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행원품 (8) – 참제업장원

<경문>

선남자여, 업장을 참회하여 제거한다는 것은 보살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과거의 시작을 알 수 없는 오랜 겁 동안 탐내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몸과 말과 뜻으로 온갖 악업을 지은 것이 한량없고 가이 없어, 만약 이 악업이 형체가 있다면 허공 속에 다 들어갈 수가 없으리라. 내가 이제 모두 청정한 삼업으로 법계 작은 티끌 수 국토의 일체 부처님과 보살님 앞에 빠짐없이 성심으로 참회하되 다시는 나쁜 업을 짓지 아니하고 항상 청정한 계행의 일체 공덕에 머물러 있으리라” 하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하여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면, 나의 참회도 이에 다하거니와, 허공계나 중생의 번뇌가 다할 수 없는 까닭에 나의 참회도 다함없이 생각마다 계속하여 끊임이 없되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에 조금도 지치거나 싫증을 내지 않느니라.

<풀이>

인간의 행위를 업이라 일컫는데, 이 업은 깨닫지 못한 불각의 상태에서 야기되어, 자기의 청정한 본래 마음인 진심을 어기고 나타나는 행동이다. 때문에 업이 지어지면 생명을 손상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잘못된 행위가 어떤 잠재적인 충동력을 만들어 생명의 발전을 장애하는 요인이 될 때, 이것을 업의 장애라 하여 ‘업장’이라 부른다. 중생을 업보중생이라 하기도 하며, 또는 업장을 쌓아 놓은 존재로 본다. 무시이래로 쌓아온 업장이 만약에 형상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온 우주 허공 속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그 부피가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표현은 매우 회화적이다. 업장은 부처님의 공덕을 성취하는 데 장애가 되며, 또한 인간의 가치를 몰락시키는 장본인으로, 그것의 소멸을 위한 행원을 닦는다.

‘참회’란 범어 ‘크사마’(ksama)를 ‘참마’라 음역하고, 이를 다시 줄여 참(懺)이라 한다. ‘회’(悔)란 의역된 말로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청한다는 뜻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도덕적으로 그릇된 행위를 범하였을 때 참회를 하도록 가르쳤다. 계율을 어겼을 때 반드시 참회를 해야 하며 이 참법을 정기적으로 실시하도록 했다. 보름마다 실시하는 포살과 안거가 끝날 때 자자(自恣)를 실시하도록 한 예가 바로 그것이다. 율문의 주석에 명시된 참회법에는 5가지의 조건을 갖추어 참회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첫째, 시방의 불보살을 영접하고 둘째, 경이나 다라니를 암송하고 셋째, 자기의 죄명을 말하고 넷째, 서원을 세우며 다섯째, 가르침대로 증명을 받는다.

불교 수행에 있어서 참회는 수행에 대한 의지를 키우는 일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정화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참회하는 마음을 통해 일체 악업을 떠나게 되고 청정한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장경》에는 중생을 죄업을 짓는 존재로 인식하여, 중생은 자꾸자꾸 죄를 짓는다고 밝히고 있다. 죄를 지으면 다음의 과보가 점점 더 나빠져 더 큰 불행을 자초하므로, 반드시 지은 죄를 참회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본래 갖추고 있는 덕성이 올바로 발휘되지 못하는 상태를 올바르게 발휘되도록 한다는 뜻이다. 인간의 본성이 부처의 공덕을 구족한 불성임에도 불구하고, 이 불성을 외면하고 그릇된 악업을 저지르는 것이 마치 밝은 태양을 등지고 어둠을 붙잡고 있는 상태와 같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도덕적 불감증에 걸려 부패로 얼룩지고 있다는 탄식은 바로 ‘참회 정신’이 실종되었음이다. 모든 인간의 사회적 불행이 모두 인간의 죄업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생활 주변에 불행이 오고 고난이 닥쳐오고 궂은 일이 생기는 것 등은 그 원인이 자기 자신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착안하여 스스로 마음을 돌이켜 참회를 닦아 나가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판의 대상이 될 요소들을 진리의 광명이신 부처님 앞에 폭로시켜야 한다. 내 결점을 고백하면서 부처님에게 드러내 참회를 구하면 끓는 물에 얼음이 녹듯이 죄업이 녹아 없어지게 되고 청정한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내 마음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참회기도를 할 때 상․중․하의 ‘삼품 참회’의 이야기가 있다. 온몸에 열이 오르고 눈물이 나오는 참회가 하품 참회요, 털구멍에서 뜨거운 땀과 눈에서 피가 나오는 참회가 중품 참회며, 상품 참회는 온몸의 털구멍에서 땀이 나와 옷이 모두 젖고 눈에서 피가 나오는 참회를 상품 참회라 했다. 참회에 어느 정도 정성을 기울이느냐로 구분한 말들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11월 제48호

보현행원품 (7) – 광수공양원 (3)

<경문 3>

만약 모든 보살이 법공양을 행하면 곧 여래를 공양하는 것이 되며, 이와 같이 수행하는 것이 진실한 공양이기 때문이니라.

