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려면

어려운 경제 여건에서 지금 경제의 주역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국회의 문만 열었다 하면 극단적 대치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정치인들은 자기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걸까. 올 봄에 달랑 졸업장만 쥐고 캠퍼스를 나선 청년 실업자들은 요즘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까.

17세기 세계 최고의 작가로 평가받으면서 철학자로서, 스페인왕의 스승으로 살다간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세상을 보는 지혜」에서 “생각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말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행동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습관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인격이 되기 때문이다/ 인격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설파하였다. 누구나 바라는 바인 ‘복된 삶, 바람직한 인생’의 바탕은 스스로의 ‘생각’에서 비롯됨을 강조한 것이다. 그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행동이 되고, 나아가 습관이 되고 인격이 되어 온 인생을 좌우하는 것이리라.

인생은 순간의 집합이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저녁에 잠이 들 때 까지든, 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들이쉴 때 까지든 인생은 매 순간의 연속이고 이 순간의 삶이 모여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일상의 모든 행위에서 그 순간 그가 행하는 행동에 대해 전심전력을 다한다. 바로 지금 여기서 나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연속, 이러한 삶의 집합이 온 인생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어쩌다 단 한번이라도 실수로 잘못 생각하고 판단하여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행동을 하게 되면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멍에를 쓰고 살다가 생을 마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순간순간 주어진 삶을 위해 현실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 뜻은 과거나 미래에 관해 전혀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과거와 미래를 현재의 행동과 관련지어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일상적인 우리네 삶은 현실적으로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 오히려 과거나 미래 속에서 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듯이 보여도, 그들의 생각은 상상 속을 헤매기도 하고 걱정에 사로잡히기도 하며, 과거의 추억 속이나 미래의 욕망 등 다른 곳을 헤맨다. 그러기에 이런 삶은 현재 행하는 것 속에 살고 있지 못할뿐더러 그 삶을 즐기지도, 성실하지도 못한 것이다.

진정한 삶이란 현재의 순간이며, 죽어 사라져버린 과거의 추상이나 아직 생기지도 않은 미래에의 꿈이 아니다. 현재의 순간을 살고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삶을 사는 것이며 진실로 행복한 삶을 누린다 할 것이다.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서 소박하고 조용한 삶을 살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어찌 그렇게 밝을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붓다’는 ‘그들은 지난날을 후회하지 않고, 미래에 대해 부심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현재를 산다. 그렇기에 그들의 얼굴이 환한 것이다. 미래에 대해 고심하거나 과거를 후회하는 사람은 잘려진 갈대가 햇볕에 말라 들어가는 것처럼 말라갈 것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적, 시적 혹은 정신적 작품은 그 창조자가 자신의 행동 속에 몰입하여 자신을 전적으로 자의식에서 벗어났을 때 이루어진다. 인간의 행위에 대한 집중함이나 유의점은 붓다가 가르친바 현재의 순간에 살고, 현재의 행위 속에 살라는 것이다. 이보다 더 스스로를 잘 지키는 방법이 있을까.

香岩 김 형 춘 (반야거사회 회장, 창원전문대 교수) 글. 월간반야 2009년 4월 제101호

물망초인생

옛날 시골 어느 마을에 갓 결혼한 신혼부부가 있었다. 농사짓고 살던 가난한 시절이라 어느 집 아래채 방에 세를 얻어 신접살림을 차렸다. 달포쯤 지낸 뒤 뜻밖의 사건이 생겼다. 새신랑 되는 사람이 이웃사람과 싸움이 벌어져 치고받고 격투를 벌이다 그만 힘센 이웃 남자에게 맞아 죽어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시집 온지 두 달 만에 남편을 잃은 신부가 충격으로 실성을 해 미친 사람이 되어버렸다. 정신이 이상해져버린 이 신부가 매일 남편을 죽게 한 이웃 남자 집 앞에 나타나 두 손을 치켜들어 손톱을 세우고 고양이가 쥐를 노리는 것처럼 쭈그리고 앉아 노려보는 표정을 짓고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실성한 신부가 남편 잃은 원한을 품고 저러는 것이라고 모두들 혀를 차며 동정을 하기도 했다.

