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문화

몇 달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6.2 지방선거도 거대한 폭풍우가 지나간 듯 고요만 남겼다. 서민들은 다들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정치권은 책임이니 논공행상이니 하면서 전당대회 준비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 선거는 당초엔 여당의 압승으로 싱겁게 끝나리라던 예상을 완전히 뒤집고 갖가지 이변을 속출하면서 야당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선거 결과에 대한 분석도 갖가지였지만 현 정권에 대한 유권자들의 준엄한 심판이라는 의미 외에 새로운 리더들의 출현이라는 주목할만한 현상도 함께 만들어냈다.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선거는 후보자 개인의 ‘인물’ 됨됨이를 비교하는 인물론과, 각 정당의 정강 정책인 공약의 대결이 이슈로 떠오르는 게 보통이었다. 거기다 심심찮게 이념 논쟁이 끊이질 않았는데 속되게 표현하면 ‘색깔론’이고, 바르게 표현하면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었다. 대개 지구촌의 정치 선진국들도 인물과 정책, 그리고 보수와 혁신 대결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의 우리나라 지방선거는 어떠했을까. 한마디로 인물과 정책, 이념보다는 현 정권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심리가 더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집권 여당의 국정 운영 미숙과 세종시, 4대강 사업 등에서 보여준 독선적 행태에 대한 따끔한 충고가 아닌가 싶다. 아울러 천안함 사건에 대해 정부와 여당이 보여준 태도가 오히려 역작용, 역풍으로 작용한 것 같다. 우리 국민들은 어떤 의도를 가진 ‘꼼수’ 정치를 먼저 읽고 알아볼 정도로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막후 조력자로 나섰던 미국인 ‘데이비드 모리’는 “투표행위의 핵심적인 동인은 두려움이다.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준 다음 대안을 내놓는 것이다. 정치 캠페인의 승리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찾고, 희망을 불어넣는 것이 비결”이라고 「알파독」에서 설파했다. 이번 선거의 마지막 2,3일 동안에 은밀하게 그러면서도 강하게 먹혀 들어간 구호가 있다면 ‘1번 – 전쟁 VS 2번 – 평화’ 였던 것 같다. 천안함 사태에서 보여준 집권 여당의 남북한 대결구도를 통한 ‘전쟁의 두려움’을, 지난 정권 10년 간의 남북화해정책에서 보여준 ‘평화’를 이슈로 내건 것이다. 유럽 재정위기와 천안함 사태가 겹쳐 유럽계가 중심이 된 외국자금은 한국을 빠져나가기 바빴고, 천안함 사태 조사 결과가 발표된 이후 ‘전쟁불사’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증시는 폭락했고 환율은 요동쳤으니 말이다.

여기다 외국발(?) 악성 루머가 인터넷을 타고 들어와 2, 30대들에게 전쟁에 대한 불안심리를 키워주고, 이들의 부모들에게까지 전쟁바이러스는 전파되어 간 것이다. 이에 이기적인(?) 젊은 세대들이 대거 투표장에 나간데다 유권자의 중심 축이라고 할 수 있는 40대 마저도 현 정권을 믿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고 분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선거는 민주사회에서는 잔치 분위기여야 한다. 그러자면 정정당당한 파인플레이여야 한다. 그런데 이번 선거는 ‘묻지마 선거’라든지 ‘돌풍 선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정당 공천과 무관한 교육감이나 교육의원 선거까지 이 돌풍 속에 휘말려 ‘인물 됨됨이’나 ‘공약’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비명횡사’한 후보도 많았다고 한다.

이처럼 부정적인 면과 함께 ‘선거 혁명을 통한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을 열었다’고 희망적인 예언을 하기도 한다. 40대와 50대의 젊은 이미지에 걸맞은 정치인들의 대거 등장으로 자연스럽게 차세대 리더군들이 형성되고 새로운 정치문화와 판도를 짜 주길 기대하는 분위기도 있다. 바라건대 진정한 차세대 지도자가 되려면 성장과정이나 교육받은 과정 뿐 아니라 사회생활을 통해서 얼마나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살았는지 반드시 검증을 거쳐야만 할 것이고, 또한 이런 지도자를 만들어내는 선거 역시 ‘이변’이나 ‘돌풍’이 아닌 ‘예측 가능한 민주주의의 잔치’가 되어야 한다.

김형춘 교수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7월 116호

멀리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곳

수리무인도(數里無人到) 멀리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곳

산황시각추(山黃始覺秋) 산이 단풍들어 가을인 줄 알았네

암간일각수(巖間一覺睡) 바위틈에 한 숨 자다 깨어 보니

망각백년우(忘却百年憂) 사는 걱정 모두 다 날라 가버렸네

선림승보전(禪林僧寶傳)에 수록되어 있는 이 시는 지극히 평범한 시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탈속한 산거인의 맑은 서정이 스며 있다. 부용도개(芙蓉道楷)스님이 지은 시인데 스님은 중국 송나라 때 조동종의 스님이다. 생몰 연대는 1043∼1118년.

인구가 과밀하여 사람 만나는 것이 부담이 되는 것 같은 현대의 생리에서 볼 때 은자의 안일무사가 오히려 부럽기도 할 것이다. 인가를 멀리 벗어난 깊은 산중. 은거하고 사는 사람 이 있어 날 가는 줄 모르고 사는데, 어느 날 산에 단풍이 들어 산색이 울긋불긋 변하는 것을 보고 가을이 온 것을 알았다. 하지만 계절이야 으레 오고 가는 것, 할 일 없어 바위틈에 누워 낮잠 한숨 잤더니 무심한 산이요 무심한 하늘이라, 사는 걱정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 공연히 철학하는 사람들이 인간에게 불만을 가지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만족하는 돼지보다 불만 하는 인간이 되라”고 했지만 만족은 뭐고 불만은 뭐냐. 그대로 산 속에 한 그루 소나무가 되어버린 것을.

