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의 철학

바보라는 말을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얕잡아 일컫는 말이라고 풀이해 놓았다. 이 말은 아마 자기 할 일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생각이 영민하지 못하여 눈치가 없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이 바보라는 말이 현대에 와서는 자기주장을 할 줄 모르고 사익(私益)을 챙길 줄 모르는 사람을 비웃는 말로 그 뜻이 바뀐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왜 그렇게 바보처럼 가만있느냐고 질책하면서 화를 내어 가까운 사람을 꾸짖는 경우가 자주 있다. ‘바보처럼 하지 말라.’ ‘바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는 말은 자신을 타이르고 자기와 가까운 사람에게 주는 조언의 제 일성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세상을 살면서 남으로부터 바보 취급을 당하고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자존심 대결로 살려는 사람심리에서 볼 때 모두가 내가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는 것 같다.

만약에 누가 나를 보고 바보가 되라고 충고 한다면 사람을 놀린다고 화를 낼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바보가 되라’는 법문을 남겨 그 법어집 제목을 “바보가 되거라”로 출판한 책까지 나와 있는 사례가 있다.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고 살고 있는 세상에 바보가 되라고 하다니 이것이 과연 옳은 가르침인지 묻고 싶다고 할 사람도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세상이 하도 영악해져 가니까 사람들이 모두 순수한 본래의 소박한 마음을 쓰지 못하고 거짓으로 위장되고, 욕망을 숨긴 위선으로 세상을 사는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바보가 되라고 한 것이다.

사람 사는 일에도 대의와 명분이 있다. 이 대의와 명분을 지키는 일에는 도덕적 규범이 따른다. 실리를 위해서 신의를 등지거나 자기 입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남을 압박하는 일 따위가 없어야 한다. 이기적 목적으로 자기주장만 내세우면서 남의 주장을 아예 묵살하려는 태도를 취해서도 안 된다. 차라리 그렇게 하려면 바보가 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때로는 이러한 바보의 철학이 필요하다. 바보의 철학에 있어서 제일 조건은 내 주장을 내세울 일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니까 이래라 저래라 할 일이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바보철학의 핵심이다. 손해를 보거나 남으로부터 무시당하여도 손해를 보는 줄도 모르고 무시당하는 줄도 모른다는 것이다. 바보이기 때문에 요강을 가지고 밥그릇으로 쓰는 수가 있는 줄을 모르면서도 우연히 그릇이 없어 깨끗한 요강을 밥그릇으로 써버리는 실천력을 바보이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바보철학의 요지이다.

“요강도 때로는 밥그릇이 됩니다.”

이 말은 폴 브라이트가 지은 태국의 유명한 고승이었던 아잔 차 스님의 강의를 요약해 엮은 책 제목의 이름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현대사회를 지식 사회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각종 정보에 대한 지식과 배워 아는 학문적 지식이 많아져 모르면 그야말로 바보취급 당하기 일쑤인 시대라 할 것이다. 그러나 도(道)가 유식과 무식과는 상관없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인생의 삶 그 자체는 지식이전이고 정보이전이다. 따라서 바보도 훌륭한 일생을 살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이다.

어느 집에 나이가 많은 할머니가 한 분 있었다.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는 이 할머니는 평생을 바보처럼 헌신과 봉사로 일생을 산 분이었다. 마음이 인자하여 누구에게나 어질게 대해주며 자기주장을 내우는 일이 없었다. 때로는 아들, 며느리로부터 냉대를 받는 일이 있어도 바보처럼 그것을 눈치 채지도 못한 채 헌신적이고 희생적으로 묵묵히 자기 일만을 해온 분이었다. 손자 손녀들을 위해서도 한결같이 자상하고 밝은 미소만 보내 주는 할머니였다. 아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남을 탓하거나 나무랄 줄도 몰랐다. 모든 일을 언제나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고 사셨다. 손자 손녀들이 부리는 투정도 다 받아 주면서 한 번도 야단을 쳐 본 적이 없는 할머니였다.

어느 날 이 할머니가 죽었다. 초상을 치르게 된 이 집에 어른인 아들과 며느리는 담담하게 장례준비에 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린 손자 손녀들이 할머니가 죽고 나자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엉엉 울면서 울음을 그치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울음이 시끄러울 지경이었다. 부모가 겨우 달래 울음을 그치게 했는데 이번에는 아이들이 할머니가 쓰던 베개와 안경을 서로 차지겠다고 싸움을 하는 것이었다. 죽은 할머니의 베게와 안경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것을 본 아버지가 그때 비로소 아이들의 할머니이자 자기 어머니의 인품을 바로 알고 자신의 불효를 뉘우치더라는 것이었다.

할머니의 유품을 내가 먼저 가지려는 어린 손자들의 태도가 철이 없어 그러는 것이라고 여기지 말자. 이 아이들에게는 할머니의 감화력이 너무나 가슴 깊이 남아 있어 그것 때문에 할머니의 죽음이 더욱 슬펐던 것이다.

樂山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9월. 제94호.

날마다 좋은날(日日是好日)

하루는 운문(864~949)선사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십오일(十五日) 이전에 대해서는 너희에게 묻지 않겠다.

하지만 십오일 이후에 대해서는 어디 한 마디 일러 보아라.”

제자들 중 그 누구도 스승의 질문에 선 듯 나서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스님은 스스로 답했습니다.

“날마다 좋은날(日日是好日)이니라.”

세상 사람들은 날씨가 맑으면 좋다 궂으면 나쁘다 하며 생각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우주의 본체(本體)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날씨가 좋든 싫든 모두가 자연의 현상일 뿐 거기에는 선, 악, 분별은 없습니다. 이를 선에서는 의심즉차(擬心卽差) 또는 동념즉괴(動念卽乖)라는 표현으로 사의(思議)를 하면 곧 진리와는 어그러지게 된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만약 운문선사가 대중에게 물은 ‘십오일’을 기준으로 이전 ․ 이후라는 분별로서 헤아리게 된다면 운문선사가 요구하는 의도를 바르게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필경 운문선사와 같은 조사의 입장에서 십오일이라는 단순한 날짜의 구분을 두어 물었을 리는 만무합니다.

무릇 선의 경지는 스스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부득이 운문선사는 제이의문(第二義門)인 방편적인 말로써 자신의 선의 경지를 “날마다 좋은 날이다”라고 나타내 보였던 것입니다. 이는 곧 우리들이 살아가는 날들을 무명에서 벗어난 시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이것이 바로 한결같이 좋은 날일 것이요. 임제선사가 말한 무위진인의 삶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일일시호일’은 『벽암록』 6칙, 『선문염송』 1009칙에 나오는 공안입니다.

인해스님 (동화사 강사) 글. 월간반야 2005년 5월 제5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