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는 원래 주인이 없고

사대원무주 四大元無主 사대는 원래 주인이 없고

오온본래공 五蘊本來空 오온도 본래 공한 것일 뿐

장두임백인 將頭臨白刃 칼날이 내 머리 내리치겠지만

흡사참춘풍 恰似斬春風 흡사 봄바람을 베는 것 같으리라.

이 시는 승조(僧肇)법사의 임종게(臨終偈)이다. 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자신의 죽음을 담담히 맞이한 임종게로서는 일품인 시이다. 승조는 동진(東晋)때 스님으로 당시의 유명한 역경가 구마라습의 수제자였다. 『조론』은 그가 저술한 대표작으로 반야부 경전에서 설한 공의 이치를 논한 책이다. 만유제법이 자성이 없어서 모두가 공한 것이나, 그것은 상대적 공이 아니라 절대적인 묘공(妙空)이라고 주장하여 공을 천명한 내용이다. 이렇게 공에 대하여 철저한 이론을 내세운 그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수보리처럼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불리었다.

그러나 그는 무척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당시 후진의 왕이었던 요흥(姚興)이 그에게 벼슬을 내렸는데 이를 거절해 왕의 노여움을 사 사형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요흥은 승조의 스승 구마라습을 맞이하여 장안에 머물게 하면서 불경을 번역하게 하고 불교를 크게 외호하기도 했는데, 승조법사와는 무슨 악연이 있었는지 승조가 31살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승조의 사상은 공에 있다. 그는 철저히 공을 체득하여 남다른 경지를 체험한 인물이다. 위의 임종게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사대오온은 육체와 정신이다. 내 몸뚱이가 주인이 없는 물건이라는 말이다. 마음이니 정신이니 하는 것도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란 말이다. ‘칼날이 내 목을 내리쳐도 봄바람을 베는 것에 불과하리라’고 한 이 말에서 과연 승조는 공의 달인이라 할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7월 제44호

행복은 누구에게나 있다

또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소망을 펼치면서 한 해의 모든 일이 고스란히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염원한다. 새해 벽두의 이 염원이 비록 마음속으로 바라는 희망사항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그래도 올해는 뭔가 잘 풀리고 잘 되기를 바라는 심정은 누구나 똑같다. 사람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자기 삶에 대한 기쁨을 얻는 것이다. 이것을 행복이라 부른다.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라 할 수 있다. 살면서 행복해지고 싶은 것, 이것이 모든 중생들의 보편적인 바람인 것이다.

인도의 말 산스크리트에 수카(soukha)라는 단어가 있다. 건강한 몸과 평온한 정신에서 생겨난 행복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수카는 세상을 어떻게 느끼느냐하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심리적 환경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괴로운 마음이 되지 말고 편안한 마음이 되자는 자기의 존재방식을 자각하는 뜻에서 이 말을 자주 쓴다. 번뇌를 이고 사는 중생의 삶을 괴로움이라고 불교는 해석하지만 동시에 이 괴로움을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내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는 삶의 방식에 따라 나는 괴로움 속에 즐거움으로 존재할 수 있고 반대로 즐거움 속에 괴로움으로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똑같은 환경 속에서도 사람의 심리상태에 따라 행복해질 수도 있고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사실은 내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고 괴로움에 시달리는 수가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다. 행복의 지수에는 객관적 평가기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은 봄이 오듯이 계절이 오는 것처럼 오지 않으며, 남으로부터 선물을 받듯이 받아지는 것도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내 행복은 내 스스로 만드는 것이란 말이다. 때문에 자기 인생을 잘 사는 사람은 자기 행복을 잘 만드는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잠을 자던 애주가가 갈증 때문에 잠이 깨었다. 주방에 나가 술을 찾았다. 마침 반쯤 술이 들어 있는 술병 하나가 있었다. 이 반병의 술을 두고 그 순간에 애주가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무엇이 행복과 불행을 결정해 주는가? 바로 그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렇게 풀이 한다. 잠자기 전에 다 마시고 없을 줄 알았던 술이 반병이나 남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만족과 기쁨이 와 행복한 마음이 되고, 한 병이 채워져 있어야 할 텐데 반 병 밖에 없다는 생각이 일어날 때는 불만과 아쉬움이 일어나 불행한 마음이 되어버린 다는 것이다. 비근한 예로써 불만이 일어나고 만족이 일어나는 인간의 심리를 이야기 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별 것 아닌 데서 별것인양 집착을 하고 사는 업을 가지고 있다. 사소한 것에 어처구니없는 집착을 하고 사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이다.

