐로 알았으니

진진찰찰법왕신 塵塵刹刹法王身 진진찰찰이 법왕의 몸이구나.

산하대지가 눈앞의 꽃이라는 것은 눈이 피로할 때 나타나는 헛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한자로 공화(空花)라 쓰기도 하는데 곧 허공 꽃이라는 말로 허망한 인연에 의해 나타나는 실체가 없는 것이란 뜻이다. 삼라만상도 그럴 뿐이라는 말도 산하대지가 허공인 바에야 그 속에 있는 만상이니 이 역시 허공 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허공 꽃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바로 자기의 본 성품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의 꽃이 아닌 허공자체와 같은 것, 이것이 바로 모든 공간을 이루고 있는 부처님의 몸이다. 시방을 다 포함하고 모든 시간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때로는 깨달음 자체인 각체(覺體)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의 본체라 하여 심체(心體)라 하기도 한다. 그대의 마음이 무한한 공간과 영원한 시간을 다 포함하고 있다면 이것을 믿겠는가? 이것을 믿지 못하면 부처가 될 수 없는 영원한 범부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이 시는 여말(麗末)의 고승 나옹선사가 지었다. ꡒ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ꡓ하는 의문을 품고 있다가 20세 때 출가를 한 스님은 이미 화두를 들고 절에 들어와 스님이 된 셈이다. 양주 회암사에서 정진하다 도를 깨치고 원나라 북경에 가서 지공화상을 만나 법담을 나눴다. 그 뒤 평산처림(平山處林)을 만나 그에게서 법의와 불자를 받고 다시 지공으로부터 인가를 받아 법의와 불자를 받았다. 39세에 귀국하여 여러 곳에서 법을 설했으며 나중에 공민왕의 청을 받고 궁중에 들어가 법을 설하기도 했다. 그런 후 52세 때 왕사가 도고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호를 받았다. 57세 때 우왕의 명을 받고 밀양 영원사로 가다가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시호는 선각(善覺)이었으며 목은 이색이 비문을 지었는데 그 비와 부도가 회암사에 있다.

지안스님 글. 눨간반야 2003년 10월

산중에 무엇이 있느냐고요

산중하소유 山中何所有 산중에 무엇이 있느냐고요

영상백운다 嶺上多白雲 산마루에 흰 구름이 많이 있지요

지가자이열 只可自怡悅 단지 스스로 즐길 뿐이며

불감지증군 不堪持贈君 그대에게 갖다 줄 순 없사옵니다.

이 시는 양(梁)나라 무제(武帝) 소연(蕭衍)의 친구였던 도홍경(陶弘景452~536)의 시이다. 그가 구곡산(九曲山)에 들어가 칩거해버리자 무제가 그를 불러내기 위하여 산중에 무엇이 있어 나오지 않느냐고 묻자 이에 답해주면서 지은 시로 알려져 있다.

도홍경은 일찍이 왕실에 들어가 왕손들을 가르친 인연이 있어 소연과도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산중에 들어가 있는 도홍경을 무제는 국사를 펴는 정치의 참모로 여겨 그의 고견을 청취하려 하여 도홍경을 산중재상(山中宰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소연이 제(齊)나라를 공격하고 새로 나라를 세울 때 양(梁)이라는 국호를 도홍경이 지어 주었다.

도홍경은 타고난 자질이 많아 사상가로 알려지기 이전에 시인이자 서예가였고 의사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한 때 양생술에 심취해 도교를 연구 도교사상을 체계화 하는 데 공을 남기고 『진고(眞誥)』, 『등진은결(登眞隱訣)』 등의 유명한 도교의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불교에도 조예와 관심이 많아 만년에는 불교의 오계(五戒)를 지키면서 생활하기도 하였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9년 6월 제 103호

