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개인 남산에

우수남악권청람 雨收南岳捲靑嵐 비개인 남산에 아지랑이도 걷히고

산색의연대고암 山色依然對古庵 산 빛 의연히 옛 암자를 마주하네.

독좌겅관심사정 獨坐靜觀心思淨 고요히 홀로 앉아 바라보니 마음마저 맑아져

반생견괘칠근삼 半生肩掛七斤杉 이렇게 반평생 어깨에 장삼 걸치고 살았네.

「산당우후(山堂雨後)」라고 제목이 붙어 있는 이 시도 서산대사의 제자인 일선정관(一禪靜觀1533~1608)이 지었다. 비온 뒤 절간에서 산색을 바라보다 심사가 일어나 반평생의 생애를 돌아보며 조용히 심경을 읊어 놓았다. 어떤 면에서 생각해 보면 사람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사는가 하는 것은 어느 개인의 인생살이의 객관적인 정황으로 화폭에 그려진 그림의 내용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한 평생을 산속에 살면서 수도에 종사한 사연 속에도 숱한 애환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깨에 장삼 걸치고 살았다고 자기 생의 독백을 내 놓는다.

임진왜란의 전란을 겪으면서 승려로서 남다른 고민을 했다는 정관은 전쟁을 하여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중생의 업보를 몹시 개탄했다고 알려졌다. 업보란 무서운 것이다. 이것이 잘못되면 엄청난 악업을 지으면서 도를 어기고, 하지 말아야 될 일을 하고 해야 될 일을 하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생을 헛되게 살고 마는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7월 제56호

각천(覺天)

붓다데바의 번역. 사람 이름. 서기 1세기경 생존. 인도의 소승 유부에 속했던 학승. 바사(婆沙) 4 대 논사 중 한 사람. 발타제바(勃駝提婆), 불타제바(佛陀提婆).

햇빛은 높은 데를 먼저 비춘다

새해가 되면 연하장을 돌리며 인사를 전하기도 하고 만나는 사람 상호간에도 덕담의 인사를 나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이 인사말이 우리말 인사로서는 단연 최고의 인사말이다. 복 많이 받으라는 건 행운을 맞이하라는 말임과 동시에 소원을 이루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 덕담의 인사를 받으면 우리는 그 순간만이라도 기분이 좋아진다. 새롭게 자기 일을 다시 시작하려는 마음이 생기며, 이 마음에는 항상 희망이 실리게 되고, 또 이 희망이 있으므로 우리는 오늘의 고단함을 이겨낼 수 있다. 올해의 소망들이 모두 아름답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해 보자.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가를 추구하면서 그것이 이루어질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내 스스로가 무엇을 혹은 누구를 기다리며 또한 내 자신이 무엇의, 누군가의 기다림의 대상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이다. 내 존재의 영역에는 언제나 능동적 기다림과 수동적 기다림이 사람의 두 발처럼 동시에 서 있다.

생각해보면 인생이란 시간의 진행을 따라 가고 있는 통과의 연속이다. 강물이 흘러가듯이 쉼 없이 가고 있는 런닝머신이다. 오늘이 하나의 통과점이며, 내일 또한 하나의 통과점이다. 무수히 통과되는 점 위에서 내 스스로가 부여하는 특별한 의미를 두고 어느 점을 맞추려 하고 그 시점을 기다리고 기다린다. 그래서 본의가 있든 없든 내 인생은 언제나 기다리는 인생이 되어 있다.

인도의 명상 시인 타고르는 인생은 손님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기다림이라 하였다. 그는 이런 말을 그의 시에서 했다.

“죽음이 그대를 찾아 올 때 그대는 죽음의 손님에게 무엇을 드릴 것입니까?

나는 내게 찾아오는 죽음의 손님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내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났던 것을 바구니에 차곡차곡 담아 죽음의 손님 손에 들려 보낼 것입니다. 나는 내게 찾아오는 죽음의 손님을 결코 빈손으로 돌려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삶이란 하나의 가치 추구”라는 뜻이 담겨 있는 시구이다. 일반적으로 세속적 가치추구의 대상을 복이라 한다면 내게 찾아오는 죽음의 손님에게도 복을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삶의 가치는 그대로 죽음의 가치와 일치된다는 뜻이다. 생애에서 아름답고 빛났던 것은 곧 죽음에게 바치는 선물이 된다. 수도의 분상에서는 복을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삶의 본질적 의미가 회복되면 유루와 무루의 구분은 사라진다.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에 회통되어 삶 그 자체의 진실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죽음에 바칠 수 있는 복으로 인생은 모름지기 이 복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길을 만들면 통행이 쉬운 것처럼 복도 사람의 마음 위에 닦아진 길을 찾아온다. 불교의 신행을 복을 닦는 길이라 한다. 복은 빈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짓는 사람에게 먼저 오는 것이다. 요행을 바라는 사행심에서 오기 보다는 마음을 바르게 써서 좋은 인연을 만드는 데서 복은 온다. 좋은 인연을 만들려는 노력을 불교에서는 신심이라 한다. 믿는 마음이란 마음을 바로 쓰는 마음이다. 부처님은 이 믿음이 진리의 근본이고 복의 어머니라 하였다. 복을 지어 복을 주자. 그 것이 내가 복 받는 일이다. 어떻게 복을 지을까? 우선 가까운 사람부터 도와주는 일을 하자. 가족끼리 좀 더 정성스러운 마음을 발휘하고 화목한 분위기를 만들어 기뻐하게 하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것이다. 행복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이 어울려지는 데서 생긴다. 다시 말해 행복은 평화의 공간이 마련되어야 깃든다. 사람에게 체온이 있는 것처럼 마음속에는 정성지수가 있다. 정성의 도수가 높을수록 내게는 삶의 에너지가 많이 비축된다. 자기 인생에 바치는 정성의 도수가 일정한 기준 이상으로 향상되어 올라간 것을 신심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심은 자기 인생의 정성지수임과 동시에 인격지수이다. 고대 중국의 사학자 사마광(司馬光)은 그의 제자 유안세(劉安世)에게 평생 좌우명을 삼아야 될 말을 정성 ‘성(誠)’자의 한 글자로서 가르쳐 준적이 있었다. 내가 정성스러우면 복문이 열린다. 인권이 높아진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칫 정성의 도수가 떨어져 사람대접이 엉망이고 불화의 조장이 심화되는 수가 많다. 신심이 단련되지 않고 헛된 야망에 사로잡혀 오만과 객기를 예사로 부린다. 신의가 없어지고 배타적 아집만 강한 사람이 된다. 이리하여 복인이 되지 못하고 남의 복을 방해하는 사람이 된다.

해가 동쪽 산 위로 솟을 때 산꼭대기 높은 곳을 먼저 비추고 복이 하늘에서 내려 올 적에 신의 있는 사람에게 먼저 온다고 했다. 믿음을 통한 복길을 닦아 많은 사람에게 복을 입혀 주는 사람이 보살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2월 제6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