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 대한 배려

두어 달 전 전국에 흩어져 있는 대학 동창생들 백여명이 한자리에 모일 기회가 있었다. 대부분이 교단을 지키는 친구들이었다. 이날 의례적인 인사말을 마치면서 이런 말을 한 기억이 난다. “교단을 떠나는 그 날까지 초심으로 돌아가 떳떳하게 교단을 지키다가 명예롭게 정리하도록 고민하자. 곱게 늙어 가는 방법을 찾아보자. 끝으로 건강하고 즐겁게 여생을 살도록 노력하자.”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미 지나간 세월은 다 잊어버리고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미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 지난날 어리석고 무지하고 게을렀던 삶을 살았기로서니 지금 그것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 고민으로 흘러간 세월을 돌이킬 수 없을 뿐 아니라, 흘러간 물이 다시 오지도 않는다. 슬프든지 억울하든지 분하든지 과거는 과거로 묻어 버리고 오늘은 오늘로서 살아야 한다.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방편이야 많이 있겠지만 과거의 실수와 씨름하지 않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훨씬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다. 떳떳하게 명예를 지키면서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년을 향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하고 즐겁게’라고 생각한다. 올해 들어 주위의 가까운 친구 중에 아내가 갑자기 쓰러져서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이가 둘이나 있다. 엊그제는 8월말이면 정년을 하는 선배의 문병을 다녀왔다. 다들 생활이 말이 아니다. 자녀들은 장성하여 자기 삶을 찾아 따로 살기에 부부만 살다가 한쪽이 병원에 누워있으니, 집안 살림이나 직장생활, 사회생활 모두가 엉망이다. 얼마 전 근 이십 년을 형으로 모신 분이 상처를 한 뒤 가까스로 몸을 추스르고 모임에 나오셔서 하는 말씀 중 “노년의 행복은 부부가 더불어 건강한 것”이라는 뜻을 이제사 주변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확인한 셈이다. “왜, 진작 좀”하는 후회는 무지와 미련함과 무관심에 밀려 지금의 어려움에 이른 것이다.

사실 그 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남을 배려’ 할 줄 모르는, 아니 특히 ‘가까운 사람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남이나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에게는 신경을 쓰고 배려하면서, 가까이 있는 식구에게는 좀 모자라고 함부로 해도 이해해 주리라는 알량한 믿음 때문이었던가.

나는 우리교육의 문제점도 단적으로 ‘기초ㆍ기본교육의 소홀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의 결여’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상투적으로 하는 말처럼, ‘늦은 감은 있지만’ 남을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갖도록 해야 한다. 사회는 아직도 이기적이고 타산적이며, 형식과 권위와 체면을 찾는다. 이제는 밖으로 나돌던 나를 불러들여야 할 때다. 남을 배려하되 가까이 있는 사람, 진실로 나의 행복을 더불어 같이 할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절실함을 깨달아야 한다.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4년 7월 제44호

가비라위(迦毘羅衛)

카필라바스투의 음역. 고대 중인도의 석가족의 영토로서 수도의 이름인 동시에 그 나라의 이름이 기도 함. 석가모니의 탄생지인 룸비니가 있었던 곳. 현재 네팔의 타라이(Tarai) 지방에 그 유적이 남아 있다. 창성(蒼城), 황적성(黃赤城), 가유라위(迦惟羅衛), 가유라열(迦維羅閱), 가유라월(迦維 羅越), 가이라(迦夷羅), 가비라바수두(迦比羅婆修斗). 가비라(迦毘羅).

낚시줄 길게

천척사륜직하수 千尺絲綸直下垂

일파재동만파수 一波 動萬波隨

야정수한어불식 夜靜水寒魚不食

만선공재월명귀 滿船空載月明歸

낚싯줄 길게 바다 속에 드리우니

파도는 일파 만파 일렁이는데

고요가 겨운 밤 물만 차가울 뿐 고기는 물지 않아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고 말았네

인생이란 어떤 면에서 빈배와 같은 것이다. 욕구충족을 위해 아무리 배에 짐을 싣듯 실어 보아도 부질없는 것임을 나중에 가서야 알게되는 것이다. 야보도천(冶父道川)선사의 이 게송은 읽는 이의 마음을 비우게 해 주는 매력이 있다.

가을 달밤에 어떤 이가 배를 타고 낚시를 하러 갔다. 간 곳이 바다라 해도 좋고 큰 호수라 해도 상관없는 곳이다. 물 속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고기가 물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차가운 수면에 파도가 일고 달빛은 교교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웬일인지 고기가 물지 않는다. 밤은 이슥한데 고기는 낚아질 기척이 없어 할 수 없이 낚싯대를 거두고 빈배로 돌아온다. 만선의 꿈은 사라지고 뱃전에 달빛만 부서질 뿐이었다.

흔히 도(道)는 비어 있다고 한다. 이 말은 노자 도덕경에도 나오는 말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 실체가 없는 것으로 우리들의 의식에 의해 분별되어지는 환영일 뿐이다. 그런데 이 환영이 사람을 그렇게도 애타게 만들며 못 잊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의 파도 속에서 산다. 생각 그것은 사실 번뇌인데 한 생각이 일어나면 천 가지 만가지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다. 연쇄반응으로 서로 서로 관계하면서 희비의 쌍곡선을 이루다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마는 존재들! 그 본 바탕에는 아무 것도 없는 공(空)한 것이다. 카알 붓세는 “산너머 하늘 저 멀리 행복이 있다고 하기에 찾아갔다가 눈물만 흘리고 되돌아오고 말았다.” 하지 않았던가? 물론 메틸 링크의 파랑새 이야기도 있다. 어떻거나 우리는 자신이 비워질 때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가 있다. 자아관념의 상(相)을 떠나 아무 것도 없는 무(無)로 돌아가면 모든 것은 이미 해결되어 있고 모든 것은 이미 갖추어져 있을 것이다.

야보 도천선사는 당나라 때 스님이나 생몰연대가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금강경오가해에 수록된 야보(冶父 아버지 ‘부’자가 사람이름으로 쓰일 때 보로 읽는다.)의 송(頌)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야말로 읽는 이로 하여금 삼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게 하는 시원함이 있다. 이송도 오가해에 나오는 하나다.

지안스님 해설. 월간반야 2001년 11월 (제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