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년(己丑年)의 서원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 기축년(己丑年)의 해가 밝았다. 지루하게 느껴지던 촛불시위도 사라지고 미국 발 금융위기가 온 지구촌을 들쑤시어 은행과 보증보험은 제 살겠다고 문을 걸어 잠그니 서민과 중소기업만 죽을 맛이란다.

올 한해를 어떻게 살아야지? 하나같이 죽지만 말고 명만 붙어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참으로 섬뜩한 말이다. 언제나 우리가 희구한 사회는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였건만 올해도 이 답(答)은 정답으로 채점되지 않을 것 같다. ‘착하게 살아가는 것 그거 바보같은 것 아니야. 열심히 살면서 어려운 남 도와주려다 상처받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 부끄러운 일 아니야.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상처도 많이 받지만 극복도 잘 하는 법이야.’ ‘죽고 싶다’는 말 대신에 ‘잘 살고 싶다’고 말하고, 다짐하고 노력하는 한해가 되어야 해. 누군가 ‘생명(生命)’이라는 말의 의미를 ‘살아있으라〔生〕는 명〔命〕령’이라고 했잖아. 정말 올해엔 아무리 어려워도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하루 30여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통계 수치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지난 여름 이후 날씨가 무척 가물어서 애태우는 농부들이 많았다. 논밭에서 땅을 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바다에서 땀흘리며 어로를 하는 사람들보다 유통과정에서 너무 많은 마진을 챙기는 중간상인을 보면서 억울해하는 농어민이 없었으면 좋겠다.

시골에 갈 때마다 마을이 온통 양로원화 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식을 두고도 복지시설에서나 독거 노인이 되어 근근히 연명하는 사람들의 참상을 보도하기 위해 더 이상 TV카메라를 들이대지 않도록 우리 사회와 국가가 따뜻한 보호막이 되었으면 좋겠다.

최선을 다해 기업을 운영하다 정말 어쩔 수 없어 부도를 내고는 종업원들의 체불임금 때문에 죄의식에 사로잡혀 고민하는 사람이 적었으면 좋겠다. 적당히 기업을 운영하면서 금융기관과 정부의 도움을 받아 제 호주머니 챙겨놓고 부도내고는 돌아서서 뻔뻔스럽게 사는 사람이 올해는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국민을 생각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가슴으로 위무해 주겠다는 양심선언이라도 한번 들어봤으면 좋겠다. 지금 국민 대다수가 부딪치고 있는 가장 절박한 문제가 경제위기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일인데도 야당은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 않은가. 여당은 지난 1년 간 뭘 했는가. ‘교수신문’이 지난 한해를 정리하는 사자성어로 ‘호질기의(護疾忌醫)’ – ‘병을 숨기면서 의사에게 보이지 않는다’ 는 뜻인데, 치료를 꺼리는 환자에 빗대어 ‘국가리더십’의 위기를 지적하고는 선정이유를 ‘국민ㆍ전문가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경고’라고 했다. 지난해 정부출범과 뒤이은 촛불시위, 금융위기상황에서 정치, 경제, 사회지도층이 상황에 걸맞은 현실진단과 대안이 바람직하지 못했다면서 사익(私益)을 우선하거나 무능력한 모습을 보이는 등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고 미봉책과 임기응변으로 대응한 것이 문제를 키웠다고 보았다. 뿐만 아니다. 지난해 새 정부 들어 대북 관계가 꼬여서 중국이 북한의 구원투수가 되는 듯한 현실에서 새해는 남북이 서로 상생하는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

과거사로서의 역사와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땅과 지도처럼 다를 수 있다. 지도를 새로 그린다고 땅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민주화니, 개발독재니 하는 것도 전혀 의미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제발 어려운 시기에 한풀이하듯 과거사에 얽매어 있지 말고 힘 모아 바르게 미래를 열어 가는 모습을 보고싶다.

더 이상 지구상에 갈등과 대립과 전쟁이 없었으면 좋겠다. 종교도 인종도 이념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 지구환경과 생명의 존귀함, 그리고 인류의 복지를 위한 노력이 자리잡았으면 좋겠다.

이제껏 무수한 겁 동안 이름과 물질에 매여 한량없는 고통을 받아왔으니 새해 기축 년엔 어리석음과 애욕의 마음이 사라지고 불국토의 서광이 비쳤으면 좋겠다.

