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명여화산가야 月明如畵山家夜 달이 밝아 그림 같은 산집의 밤이여,
독좌징심만뢰공 獨坐澄心萬籟空 텅 빈 고요 속에 홀로 앉은 이 마음 맑은 물같네.
수화무생가일곡 誰和無生歌一曲 누가 세월 밖의 노래를 따라 부르나?
수성장시잡송풍 水聲長是雜松風 솔바람 물소리가 길게 섞인다.
산속에 사는 어느 고고(孤高)한 사람의 밤의 노래다. 달빛 속에 그림 같은 산경(山景)이 있고 이 밤의 주인공이 가을 물처럼 가슴이 맑아진다. 갑자기 아득한 시원(始原)을 넘어 은은한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계명도 없고 운곡도 없는 이른바 겁외가(劫外歌)인 무생곡(無生曲)이다. 세월 밖에서 들려오는 이 노래를 듣고 있는데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솔바람 소리와 화음을 이룬다.
이 물소리 솔바람 소리가 세월 밖에서 들려오는 노래 소리에 장단을 맞춘다. 다시 듣고 보니 바로 솔바람 물결소리가 무생곡이다. 이 곡조 없는 노래에 왜 애잔한 슬픔 같은 것이 묻어 나오는가? 담박한 영혼 속에도 애초에 생명의 비원 같은 애잔한 슬픔이 있었나 보다.
이 시는 설잠(雪岑) 김시습(1435~1493)의 시이다. 매월당(梅月堂)으로 더 알려진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풍운아의 일생을 살았던 김시습의 스님으로 있었을 때의 법호가 설잠이다. 근래 그의 유저 『십현담요해』고본이 해인사 백련암에서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조선조 초기 배불정책에 의해 수난을 겪고 있던 불교의 암흑기에 그가 혜성처럼 나타나 『화엄법계도주』, 『법화경별찬』, 『조동오위요해』 등을 저술하여 어두운 세상에 불법을 유포, 전수하는 큰 공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