은자송(隱者頌)이라 할 이 시는 생존경쟁을 초월한 달인의 노래다. 비록 우리는 현실의 노예가 되어 있지만 그러나 누구 없이 한 생각 돌이키면 나 역시 은자요 도인이다.

지안스님 해설. 월간반야 2002년 11월 (제24호)

우리시대의 우상

월드컵 축구 열풍이 온 세계를 달구고 있다. 참으로 열광적인 사람들의 함성이 실제 경기장이 아닌 곳곳의 거리에 있는 광장에서도 터져 나오고 있다. 누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거리에 나오게 했는가? 지구촌의 축제가 어디 한 두 가지뿐이리오 마는 최대의 응원인파를 모이게 하는 것은 역시 월드컵 축구인 것 같다. 지난 2002년도에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개최된 월드컵 축구 경기 때부터 나타난 특이한 현상은 수많은 군중이 광장에 모여 응원전을 펼치며 ‘대한민국’ 하고 국호를 외치며 승리를 기원하는 새로운 응원문화가 생겨 세계를 놀라게 했다는 점이다. 가히 놀라운 열정을 보이면서 응원의 함성이 나라 안팎을 울렸던 것이다. 지금도 독일에서 열리는 월드컵의 열풍은 세계를 풍미하고 있다. ‘붉은 악마들’을 위시해 경기장을 찾아간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국내의 거리 응원전에 모이는 인파도 바다를 이룰 정도가 되어 경기 때마다 응원의 함성이 하늘을 울린다.

생각해 보면 응원이라는 이름 아래 너나없이 함께 모여 신명나게 구호를 외치며 심지어 밤을 새게까지 하는 이러한 자발적 행사는 어디에도 없을 것 같다. 다 같이 목청을 높여 외쳐대는 저 장엄한 합창은 어떤 명연설보다 뛰어난 애국의 웅변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며, 마치 힘을 합쳐 애국가를 부르는 국민의 가장 우렁찬 목소리라 할 수 있겠다.

간간히 TV를 통해 경기장면과 응원 장면을 보아온 나는 왜 스포츠 경기 하나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열광 하는가 생각해 보았다. 단순히 일상의 피로에 젖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라고만 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그러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군중 심리에 휩싸여 무언가 외쳐보고 싶은 충동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한 사람 모이는 장소에 끼어들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사람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어떤 정황의 배경에 의해서 시대문화는 언제나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다. 이 시대 우리가 겪고 있는 삶의 애환은 풀리지 않는 카타르시스의 후유증에 의해 무언지 모르게 답답해져 가는 억압심리가 사람 가슴을 화석화 시키고 있다. 어딘가 뛰쳐나가고 싶은 돌파심리도 가슴 깊이 도사리고 있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무거워진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언제나 이상적인 동경의 세계를 꿈꾸며 사는 인간은 환상의 꿈이 현실에 부딪쳐 깨어지는 좌절의 아픔도 자주 맛본다. 하지만 순간의 낙천을 누리고 자신의 기분을 최대로 살려 줄 어떤 매개체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하다. 다시 말하면 어떤 우상을 갖고 그것에 의해 자기만족의 카타르시스 해소를 원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우상은 윤리적 도덕적 구속을 싫어한다. 철학적이거나 사변적인 사색이나 이론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현대의 우상은 우선 내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고 유행처럼 많은 사람의 관심의 대상이 되며 인기가 있는 것이라야 한다.

베이컨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우상을 말했다. 종족의 우상에서 동굴의 우상 그리고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을 이야기 했다. 이러한 우상들을 가지고 역사를 따라 내려왔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우상은 과거의 우상을 바꿔버렸다. 스포츠가 하나의 우상이 되었고 인기 있는 연예인이 또한 우상이 되는 시대다. 이른바 스타플레이어 한 사람이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의 관심이 되고 인기가 높아진다. 현대의 우상은 다분히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모드로 변해간다. 종교적 우상이 대중의 관심을 끄는 도수는 점점 낮아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 우상은 불충분한 자신에 대한 호도(糊塗)심리에서 출발하는 경향이 있다. 우상에 빠지는 것은 이성적 판단과 건전한 지혜를 상실할 위험이 있는 것이라고 심리학자들은 말하기도 한다. 스스로 우상이 되어 인기를 한 몸에 누리고 많은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 우상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상은 남의 관심과 지지에 의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상은 지극히 주관적인 개인의 선호도에 따라 일어나므로 공정한 객관적 가치를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다분히 감정적인 일방적 선호에 의해 군중이 한데 어울리는 일종의 피플파워(people power) 현상이 문화적 가치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인간적 우호의 성숙도가 있어야 한다. 어떤 면에서 승패를 다투는 편 가르기의 일방적 응원이 스롯머신을 움직이는 도박적인 근성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란 말이다. 스포츠에 있어서 승패는 게임 구성의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다.

16강의 좌절된 한국 축구의 불운이 다시 우상이 되어 국민적 사랑을 지속적으로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더 나은 실력 연마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다만 승부의 근성으로 사는 세상의 역학적 구조가 패배를 무시하는 오도된 선입관을 유발하지만 패배에도 아름다움은 있는 법이다. 때로는 이겼다고 우쭐거리는 마음보다 지고 겸손해 지는 마음이 더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7월 제6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