香岩 김형춘 (반야거사회장·창원전문대교수) 글. 월간반야 2009년 1월 제98호

기다림의 삶

삶은 기다림이다. 인생은 기다림으로 시작하여 기다림으로 끝난다. 어릴 적의 기다림은 본능적이지만 성인이 되면 자기 기대치의 충족을 위한 기다림으로 산다. 외로울 때도 간절히 바랄 때에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뜻한 바가 이루어지길 기다린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때로는 느긋하게 여유를 갖고 때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초조하게 기다리며 산다. 잠시 바쁠 때나 급한 일이 있거나 일시적 쾌락과 만족감으로 기다림을 잊을 수가 있으나 마음의 평정이 찾아지면 다시 기대나 기다림으로 돌아간다.

여기 한평생을 기다리며 살다간 여인이 있다. 초년엔 운명에 대한 저항이 한恨이 되었고, 중년엔 삶에 지쳐 있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다림으로, 노년엔 체념과 내가 뿌린 씨앗을 거두는 보람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첩첩산골에서 다섯 딸의 막내로 태어나 세 살적에 아버지를 여의고, 열여덟에 8남매 5형제의 막내아들과 혼인을 하였단다. 스물에 맏아들을 낳고 두 살 터울의 딸을 두었으나 일찍 잃고, 다시 스물넷에 둘째아들을 얻으면서 4대 가족 20여명이 함께 사는 큰댁에서 막내며느리로 시집살이를 할 때까지는 그래도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스물다섯 5월 단옷날, 6.25라는 이름의 난리가 한창일 때 지아비가 징집영장을 받고 군대에 가게 되었다. 행복했던 한 가정의 평화가 깨어지고 지어미는 기구한 운명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걱정 마라. 곧 돌아올 테니.” 이 한마디의 말을 믿고 기다림의 삶은 시작되었다.

제주도 모슬포 훈련소에서 신병교육을 마치고 곧장 전선에 투입되어 몇 차례나 전투에 참가하였을까. 운명의 날, 1952년 10월 28일. 철의 삼각지 ‘금화지구’에서 전사하였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온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유골함을 찾아와 장례를 치렀건만 지어미는 결코 지아비의 죽음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세월이 가고 세상이 바뀌어도 지어미는 해질녘 사립문 앞에 서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어미의 기다림은 잠시 고달픈 현실에 묻혀 보이지 않는듯하였지만 두 아들이 하교하길 기다리는 모습으로 그 대상이 바뀌었다. 세상살이가 힘들어도 세월은 흐르는 법, 전쟁이 끝난 지 30년 쯤 되었을 게다. 매스컴을 통해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일어나고 온 나라가 눈물바다가 되니 그때부터 노인은 TV 앞을 떠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기다림이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고 이후 노인의 방 TV는 꺼질 줄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6.25때 국군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조창수(?)’씨가 TV에 나타나 한동안 우리 사회에 파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그때는 TV가 구멍이 날 정도로 보기도 했다.

손자 손녀들이 각기 제 길을 가고 나니 자연히 기다림의 대상은 아들과 며느리에게로 바뀌었다. 두 사람 중 한사람이 귀가할 때까지 노인은 아파트 베란다에 기대서서 오고가는 승용차 하나하나를 확인하면서 기다리곤 하였다.

8순을 넘어서면서 부터는 더러 병원 신세도 지고 몸져눕는 일이 많아졌다. 이따금씩 텃밭에 나가 바람이라도 쏘이지만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이 드니 다른 사람을 기다린다는 건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면 체념의 탓일까. 그도 아니면 무상(無常)을 깨달은 탓일까. 인연因緣의 질긴 끈을 스스로 끊지 못함을 터득하였을까.

그다지도 강한 집착(執着)의 힘이 다 소진되었을까. 그래도 건강이 뒷받침이 되어 줄 때는 운명에 대한 저항으로 한풀이라도 해 봤고, 실컷 기다리다 지쳐도 보았고, 자식들 키우느라 바쁘고 힘들어서 잠시 잊기도 하고 새로운 보람도 맛보았다.

이제 모든 것 다 접고 텃밭 한번 둘러보고는 아들 며느리에게 쇠고기 국밥 한 그릇 사 먹이고, 며느리 손에 밥 몇 숟갈 받아 잡수시고는 아들 등에 업혀서 병원으로 가셨다. 그리고는 가족들의 흐느낌과 아쉬움 속에, 주위 분들의 기도 속에 먼 길 가셨다. 이별이 없는 곳으로, 기다림이 없는 곳으로. 이제는 만남도 헤어짐도 기다림도 재회도 인연소치라는 것을 아셨을 테니까.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김형춘 창원문성대학 교수, 문학박사, 월간 반야 2011년 11월 132호