인터넷에 길들여진 얄팍한 인간

요즈음은 어떤 좌석에서 어떤 주제의 이야기가 나와도 허술한 사람을 보기가 힘들다. 다들 한마디씩 거들지 않는 사람이 없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교육이든 국제정세든 간에 저마다 전문가처럼 말한다. 다들 자기 나름의 주장이 분명하다. 여기엔 기본적으로 교육의 영향도 있겠지만 매스컴의 영향도 크다고 본다. 그러나 작금에 와서는 다른 매스컴보다 인터넷의 영향이 그 무엇보다 큰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일컬어 ‘인터넷에 길들여졌다’ 또는 ‘인터넷에 중독되었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러다 보니 크게 깊이 있고 체계적인 지식은 아니지만 간단히 한마디씩 던지는 말로서는 일견 전문가와 구분이 힘들 수도 있다.

인터넷의 위력은 지난 날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문’ 때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는가. 순기능도 무시할 수 없지만 역기능도 또한 만만찮다. 지난 달 중순 모 일간지의 기사에서 읽은 이야기다. 미국 미시간대학 의과대학 교수이자 블로거(blogger)인 ‘브루스 프리드먼’은 이제 더 이상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는 못 읽겠다고 털어놨는데, 이유인즉 ‘인터넷에서 수많은 단문(短文) 자료들을 훑다보니 생각하는 것도 스타카토(staccato)형이 되었다’며, 블로거에서도 3~4단 정도의 단락이 넘는 글은 이제 부담스러워 건너뛰게 된다고 하소연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터넷에 중독되다시피 한 사람들은 인터넷의 여러 기능 중에서도 수많은 정보를 순식간에 찾아주는 검색기능에의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한때는 우리가 일상의 문제해결을 위해 필수적인 화두가 ‘Know how(어떻게 해야 하지?)’였는데, 작금의 정보화사회에서는 ‘Know where(지식 정보가 어디에 있지?)’로 바뀌었으니까 그 정보를 찾기 위하여 책을 뒤질 필요도 없고 얻은 정보를 분석하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이 인터넷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해결된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도 검색엔진이나 웹사이트가 다른 정보채널과 마찰을 일으키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나 이들의 목표는 분명하다. 세계 최대의 검색엔진 ‘구글(google)’의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은 ’세계의 모든 정보를 우리의 뇌 혹은 그보다 더 영리한 인공두뇌에 직접 연결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문제는 이렇게 해서 인터넷에 중독된 인간의 두뇌가 ‘생각하고 고뇌하고 사색하는 인간의 기능’을 앗아간다는 사실이다. 골치 아프게 생각하고 책을 뒤지고 선지식에게 물어보고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인간 본래의 모습과 사유방식을 변혁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시체말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닌 ‘나는 검색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의 두뇌작용과 사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하는 IT혁명은 지금까지의 깊이 있고 폭넓은 사고를 통한 인간 대신 어쩌면 사유공간이 좁아진 얄팍한 인간형을 새로이 탄생시키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최근 학생들의 과제물이나 취업 때의 자기소개서도 고민할 필요 없이 인터넷에 들어가 이미 다양하게 만들어진 것 가운데서 자기 기호에 맞는 것을 고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특히 현대와 같이 속도 개념 즉 촌각을 다투는 시간을 생명으로 하는 시대에선 누가 더 빨리 인터넷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검색하여 활용하는가 하는 것도 삶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이러다 보니 사람의 성격도 경박하고 조급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참고 견디며 기다릴(堪忍待)’ 줄 아는 인간의 미덕이 사라질까 두렵다. ‘대집경(大集經)’에서 부처님께서는 ‘인욕(忍辱)은 세상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이니 안락에 이르는 길이다. 인욕은 몸을 지켜주니 성자의 기뻐하는 바다….’ 라고 하셨으니 인터넷을 통해 조금 빨리 이루고 남보다 앞서 가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영원한 안락과 깨달음을 저해한다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김형춘 香岩(반야거사회장, 창원전문대 교수) 글. 월간반야 2008년 8월 제9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