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아껴야

작년 초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우리의 정치나 사회는 지도자의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말미암아 계속 평지풍파가 일고 정쟁으로 연결되었다. 여야와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말의 진의를 파악하려 들고, 상대를 공격하고 말꼬리를 잡고 물고 늘어지는가 하면, 차마 해서는 안 될 수준의 말까지 하고 나면 당사자의 해명성 발언이 나오고는 진정이 된다.

사뭇 조용해지면 호사가들은 이맘때쯤 ꡒ또 무슨 말이 나올법한데ꡓ 하면서 기다리기라도 하는 분위기까지 있으니 기가 찰 일이다. 가야할 길은 바쁜데 말로써 말이 많아지고 국론이 분열되며 소모성 논쟁만 가중되니 가히 말은 아랫사람이나 윗사람을 막론하고 조심해야 될 일이다.

고려 말의 고승 나옹(懶翁) 혜근(惠勤) 스님은 ꡒ청산(靑山)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蒼空)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ꡓ 하시면서 수행자에게 가장 조심해야 할 과제는 ꡐ말ꡑ 조심을 하라고 읊으셨다. ꡒ입이 바로 화를 부르는 문(구시화지문․口是禍之門)이요, 혀가 바로 몸을 베는 칼(설시참도신․舌是斬刀身)ꡓ이라 하지 않았던가. 우둔한 사람의 마음은 입밖에 있지만, 지혜로운 사람의 입은 마음속에 있다고 했다. 일상생활에서 남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곧 바로 반박하거나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 없이 교만해져서 기분대로 말을 내뱉고 난 뒤 후회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어떤 사람은 의도적으로 말실수를 해서 다른 사람과 시비를 하려 한다고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자기에게 돌아오는 게 무얼까.

예로부터 수행자는 남의 일을 말하지 말라고 했다. 수행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 네 가지(사의재․四宜齋)에서도 ꡒ생각은 맑게 하고 용모는 엄숙하게 하며 언어는 과묵하게 하고 동작은 신중하게 하라ꡓ고 했다.

신(身)․구(口)․의(意)의 삼업(三業) 중에서도 입으로 비롯되는 업이 가장 무서운가 보다. 그러기에 천수경의 첫머리에 구업을 깨끗이 하는 진언(정구업진언․靜口業眞言)이 나오지 않는가.

통도사 큰절의 여름 안거 입재 법어에서 ꡒ안거 중 수행을 통해 무엇을 얼마나 얻으려고 하지 말고, 얼마나 버리고 비울 것인가를 고민하라ꡓ고 당부하신 글을 읽었다. 우리가 입을 자주 열고 함부로 말하는 것은 세속적인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진 것을 버리고 비우고 돌려주기 위해서라면 굳이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나무관세음보살.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4년 9월 제46호

동종교배(同種交配) 문화

동종교배(同種交配)란 유사형질(類似形質) 또는 같은 종(種)끼리의 수정 또는 수분을 한다는 유전학 용어다. 동종교배를 반복하면 유전자에 결함이 생겨 결국에는 종이 사멸하는 등 환경변화에 취약해진다. 반대로 이질적(異質的)인 형질간의 교배를 ‘이종교배(異種交配)’ 혹은 ‘잡종교배’라고 한다. 이종교배 1세대에서는 우성형질만 나타나는데 이를 ‘잡종강세’라 부른다. 부모의 강점만을 타고나기 때문에 성장이나, 산란, 수정 등 여러 면에서 부모세대에 비해 우수하다.

이러한 동종교배의 폐해는 여러 방면에서 확인된다. 한 때 외래종으로 우리 하천이나 습지의 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하는 듯 했던 ‘황소개구리’를 예로 들기도 한다. 확실한 원인을 찾지는 못했지만 결국은 동종교배로 인해 스스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멸한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제주도의 말〔馬〕 또한 몽고가 고려를 침공하고는 말을 기를 적지로 보고 사육하였지만 5백여 년이 지난 지금 결국 동종교배로 인해 ‘조랑말’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인간사회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지구촌의 경찰국가로 초월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미국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주역으로 떠오른 것을 두고도 잡종강세로 설명하는 학자들도 많다. 미국을 세운 사람들 자체가 세계 각지로부터 모여든 이민자들이어서 이들 잡종간의 결혼으로 미국은 전형적인 잡종강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유태민족을 잡종강세로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다. 유태민족은 지난 2천년 동안 나라를 잃고 전 세계를 떠돌면서 상당히 다른 형질의 민족들과 얽히고 설켰고 그것이 잡종강세로 나타났다고 한다. 천 년 전 신라의 패망을 근친혼으로 인한 지배계층의 퇴화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신라는 성골 진골 등 골품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통치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지배계층을 비롯한 귀족들은 골품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같은 골품 내에서만 혼인을 하였기에 근친결혼이 만연하였으니 이야말로 동종교배의 표본이라 할 것이다.

학문의 동종교배도 예외는 아니다. 한 대학에 입학한 학생이 학부와 대학원에서 수학할 경우 학사, 석사, 박사과정을 거치는 동안 내내 같은 교수의 지도를 받으니 이 또한 문제다. 몇 년 전 우리나라의 모 대학에서는 급기야 대학원 신입생의 50%이상을 타 대학 출신으로 해야 한다는 규정을 마련하기도 했다.