망두석에 곤장을 치다

옛날에 비단 장수가 있었다. 이 마을 저 마을로 비단 봇짐을 짊어지고 다니며 비단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가난한 사람이었다. 어느 해 봄 그는 비단 봇짐을 짊어지고 외딴 마을 뒷산으로 길을 넘어 가던 중 누구의 묘소 잔디 위에 앉아서 잠시 쉬다가 그만 깜박 잠이 들었다. 자신의 비단 봇짐을 내려놓고 춘곤증에 시달리다 잠이 들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큰 일이 났다. 깨어 보니 그의 비단 봇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분명 잠든 사이에 누가 비단 봇짐을 통째로 훔쳐 가버린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비단 장수는 관가에 가 사또에게 진정을 올려, 이 사실을 말하고 자기의 비단 봇짐을 훔쳐간 도둑을 잡아 주기를 청했다.

사또가 물었다

“누군가 그대가 잠든 사이에 비단을 훔쳐 갔다면 오가던 사람 중에 비단 봇짐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을 본 사람이 있을 터인데 졸기 전이나 후에 사람을 만난 적이 없느냐?”

“없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생각해 보아라. 목격자라도 있어야 훔쳐간 사람을 잡을 단서가 생길게 아닌가?”

“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묘소에 서 있던 망두석이나 보았을까?”

비단 장수는 본 사람을 생각해 말해보라는 사또의 재촉에 엉뚱하게 무덤가에 서 있던 망두석을 들먹였던 것이다.

이때 사또가 이방을 보고 추상같은 령을 내렸다.

“여봐라. 이 비단 장수가 비단 잃은 곳에 가 망두석을 잡아 오너라.”

이리하여 동원 마당에 이상한 진풍경이 벌어지게 되었다. 사또가 망두석을 눕혀 놓고 곤장을 치면서 비단 장수의 비단 봇짐 훔쳐간 사람을 말하라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해 하였다. 아니 사람도 아닌 망두석을 취조하면서 곤장을 치다니 이 무슨 해괴망칙한 일인가? 동원 안의 관속들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까지 이 사또의 어처구니없는 망두석 곤장 치는 일에 대하여 영문을 몰라 하다가 급기야 사또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사또는 이 취조를 다음날까지 계속하는 것이었다.

이 동네 저동네 사람들이 우루루 동원 마당으로 몰려와 빙 둘러서 구경을 하면서 해괴한 희극을 즐기고 있었다. 누군가가 사또를 비웃는 조소의 말을 하면서 사또가 미치지 않았으면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을 벌이느냐고 했다. 많은 사람들은 사또를 흉보았다.

이때 사또가 또 한 번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나를 조소하고 미쳤다 한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들여라. 본관의 공무집행을 방해한 죄로 다스리겠다.”

이 명 한마디에 그만 수십 명의 사람들이 동원의 옥방에 갇히게 되었다. 사또의 망두석 곤장 치는 것을 어이없다고 조소하던 많은 사람들이 옥방에 구속되어 버린 것이다.

사또는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이방을 시켜 찾아가서 각자 가족이 있는 집에 연락하여 비단 한 필씩을 구해오면 풀어주겠다 하라 하였다. 다음 날 갇혀 있는 사람들의 가족이 비단 한 필씩을 가져와 갇혀 있던 사람들이 풀려나게 되었다.

사또는 비단 장수에게 도둑맞은 자기의 비단을 고르라 하여 그 비단 사온 곳을 추적하여 비단 훔쳐간 도둑을 결국에는 잡아내게 되었다. 망두석을 곤장을 쳐 때린 일이 도둑을 잡는 실마리를 풀게 된 것이었다.

사람의 일이 때로는 지혜를 감추고 있을 때는 어리석게 보이는 수가 있다. 사또는 처음부터 도둑을 찾아낼 방도를 찾기 위하여 망두석을 때리는 어리석은 일을 고의로 한 것이었다.

불교의 수행이나 신앙에도 이와 같은 사례가 숨어 있는 수가 있다.

방편으로 실시하는 여러 가지 행위 자체가 망두석 곤장 때리는 일과 같은 것처럼 어리석게 보이고 조소당할 일처럼 보이지만 그 배후에 숨어 있는 진정한 참뜻을 안다면 어리석을 것이 아니고 조소당할 일이 아니란 말이다. 다만 진리를 찾는 방편과 법을 쓰는 방편에 있어서 상황에 따른 다양한 모습들이 있는 것이다. 하늘이 개이면 햇빛이 나고 비가 내리면 대지가 젖는 것처럼 인연을 따르다보면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된다. 그러나 이런저런 인연 속에서 내가 찾아 얻어내야 할 것은 지혜와 복덕이 갖춰진 공덕이라 할 것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3월 1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