이 광대하고 가장 훌륭한 공양을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 업이 다하며, 중생의 번뇌가 다하면, 나의 공양도 다하지마는 허공계 내지 번뇌가 다할 수 없으므로 나의 이 공양도 또한 다함없이 해서 생각마다 계속하여 끊임없이 하여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에 조금도 지치거나 싫증을 내지 않느니라.

<풀이>

보현행원은 끝없는 실천이요 정진이다. 법공양.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공양으로, 이 공양만 잘하면 성불은 확실해진다. 때문에 법공양에 투철한 정신만 갖추어지면 사실 모든 행원이 다 성취되는 것이다. 예로부터 불교 수행의 정신을 위법망구(爲法忘軀)라고 했다. 법을 위하여 몸을 잊는다는 말은 법을 위하여 몸을 아끼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극한 구법정신에 의해 우리 사회에 부처님의 정법이 구현되는 것이다. 아노미(anomy) 현상으로 인해 부패의 증후군이 들끓고 있는 이 시대, 사회정의 구현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는 이 시대에 있어서 법을 공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지상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ꡒ나를 보려거든 법을 보라ꡓ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부처님이 설해 놓은 법을 실천하는 것이 법을 공양하는 것이고 법을 공양하는 것이 부처님을 위하고 중생을 위하는 것이다. 결국 불국토 건설의 초석은 법공양에 있다. 범부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탐․진․치 삼독 따위의 그릇된 번뇌 미혹을 제거하고 자성청정심의 각심(覺心)을 발휘할 때 법공양은 저절로 행해지는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10월 제47호

보현행원품 (6) – 광수공양원 (2)

<경문>

선남자여, 모든 공양 가운데 법공양이 가장 으뜸이니, 이른바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공양이며, 중생을 이롭게 하는 공양이며, 중생을 섭수하는 공양이며, 중생의 괴로움을 대신 받는 공양이며, 부지런히 선근을 닦는 공양이며, 보살의 업을 버리지 않는 공양이며, 보리심을 여의지 않는 공양이니라.

선남자여, 앞에서 말한 공양의 많은 공덕을 한 생각 동안 닦는 법공양의 공덕에 비교한다면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백천억 분과 한 털끝을 백분으로 나누었을 때의 수, 계산할 수 있는 수, 헤아릴 수 있는 수, 비유할 수 있는 수, 가장 작은 극미한 수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께서는 법을 존중하기 때문이며,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을 출생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풀이>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는 불교의 목적을 나타내는 이 말은 곧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공덕 성취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보현행원의 참뜻도 들어 있다. 공양을 닦는다는 취지 역시 위로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제도하는 불교의 본령에 부합되는 일이다. 모든 공양 중에서도 법공양이 으뜸이라고 강조한 이 대목은 법을 베푸는 일이 무엇보다도 우선되는 최상의 가치임을 밝혀 놓고 있다. 복이나 공덕을 유루(有漏)와 무루(無漏)로 구분하여 무루의 가치라야 불교의 참 가치임을 밝혀 놓은 법문은 반야부 경전 등에 누누이 설해져 있다. 깨진 그릇에 물이 새듯이 유루복은 결국 소모되고 만다. 샘이 없는 무루복이라야 번뇌를 극복하고 해탈을 기약할 수 있다. 이 세상에 가득한 칠보(七寶)를 남에게 보시하는 공덕보다도 경전의 사구게(四句偈)를 수지하는 공덕이 더욱 수승하다는 금강경의 말씀이나, 발심공덕을 찬탄한 화엄경의 말씀도 무루복을 성취해야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을 천명한 말이다.

공양 가운데서 법공양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재물 공양의 물질적 가치는 도를 깨닫는 직접적인 계기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 즉 다르마(dharma)를 알아야 깨달음을 얻어 해탈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마치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제공되어지는 음식이나 의복 등의 물질적 혜택이 고맙고 은혜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감옥을 나오도록 석방을 시켜주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우선 문제라고 할 수 있듯이, 해탈의 자유를 구하는 수행의 차원에서는 법을 공양하는 일보다 더 우선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 법공양의 내용을 총괄적으로 설명한 말이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한다는 것으로, 다시 말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제 생활에서 실천하지 않고는 법공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법을 존중하고 또 법이 부처님을 출생하는 모체이므로 법을 위하는 일이 최상의 공양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9월 제4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