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가득한 이끼 색이 옷에 묻혀오는 듯하고

滿牆苔色染人衣(만장태색염인의) 담장 가득한 이끼 색이 옷에 묻혀오는 듯하고

盡日常關竹下扉(진일상관죽하비) 대나무 사립문은 종일 닫혀 있는데

忽有墨香來墮案(홀유묵향래타안) 홀연히 책상에 내리는 먹의 향기는

疑言海鶴帶將來(의언해학대장래) 바다 학이 가져왔나 의심 되구나.

초의(草衣:1786~1866) 선사는 다茶와 시詩로 유명한 행적을 남긴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의 교분, 그리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의 교분 등으로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던 스님은 그가 머물었던 대흥사 일지암(一枝庵)을 제목에 넣은 [일지암시고]와 [일지암문집]에 많은 시문을 남겨 놓았다.

위의 시는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이 보내준 시를 받고 화답해 준 시 가운데 하나이다. 초당의 담장과 이끼, 사립문이 나오고 홀연히 책상에 내리는 먹의 향기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책상에서 보낸 서찰을 읽었다는 이야기다. 읽고 보니 글자를 적은 먹의 향기를 통해 편지를 보내준 사람의 고매한 인품을 느껴져 바다의 학에 비유 찬탄을 한 내용이다.

달이 밝아 그림 같은 산집의 밤이여

월명여화산가야 月明如畵山家夜 달이 밝아 그림 같은 산집의 밤이여,

독좌징심만뢰공 獨坐澄心萬籟空 텅 빈 고요 속에 홀로 앉은 이 마음 맑은 물같네.

수화무생가일곡 誰和無生歌一曲 누가 세월 밖의 노래를 따라 부르나?

수성장시잡송풍 水聲長是雜松風 솔바람 물소리가 길게 섞인다.

산속에 사는 어느 고고(孤高)한 사람의 밤의 노래다. 달빛 속에 그림 같은 산경(山景)이 있고 이 밤의 주인공이 가을 물처럼 가슴이 맑아진다. 갑자기 아득한 시원(始原)을 넘어 은은한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계명도 없고 운곡도 없는 이른바 겁외가(劫外歌)인 무생곡(無生曲)이다. 세월 밖에서 들려오는 이 노래를 듣고 있는데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솔바람 소리와 화음을 이룬다.

이 물소리 솔바람 소리가 세월 밖에서 들려오는 노래 소리에 장단을 맞춘다. 다시 듣고 보니 바로 솔바람 물결소리가 무생곡이다. 이 곡조 없는 노래에 왜 애잔한 슬픔 같은 것이 묻어 나오는가? 담박한 영혼 속에도 애초에 생명의 비원 같은 애잔한 슬픔이 있었나 보다.

이 시는 설잠(雪岑) 김시습(1435~1493)의 시이다. 매월당(梅月堂)으로 더 알려진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풍운아의 일생을 살았던 김시습의 스님으로 있었을 때의 법호가 설잠이다. 근래 그의 유저 『십현담요해』고본이 해인사 백련암에서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조선조 초기 배불정책에 의해 수난을 겪고 있던 불교의 암흑기에 그가 혜성처럼 나타나 『화엄법계도주』, 『법화경별찬』, 『조동오위요해』 등을 저술하여 어두운 세상에 불법을 유포, 전수하는 큰 공적을 남겼다.

세월의 풍경소리

가끔 혼자 산방에 앉아 좌선을 하거나 간경을 하다가 법당 처마 밑에서 들려오는 풍경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뎅그렁 댕’ ‘뎅그렁 댕’ 바람에 물고기 모양의 쇠붙이가 흔들리면서 방울종을 치는 소리가 고요한 산속의 정적을 깨뜨리며 맑은 멜로디를 허공에 흩는다.

천동여정(天童如淨:1163~1228)선사는 풍경소리를 듣고 유명한 선시 반야송(般若頌)을 지었다.

“온 몸이 입이 되어 허공에 걸려

동서남북 바람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똑같이 반야를 노래하네.

뎅그렁 댕 뎅그렁 댕”

풍경소리가 반야의 노래라는 것은 물론 도를 깨친 분상에서 하는 말이다.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산하대지의 모든 것이 부처님의 법을 설하고 있다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바람 소리 물소리를 위시한 이 세상 모든 소리가 반야의 소리로 들릴 수 있다. 심심 미묘한 법성의 이치에서 세상을 보고 들을 때는 번뇌를 떠나 있는 또 다른 소식이 보이고 들린다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차원에 따라 객관의 경계를 다르게 받아들인다. 마음이 보고 듣는 감각적인 느낌도 심리적 상태에 따라 매우 다르다. 가령 오래 그리워하던 사람을 만났을 때 웃음으로 만나기도 하고 울음으로 만나기도 한다. 정한(情恨)이 맺힌 남북 이산가족이 만나는 장면은 언제나 눈물의 바다를 이루고 있지 않던가? 난리 통에 객지를 전전하며 고향의 처자형제 소식을 모르고 있던 두보는 부서진 성안에 들어가 시를 지으며 꽃이 눈물을 흘리게 한다 하였다. 비극을 당하여 남모를 고통의 아픔을 안고 사는 사람일수록 감춰둔 눈물의 양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는 분명 비극도 있고 희극도 있는 것이지만 사람 사는 법 그 자체에는 슬픔과 기쁨이 떠나 있다. 번뇌를 객진(客塵)이라 하는 것은 내 집에 찾아온 손님처럼 본래 없던 것이 외부에서 우연히 들어와 손님처럼 있다는 것이다.

이백(李白)은 그의 글에서 세월을 손님이라고까지 표현하였다. 『춘야연도리원서』에서 그는 “하늘과 땅은 만물이 쉬는 숙소요, 세월은 대대로 길가는 나그네”라 하였다. 사람을 두고 생각해 볼 때 몸은 나이를 먹는 물건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세월 따라 늙어지는 것을 뜻한다. 시간의 지배를 받는 것이니까 이 몸도 결국은 나그네 신세를 면치 못한다. 태어나고 죽는 생사가 과객의 행로란 말이다. 그러나 몸의 주인인 마음을 생각해 보자 마음이 나이를 먹는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하늘 곧 허공이 나이를 먹는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물질적 형체가 아닌 텅 빈 허공을 두고 연륜을 헤아려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가고 오는 내왕이 끊어진 것, 그러면서도 하늘과 땅보다 먼저이고 동시에 하늘과 땅보다 나중인 우리의 마음 이것을 그냥 한 물건이라고 불러오기도 했다. 『금강경오가해서설』이나 서산스님의 『선가귀감』 첫 구절에 “한 물건이 여기 있다 하였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한 물건이 있는 것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때로는 허공신(虛空身)이 되어 온 세상을 몸속에 포함해 버리는 무한한 작용을 이 물건이 있어서 하는 것이다.

해가 가고 오는 세월의 어귀에서 잠시 나그네 심사가 되어 묵상을 하면서 입선(入禪)의 시간을 가져본다. ‘이 뭣고!’ 하고 한 물건을 챙겨 보지만 화두를 밀치고 스며드는 새치기 생각이 자꾸 일어나 뒤돌아 보이는 게 많다. 살아온 사연들이 애상에 물들기도 하고 가버린 시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도 떠오른다. 가슴 깊숙이 세월의 풍경소리가 자꾸 들린다. 오늘도 동쪽에 뜬 해가 서쪽으로 질 것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1월 11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