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학(Ecology)이 미래를 연다

지금으로부터 꼭 4년 전 8월. ‘반야시론’에서 필자는 ‘인간을 위한 생태주의’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생태계의 파괴가 ‘자연은 인간 없이도 계속 존재할 수 있지만 인간은 자연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에 미치면 정녕 위기에 처한 것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한 기억이 난다.

오랫동안 일반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생태학이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생물학 가운데 중요한 분야의 하나로 부각되었다. 인구팽창ㆍ식량문제ㆍ환경오염,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사회적ㆍ정치적 문제들이 대부분 생태학적 문제와 연관됨이 분명해졌다.

생태학이란 말은 생물과 그를 에워싼 환경을 다룬 것이다. 생물과 그들의 환경 사이의 상호관계 및 생물 상호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자연의 경제학 또는 생태계 생물학 등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오늘날 생태학은 어떤 특정 지역에서 상호작용하는 생물 및 환경으로 구성되는 기능적 단위인 생태계의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생태계는 영양소가 순환되고 에너지가 흐르는 비 생물요인과 생물요인을 모두 포함한다. 이러한 순환과 흐름을 수행하기 위하여 생태계는 토양ㆍ물ㆍ영양염류 사이에 밀접한 상호관계가 유지되어야 하며, 생산자ㆍ소비자ㆍ분해자를 구성원으로 가져야 한다. 또한 생태계는 먹이연쇄라고 하는 일련의 먹고 먹히는 관계, 이용과 전환의 관계를 통해 에너지의 흐름 및 물질의 순환을 유지함으로써 기능을 발휘한다.

얼마 전 캐나다를 여행했을 때 안내자로부터 들은 이야기 가 생각난다. 록키와 빙하를 보기 위해 원시림인 국립공원을 지났다. 이곳의 숲은 자연적으로 사태가 나서 쓰러지든, 바람이 불어서 부러지든, 수령이 오래되어 말라죽든 간에 일체 인위적으로 치우거나 손대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자연 그대로 두고 생태계의 변화를 관찰하고 복원되는 것을 연구하기 위함이라 했다. 영양소가 순환하고 에너지가 흐르며, 먹이연쇄가 일어나고 천이가 이루어짐을 살피는 것이다.

이처럼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학자들이 모이면 그저 환경파괴를 고발하고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며 개발을 성토하는데 급급했던 생태학의 연구가 이즈음 급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태학과 환경과학이 21세기 학문의 중심에 들어서고 있다. 지금 세계적인 미래학 포럼은 앞으로 20~30년 간 세계시장을 주도할 산업으로 ‘환경산업’과 ‘에너지산업’을 꼽는데 거의 의견일치를 보고 있다. 앞으로 10~15년 내로 IT시장은 그 규모가 크게 줄어들 것이고 대부분의 제조업은 나노과학의 영역으로 재편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특히 지구온난화에 따른 세계기후변화가 적어도 21세기 전반부의 산업과 학문을 주도하리라고 보는 것이다.

지난 6월에 내한하여 수 차례 강연과 대담 등을 가진 세계적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IT 다음은 생태학 … 복지ㆍ건강이 다가올 시대의 화두”라고 하면서 생태학을 비롯하여 복지와 건강에 관련된 분야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할 뿐 아니라 우리를 먹여 살릴 차세대 주력산업으로서 더없이 중요하다고 했다.

지금 우리사회도 생태학(Eco)이 우리의 미래라는데 이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IT와 BT가 생태학, 건강과학, 사회복지학 등과 융합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대학에도 ‘에코 과학부’가 신설되지 않았는가. 학문하는 사람 뿐 아니다. 기업도 사회도 빨리 변해야 한다. 이러한 생태학의 본격적 연구와 이 연구를 바탕으로 한 차세대산업이 어쩌면 너무나 독선적이고 인간중심적이며 물질주의에 사로잡힌 현실에 쐐기를 박고, 뭇 생명의 존귀함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주신 부처님의 자비를 크게 베풀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김형춘 香岩 (반야거사회 회장·창원전문대교수) 글. 월간반야 2007년 8월 제81호

맑은 새벽 나뭇가지

청신고수앵류명 淸晨高樹鶯留鳴 맑은 새벽 나뭇가지 높이 꾀꼬리 울음

문이하심아이경 問爾何心我耳驚 묻노니, 네 무슨 마음으로 내 귀를 놀라게 하냐?

원득원통무애력 願得圓通無碍力 원컨대, 막힘없는 원통의 힘을 얻어

보문진성불문성 普聞眞性不聞聲 널리 진여의 본성을 듣고 소리는 듣지 말자.

오암(鰲巖 1710~1792)대사는 이조 중엽의 스님이다. 시를 잘 썼던 스님으로 유명하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문단에 데뷔한 승려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문집 『오암집』은 시집이라 할 수 있는 문집이다. 시가 270여 수 수록되어 있고 문은 14편에 불과하다.

오암 대사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상하여 학문의 길에 들어섰다가 21살 때 모친의 상을 당해 인생무상을 느끼고 출가하여 청하 보경사(寶鏡寺)에서 스님이 되었다. 그때의 법명은 의민(毅旻)이었다. 청하의 오두촌(鰲頭村)에서 태어나 이 인연으로 자호를 오암이라 하였다.

새벽 꾀꼬리(曉鶯)라고 제목을 붙인 이 시는 꾀꼬리 울음을 듣고 듣는 성품인 문성(聞聲)을 듣는다는 오도(悟道)의 경지가 피력되어 있다. 이는 『능엄경』의 이근원통(耳根圓通)에 나오는 말로 성진(聲塵)인 소리를 들을 때 소리를 듣지 말고 듣는 것이 무엇인지 그걸 알라는 말이다. 이를 반문문성(反聞聞性)이라 한다. “꽃을 보고 색이 공함을 깨닫고 새소리 듣고 듣는 성품을 밝힌다”는 시구(看花悟色空 聽鳥明聞性)처럼 보고 듣는 경계에서 진여본성을 찾는 것이 수행자의 본분공부다.

만약 누군가 도를 닦는다고 하면 닦아지지 않는다

약인수도도불행 若人修道道不行 만약 누군가 도를 닦는다고 하면 닦아지지 않는다.

만반사견경두생 萬般邪見競頭生 온갖 그릇된 소견만 다투어 일어날 뿐

지검출래무링물 智劍出來無一物 지혜의 칼을 빼내 한 물건도 없게 하면

명두미현암두명 明頭未現暗頭明 밝음이 오기 전에 어둠이 밝아지리.

“도를 닦는다고 하면 도를 닦지 못한다.” 이 무슨 말인가? 설명하자면 도에 들어맞는 마음은 생각을 앞세우는 유위심이 아닌 무위심란 말이다.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설치는 마음은 도를 닦는 마음이 아니다. 이런 저런 계교를 가지고 도를 행하려 해 보아야 그릇된 소견만 다투어 일어날 뿐이라 하였다. 일체의 관념에서 벗어날 때 도에서 나오는 밝음을 보게 된다. 그 밝음은 바로 어둠이 없어진 것일 뿐이다.

임제종을 수립한 임제의현(臨濟義玄:?~867)선사의 임제록에 나오는 시이다.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한 임제가풍이 엿보이는 시로 살활자재(殺活自在)한 기백이 있다고 평가 받는다. 스승 황벽에게 법을 물으려다 세 차례에 걸쳐 방망이로 얻어맞았다는 삼도피타(三度被打)의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