인간사회의 조직도 마찬가지다. 한 조직에 오래 근무하다보면 자연스레 그 조직의 논리와 문화에 젖어들게 마련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잘 적응하는 것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배타적이 되어 다른 조직과 문화를 가진 집단과는 잘 소통하기 어렵다. 이런 게 결국은 사상과 문화의 동종교배일 것이다. 남의 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폐쇄된 사회는 쇠퇴하기 마련이다. 다양한 요소들이 엉키고 어우러질 때 강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폐쇄된 사회는 효율성만 추구할 뿐 새로운 아이디어나 창의성의 발현은 어렵다. 생각이 다른 사람, 경험이 다른 사람, 전공이 다른 사람들이 만나야 시너지 효과가 생긴다.

작금의 우리 사회에 유행하는 말로 ○○○ 교우회, ○○○ 전우회, ○○○ 향우회는 절대 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KT니 PK니 JK니 하는 용어들이 정치판에서 사라져야 한다. 지연이나 학연이나 혈연이 무조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아니 긍정적인 면이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하는 사람들이 배타적으로 이를 악용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최근에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에 o o 회가 개입되었다고 하여 시끄럽다. 사정이나 정보, 인사라인에서 특히 동종교배는 철저히 배격되어야 한다.

어느 특정인의 지시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조직은 겉으로는 강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외부의 변화에 취약하기 마련이다. 소통을 통한 이종교배로 ‘우성인자(優性因子)’를 키워야 한다. 특히 정책을 입안하는 공직자들은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사상과 문화를 공유할 때 자신의 논리가 완벽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길 만이 동종교배문화의 우(愚)를 범하지 않는 첩경이 될 것이다.

김형춘 교수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8월 117호

돌아오신 고 김영성 거사님

지난 7월의 둘째 토요일 오후 영축산 자락 반야암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별로 이야기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오후 1시를 넘기면서 통도사와 영축산 주변에선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세찬 빗줄기가 쏟아지고 천둥번개가 오금을 못 펼 정도로 지축을 흔들었습니다. 3시가 지나자 비는 그치고 영축산은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운무는 7부 능선쯤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지난 3월 가족법회를 마치고 고(故) 김영성 거사께서 여러 법우들과 더불어 올랐던 좌선대 쯤 되는 것 같았습니다.

잠시 후에 우리가 기다리던 고 김영성 거사님의 유해가 생전에 즐겨 타시던 승용차로 반야암 뜰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초파일날 오셨을 때 보았던 초췌한 그 모습이 아니고 아들의 품에 안겨 오셨습니다. 인자하게 웃으시는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불과 40일전에는 걸어 오셨는데 이번엔 검은 깃을 두른 영정과 보자기에 싸인 유골로 오셨습니다. 더불어 이승에서 그와 인연을 맺은 수많은 사람들이 말없이 온 경내를 채웠습니다. 가족들의 흐느낌 소리만 간간히 들릴 뿐 다른 사람들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혼(魂)을 법당에 모셔 놓고, 백(魄)을 산천에 모시고자 생전에 망인께서 좋아하셨던 앞산에 올랐습니다. 지난 봄 등산 때 쓰다듬고 껴안고 기대고 하셨던 믿음직한 홍송(紅松)들을 스치며 얼마간 오르다 혼이 배인 영정이 모셔진 법당이 마주 바라다 보이는 곳에 모셨습니다. 고향 진동(鎭東)에 마련되어 있는 유택도 마다하고 굳이 본인이 이곳을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내려와 영축산을 바라보니 다시 운무가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에 오시기전에 대지의 오염되고 묵은 기운을 장대비로 하나도 남김없이 씻어 내더니만, 이제 고인이 이 산에 안기고 나니 다시 운무가 이불을 덮듯이 내려 왔습니다. 한시간이 채 못되어 반야암 경내까지도 운무가 날아 왔습니다. 자연의 조화치고는 너무나 신비로왔습니다. 이렇게 우리 김영성 거사님은 돌아와 편안히 쉬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바세계의 중생은 이승에 무엇이 그리도 미련이 많습니까. 인연 따라 왔다 간다는데 왜 그렇게도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나는 불교를 통해서 사람과 인연을 맺었고, 우리 반야암을 통해서도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어 왔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이번에 가신 김영성 거사님은 남달랐습니다. 법회 날 만날 때마다 “자주 못 와서 미안합니다. 많이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고 하면서 잡은 손의 느낌과, 그 인자하신 표정에서 나는 늘 ꡐ참으로 수양되신 분이구나. 앞으로 가능한 많은 가르침을 받아야지ꡑ라고 생각했습니다.

더불어 살면서 남으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고 남보다 앞서가는 사람은 언제나 깊은 믿음과 사랑이 삶의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차원 높은 인격을 바탕으로 원만한 인간관계를 일구어 왔다는 뜻이겠지요.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가 하면, 남을 배려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와 남이 공존하기 위해 가져야 할 태도와 마음가짐을 두고 많은 고민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기보다는 남을 배려하는데 혹은 사업에 무리를 하시다가 육신의 건강을 미쳐 챙기시지 못한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인간사회는 나 아닌 남의 좋은 것을 사랑하고 좋지 못한 것을 이해로 받아들여 잘못을 용서해 주고 포용하는 데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늘 말씀하신 큰스님의 뜻을 가장 잘 실천하였던 분, 어느 날 말없이 훌쩍 가셨다가 이제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신 거사님, 삼가 고 김영성 거사님의 명복을 빕니다. 나무관세음보살.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4년 8월 제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