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 (11) 근본에 돌아가면

귀근득지(歸根得旨)요 수조실종(隨照失宗)이니

(근본에 돌아가면 뜻을 얻지만 비춤을 따르면 종지를 잃는다)

근본에 돌아간다는 것은 경계를 따라가는 식심을 자신의 본성자리로 거두어 들인다는 뜻이다. 선문(禪門)에서는 회광반조(廻光返照)라는 말이 자주 쓰이는데, 이것은 객관의 대상을 찾아 불멸을 일으키는 식심(識心)을 쉬게 하고 고요히 내면의 자성을 응시하려는 것이다. 또 <능엄경>에는 반문문성(反聞聞性)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귀가 소리를 듣는 경우에는 이근(耳根)이 성진(聲塵)을 따라가는 것이지만, 성진인 소리를 듣지말고 듣는 주체, 즉 듣는 성품을 듣는다는 것이다.

수조(隨照)란 일어나는 식심(息心)을 따라 객관의 경계를 향하는 번뇌망상의 움직임인데, 이것이 횡행하면 근본을 망각하여 도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수유반조(須臾返照)하면 승각전공(勝却前空)이니라.

(잠깐 돌이켜 비춰보면 앞은 공함보다 뛰어나니라.)

잠깐동안 돌이켜 비춰보면 객관을 향하여 치구(馳求)하던 모든 망경계(망경계)는 사라지고, 주관과 객관의 대(對)가 끊어진 도의 당체를 파악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객관의 경계를 부정하여 말하던 공(空)을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즉 현상의 존재를 공화(空化)시켜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공의 경계보다 반조하는 찰나에 체득하는 무위(無爲) 의 도가 훨씬 수승하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반조(返照)는 사골르 초월한 직관의 세계인 반면, 앞 구절에서 말한 수조(隨照)는 마음이 경계를 따라 움직이는 사고를 말하는 것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12월 제97호.

신심명 (10)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다언다려(多言多慮)하면 전불상응(轉不相應)이요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더 상응치 못하는 것이요)

도(道)의 진리는 말을 듣고 이해하거나 생각으로 궁리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갈 곳이 없어진[言語道斷 心行處滅] 경지에서 터득되어지는 것이 도이므로 말과 생각으로써 접근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말과 생각으로써 도에 접근하려 한다면 더욱더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

‘도는 아는 데도 속하지 아니하고 모르는데도 속하지 않는다[道不屬知不知]’라는 말처럼, 알고 모르는 지식의 대상이 아닌 도를 이론적 논의나 사변적 논리로 설명하려는 것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절언절려(絶言絶慮)하면 무처불통(無處不通)이니라

(말과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

말길이 끊어지고 또한 생각이 나아갈 곳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도는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식심(識心)의 분별이 사라진 경계에서만 도를 만날 수 있는 것이지, ‘이것이냐 저것이냐’며 기호에 맞추고 비위에 맞추는 취사심(取捨心)에서는 도를 만나지 못한다.

어느 산이든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더 올라갈 길이 없어 사방이 허공으로 트여버리듯이, 이치의 궁극에 이르면 모든 것이 도(道)로 통해진다. 그러므로 ‘대도는 문이 없다[大道無門]’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상대적 차별에서는 말이 필요하며 생각도 일어나지만, 절대의 무분별에서는 말이 없고 생각도 끊어지는 것이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11월 제96호

신심명 (1) 승찬스님

중국 불교사에서 불후의 명저로 알려진 신심명은 삼조 승찬대사가 지은 것이다. 이 신심명은 4언 146구 584자로 되어 있는 독특한 문체로 운문의 형식을 띄고 있는 명체(銘體)의 글이다. 명(銘)이란 ‘마음에 깊이 새겨둔다’는 뜻으로 잠(箴)과 함께 주로 문장 속에 설해진 내용을 특별히 강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좌우명이라는 말이 있듯이, 명체로 되어 있는 글은 사람의 마음을 깊이 새겨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불교의 전적(典籍) 가운데 명(銘)자를 붙인 글은 부(傅)대사의 심왕명(心王銘)을 비롯하여 법융(法融)스님의 심명(心銘), 그리고 망명(亡名)스님의 식심명(息心銘) 등이 있다.

이 신심명은 장편(長篇)의 시(詩)와 같은 운치를 풍기면서 불교의 심오한 이치를 깨달음의 차원에서 노래하고 있다. 물론 영가(詠嘉)스님의 증도가(證道歌)도 깨달음의 노래라고 번역되듯이, 도를 깨달은 각후(覺後)의 경계를 설해, 수도자들의 분발을 촉구하고 있지만, 이 신심명 역시 도를 깨닫는데 있어서 가장 요긴한 포인트를 설해 놓았다. 특히 선(禪)의 지취(旨趣)를 표현하여 공안(公案)을 참구하는 실참(實參)의 경계라 할 수 있는 격외도리(格外道理)에 관해 문자를 통하여 밝혀놓은 명문(名文)이다. 뿐만아니라 대장경에서 설해놓은 불법의 심오한 이치를 간결한 언어로 함축하여 그 대의를 극명하게 밝혀 놓았다.

내용을 보면 변견(邊見)의 40대(對)를 설하면서 모든 상대적인 개념인 취(取)‧사(捨)증(憎)‧공(空)‧유(有)‧선(善)‧악(惡)‧시(是)‧비(非) 등을 동시에 부정하여 중도(中道)를 천명해 놓고, 궁극적으로는 중도의 견해도 여윌 것을 설해 놓았다. 간결한 문체와 응축된 내용으로 일체의 군더더기 말을 배제함으로써 선문(禪門)의 필독서로 여겨져 왔다. 승찬스님은 생몰연대(生沒年代)가 정확치 않으나, 중국 수(隋)나라 때의 스님으로 양제대업(煬帝大業) 2년(서기 606년)에 입적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세수(世壽)가 얼마였는지도 알려지지 않으며, 다만 당나라 때 현종이 감지(鑑智)라는 시호를 올리고 탑호를 각적(覺寂)이라 하였으며, 당시 재상이었던 방관(房琯)이 탑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원래 승찬대사는 출가하기 전에 요즘의 문둥병인 풍질(風疾)이라는 병을 앓고 있었다. 병고에 시달리던 스님은 2조 혜가스님을 찾아가 느닷없이 여쭈었다.

“저는 풍질을 앓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의 죄를 참회케 해 주십시오.”

그러자 혜가스님께서 말했다. “그대의 죄를 가져 오너라. 그러면 죄를 참회시켜 주겠다.”

“죄를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죄는 모두 참회되었느니라. 그대는 그저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에 의지해 살아라.”

“지금 스님을 뵈옵고 승보(僧寶)를 알았으나 어떤 것을 불보와 법보(法寶)라고 합니까?”

요산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3우러 제8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