어떤 어머니가 애완용 개를 기르면서 정을 쏟았다가 어느 날 개가 집을 나가 실종이 되어버렸다. 개가 돌아오지 않아 이 어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개가 거리에 나가 차에 치여 죽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 때문에 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고백하기를 자기가 낳은 친 딸보다 개가 더 좋았고 개를 더 사랑한 것 같았다고 본인이 직접 술회했다. 이 이야기도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이야기이다. 살다보면 엉뚱한데 마음을 빼앗겨 어리석은 치정에 빠져버리는 수도 많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동경하면서 바라고 있는 이상이 있다면 그 이상이 기실 허망한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가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정녕 이 세상에는 별 것이 없다. 행복이라는 것도 별 것이 아닐 수 있다.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베개 하고 누웠으니 이 속에도 즐거움이 있다”고 한 공자의 말처럼 나물먹고 물 마시는 것이 무슨 별것이겠는가? 별것 아닌 일에 기를 쓰고 죽느니 사느니 하다 보니 세상만 점점 험악해지는 것이 아닐까? 마음이 고요해지고 밝아지고 편안해지면 그만인 것인데 너무 남의 눈치를 보면서 세상을 의식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려는 자의식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의 괴로움을 불러들이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새해에는 소박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 생활의 순간순간 행복을 만들어 가자. 반야 가족 여러분, 새해에는 모두 행복해지시라.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이렇게 말했다.

“행복에 대한 욕구는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된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고, 가장 널리 인정받고, 그 무엇보다 자명하고 변함없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행복을 원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1월 제74호

빈 산에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공산불견인 空山不見人 빈 산에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단문인어성 但聞人語響 말소리만 어슴푸레 들리어 오고

반경입심림 返景入深林 지는 햇살 한 가닥 숲속으로 들어와

부조청태상 復照靑苔上 푸른 이끼 위를 비추고 있네.

시불(詩佛)로 알려진 왕유(王維 701~761)의 시다. 이 시를 읽으면 저절로 귀가 이울어지는 느낌이 일어난다. 인적이 끊어진 깊은 산중에 어디선가 사람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도란거리는 말소리에 비로소 닫아 두었던 육근(六根)이 열리면서 주위가 의식되어진다. 숲속 깊이 한 가닥 햇살이 들어와 푸른 이끼 위에 떨어지는 정경이 해가 서산에 가까워진 시간을 읽게도 해 준다.

원제목이 ‘녹채(鹿柴)’로 되어 있는데 녹채란 사슴을 먹여 기르는 나무울짱을 말한다. 왕유가 한 때 망천(輞川)이라는 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은거생활을 할 때 그림을 그리듯이 지어 놓은 시들이 많다. 녹채를 선시의 일품으로 평가하는 것은 그의 생애가 돈독한 불심으로 선수행의 정신을 잃지 않고 살은 때문이기도 하다. 32살 때 부인을 사별하고 평생을 혼자 살면서 시심을 불심으로 승화시켰던 사람이었다. 유마거사를 좋아하였고 유마힐(維摩詰) 세 글자가 묘하게도 유는 이름이 되었고, 마힐(摩詰)은 자호로 쓰기도 하였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8월 제6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