세월이 흘렀다. 고양이처럼 손톱을 세우고 노려보던 젊었던 신부가 늙어 60대가 되고 70대가 되었다. 4〜50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실성한 채로 살아온 노파가 다 된 신부가 간간이 남편을 때려죽인 사람 집 앞에 나타나 또 손톱을 세우고 성난 표정을 지으며 노려보고 앉는 일이 있는 것이었다. 이미 남편과 싸움을 했던 사람은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가버려 없는데도 한 맺혀 실성한 할머니가 된 신부가 죽을 때까지 간혹 그 자리에 찾아와 앉아 원한을 품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더라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흔히 평생을 잊지 못하는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아니 대개의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 깊이 남아 있는 잊을 수 없는 일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은혜이든 원한이든 평생을 잊지 못하고 절절히 사무치는 가슴으로 있다면 인생은 분명히 물망초 같은 인생이다. 이는 내게 남아 있는 추억의 기억을 두고 하는 말일수도 있지만 인간 상호끼리 감정에 얽힌 인과의 관계가 그물처럼 얽혀 있다는 말도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남에게 자기에 대한 기억을 좋게 남겨 놓아야 한다. 이것은 사회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점이다. 바꾸어 말하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잘못된 행동이나 부도덕한 처신을 하면 스스로의 이미지를 손상하여 남으로부터 모멸과 냉소를 받게 되는 것이다.

옛말에 “만고에 흐르는 긴 강의 물로도 한 번 더럽혀진 이름은 씻지를 못한다(萬古長江水 汚名洗不去)”고 하였다.

내가 남에게 베푼 은혜도 그렇거니와 반대로 내가 남을 해롭게 한 잘못을 상대는 길이 잊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남편을 죽인 상대에게 평생을 실성을 해 살면서도 그 원한을 잊지 않고 나타나더라는 노파의 비극적 이야기가 뜻하는 것은 한이 맺힌 것은 결코 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도 하나의 행위며 또한 업의 종자가 된다. 마음속에 심어진 생각의 씨앗이 언젠가 때가 되면 싹이 나온다. 그래서 나와 남의 생각도 서로 교환되면서 인과관계를 이룬다. 때문에 가급적이면 나를 좋게 생각하듯이 남에 대해서도 좋게 생각하여야 한다. 생각 하나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을 통한 왕래가 생기는 법이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사이를 오고 가며 산다. 마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시공을 자유자재하게 내왕하므로 동서고금을 생각대로 드나드는 것이다. 또 우리가 사는 삶이라는 것이 시간적으로 끊어지지 않는 연속적 흐름이기 때문에 삼세의 진행을 따라 끝없이 이어져 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기억들은 곧잘 과거를 향해 역류하여 흐를 때가 있다.

지나간 세월 그 아련하고 그리운 추억들을 누구나 가슴 깊이 간직하고서 오늘의 시름을 달래가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여정이다. 숱한 사연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러 잊을 수 없는 기억의 편린들 때문에 자꾸 마음은 과거로 돌아가 그 시절에 있었던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수가 많다. “잊어버려라” 라는 충고를 스스로 하면서도 잊지 못하고 번뇌만 키워가는 경우가 허다히 많다.

우리의 기억에 떠오르지 않고 망각된 것들을 때로는 잊어버렸다고 말한다. 과거의 불행했던 일이나 좋지 못했던 한스러운 일을 이제는 잊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기억에 사라진 일이라 해서 없어진 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업종자는 영원히 남는 것이다. 내가 내 업을 떠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중생의 일이다. 그림자 되어 따라오는 업의 자취 그것 때문에 우리는 과거를 영원히 잊지 못하고 또 잊을 수도 없는 것이다. 물망초의 전설처럼 누군가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날 잊지 말아줘.” 물론 그 말 속에는 사랑의 씨앗이 들어 있는 수도 있고 원한의 씨앗도 들어있는 수도 있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3월 제76호

무엇을 남기고 가야 하는가

옛말에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말이 있지만 한 인간이 이 세상에 살다 돌아간 다음 도대체 무엇이 남는 것일까? 물론 생전의 업적이 남을 것이고, 작가나 예술가들은 불후의 명작을 남겨 만고에 그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수도 있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 이러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 이름을 남기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죽은 사람들도 있다.

