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고단할 때 필요한 것은 수행정신, 바로 ‘진리의 빛’

어두운 밤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나 횃불이다. 부처님이 중생을 위해 하신 일이 밤길 가는 나그네를 위하여 횃불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 이 간명한 비유로 우리는 불교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내가 가는 길을 바로 보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바로 보려면 내 마음속 생각의 어둠이 없어지고 밝은 지혜의 마음이 되어 있어야 한다.

한 개인의 인생살이에 있어서도 때로는 어둠의 장애 때문에 길을 잃고 헤매거나 그릇된 처신을 하는 수가 자주 있다. 때문에 빛을 따라 가면 올바른 길이 보장되며 실수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

어둠 때문에 길을 잘못 보고 뜻하지 않는 실수를 범하여 명예의 실추를 당하는 황망한 일도 우리 사회에는 많이 일어난다. 인생을 ‘장애물 경주’라고 말하듯이 이 세상 사람들의 삶 자체에 수많은 장애가 있다. 이러한 장애는 대부분이 마음의 어둠 때문이다.

마음의 어둠은 삼독(三毒)이라 하는 욕심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이 근본이 되어 일어나는 심리적 독소이다. 따라서 수행이란 이 독소를 없애는 해독작용이라 할 수 있다. 선근이 부족하면 곧잘 이 삼독에 중독되어 삶의 가치를 잃어버리는 수도 있다.

“똑같은 물을 소가 마시면 우유를 이루지만 독사가 마시면 독을 이룬다” 하였다. 부처님이 밝혀 놓은 횃불의 빛을 따라 살면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불의와 비리, 부정부패에 관한 뉴스가 속보가 되어 터져나오는 요즈음, 도를 실천하며 진리의 빛을 따라 살아가던 옛 선인들의 고고한 수행정신이 새삼 그리워진다.

생활이 고단할 때, 삶의 무게가 무거워질 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수행정신이며 이 수행정신은 바로 마음에 빛이 번뜩이는 밝음 그 자체인 것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2년 4월 137호

임오년의 서원

‘올해는 복 많으라 뜻대로 살아지라/ 남북에 나뉜 형제 얼싸안고 일어서라/ 향 피워 두손 모으며 하늘 우러 고하네/ …’ 월하 (月下) 이태극 님의 새해맞이 시조 ‘영신부(迎新賦)’의 일부다. 이 글이 쓰여진 지가 얼마나 되었을까. 그래도 이 원을 이루지 못함은 무슨 연유일까. 또 해가 바뀌어 이 시를 되뇌어본다. 앞으로도 또 얼마나 긴 세월동안 이 시가 생명력을 지닐지 걱정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시간에 쫓기고, 일에 밀리고, 돈에 쪼들리며 산다. 사람을 만나려고, 사람을 피하려고 정신 없이 뛴다. 피로회복제를 마셔가며, 보약을 달여먹으면서, 심지어 자기 팔에다 스스로 영양제를 주사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살다보니 정말 꽃향기를 맡아본 적도, 누구를 사랑해 본 적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여유도 갖지 못한다.

그러다 해가 바뀌어 ‘입춘대길 여의(立春大吉 如意), 건양다경 형통(建陽多慶 亨通)’ 등 입춘방이 나붙으면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새해의 원을 세우고 성취를 빈다. 제발 이 해에는 보통사람들의 소박한 기원이 외면당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하심(下心)의 중도(中道)’를, 가정적으로는 ‘건강한 화목’을, 직장에서는 ‘화합의 바탕 위에 변화를 통한 창조’의 원을 세웠지만, 그보다 나라와 우리 사회가 더 걱정되는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기우일까.

최근 노동계나 정치계의 불안한 모습을 보면서, 지방선거ㆍ국회의원 보궐선거ㆍ교육위원 선거ㆍ연말의 대통령 선거 등의 즐비한 선거에다, 월드컵ㆍ아시안게임 등 국제행사 까지 겹쳤으니 이 해를 무사히 넘겨야 할텐데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엎드려 바라건대 정치하는 사람들은 ‘원칙 있는 정치’를 하여 보통사람이 수긍할 수 있도록 해 주길 빈다. 나라의 백년대계를 맡고 있는 교육부 장관이 4년에 7명이나 바뀌어 평균수명이 8개월이란 기록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가장 국민이 우려하는 경제도 ‘도덕성’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최근엔 경제계 일각에서 참회론 까지 나오는 걸 보면 기대해 봄직도 하다.

특히 우리 교육은 ‘인격 있는 교육’으로 중심을 잡아야 한다. 교육현장이 난장판이니, 놀자판이니, 죽을판이니, 미칠판이니 하여 총체적으로 ‘깽판’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을 때는 당장이라도 교단을 떠나고 싶지만, 그대로 두면 국가와 국민만 ‘죽을판’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끝으로 우리 종교계도 세속화를 막아야 한다. ‘희생이 있는 종교’가 되어야 한다. 옛 어른의 말에 ‘월계부족(月計否足) 세계유여(歲計有餘)’란 말이 있다. 당장 눈앞의 현실적인 계산으로는 부족하고 손해가 될지 모르지만, 멀리 앞을 내다보면 득이 되고 이익이 된다는 뜻이리라. 조금은 여유를 갖고 손익을 따지지 않는 보시하는 삶이 절실히 요구된다는 말이다. 더불어 올해엔 우리 종단에서도 진정 나라와 겨레의 사표가 될 새 종정이 탄생하실 것을 기대해 본다.

넉두리가 길어지면서 욕심이 묻어 나온다. 무명의 업보 속에서 생사에 유전하고 있는 중생의 고통과 슬픔을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본원력을 의지해 치유하고 나아가 불국정토의 이상이 실현되도록 하는 간절한 염원이나 가슴깊이 새기련다.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2년 3월 (제16호)

갈마( 磨)

카르만의 음역. 검모(劍暮). ①업을 짓는 것. ⇒ 업(業). 출가 수행자가 수계(受戒)하거나, 참회(懺 悔)하는 의식을 행할 때의 작법(作法). 갈마금강( 磨金剛)의 줄임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