옛날 어느 스님은 친한 도반에게 “내가 보이지 않으면 죽은 줄 알아 달라.”는 말을 남기고 자취를 감춘 후 영영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다. 친한 도반 몇 사람만 그가 아무도 모르게 죽었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다. 그것은 죽었다고 여겨지는 그 스님의 살아생전에 남긴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난 이렇게 죽었으면 하네. 아무도 보지 않는 한 밤중에 걸망에 돌을 가득 넣어 지고 몸에 벗겨지지 않게 단단히 묶어 강의 다리를 지나다 강물 속으로 뛰어내려, 이 육신은 고기들에게 보시를 하고, 내 죽음으로 인해 아무에게도 수고를 끼치지 않게 하고 싶네.”

이 말 때문에 몇몇 도반들은 그가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 되었다고 믿어버린 것이다.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설사 아무도 모르게 죽었다 하더라도 시신이 남아 결국에는 그 신원이 밝혀지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사후에 누가 죽었다는 것이 누구에게든 알려지게 된다. 그런데 때로는 사람들의 마음에 죽으면서도 죽음을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얼마 전에 어느 신도님이 죽었다는 부음을 들었다. 갑자기 거사 한 분이 돌아갔고 칠순이 넘은 보살님 한 분이 돌아갔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태어나고 죽는 일이 본래 없는 일이라는 경전 속의 말씀도 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일은 태어난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이므로 누구의 부음을 듣는 것도 순간적으로 덧없는 무상을 느끼는 작은 감정의 편린에 지나지 않게 되었지만 이번에 돌아간 한 분의 죽음은 많은 여운을 내게 안겨 주었다.

몸이 병이 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망인은 몰래 이것저것을 조용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공부방에 나와서 하직 인사처럼 앞으로는 공부방에 나올 수 없게 되었다고 넌지시 말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죽음의 날을 기다리며 세상의 모든 집착을 버리기 시작했다.

재산이 많지도 않았고 별로 유식하지도 않았던 망인은 전해 들은 바로는 죽음에 임하는 자세가 남달랐다고 한다. 조금도 슬퍼하거나 외로워하는 표정을 짓지 않고 담담하게 평소의 일상을 그대로 유지했다. 점점 느껴지는 육신의 통증을 남모르게 참아내며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자하는 가족들의 청을 끝내 거절하며 오히려 식구들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갈 준비를 다 했다. 몇 년 더 살다 가나 지금 가나 똑같은 것이다. 내 병원에 입원시킬 돈이 있거든 차라리 손자들 학비에 보태 쓰도록 해라.”

망인은 입원을 사양하며 자녀들을 이렇게 타이르며 달랬다. 마치 동산양개(洞山良介: 807~869) 선사가 입적하기 전 우치재(愚癡齋)를 지내며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갔다는 이야기처럼 망인은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죽음에 어떤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무심히 죽고 싶어 했다. 생에 대한 미련이 왜 없을 수 있을까만 모든 걸 초월하여 무심삼매에 들고 싶어 했는지 모를 일이다.

“사후에 아무 것도 남기지 말라.”

이 말은 절대 무(無)의 세계에 들어가 죽음 자체를 초월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이렇게 되는 것이 말하자면 웰다잉(well- dying)이 되는 것이다. 사실 웰빙(well-being)의 끝은 웰다잉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철저히 살다가 철저히 죽어라.”

원오극근(圓悟克勤: 1063~1125) 선사의 어록에 나오는 이 말은 나고 죽는 생사를 벗어난 해탈의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잘 산다는 것은 잘 죽는다는 것을 뜻하는 생사를 등치시킨 말이기도 하다. 시성(詩聖) 타고르는 죽음을 미화하여 손님으로 표현하면서 죽음의 손님에게 줄 선물 이야기를 하였다.

“죽음이 그대를 찾아올 때 그대는 죽음의 손님에게 무슨 선물을 바칠 것입니까?”

“나는 내게 찾아오는 죽음의 손님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 생애에 가장 아름답고 빛났던 것을 바구니에 차곡차곡 담아 죽음의 손님 손에 들려 보낼 것입니다.”

무엇이 죽음의 손님에게 바칠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선물이 될까. 재산일까, 명예일까, 권력일까. 또 하나의 인생 화두(話頭)가 여기서 만들어진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1년 6월 12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