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 (4) 어김과 따름의 서로 다툼

위순상쟁(違順相爭)이 시위심병(是爲心病)이니

어김과 따름의 서로 다툼은 이것이 마음의 병이 되니

위순상쟁(違順相爭)이란 현대적 개념으로는 갈등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고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인간의 모순과 갈등은 고통과 불행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병은 고쳐야 하는 것으로 도가 회복되면 건강해지는 것이다. 물론 사회과학적인 면에서 본다면 인간사회의 향상을 위하여 고민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후차적인 방펀일 뿐이며, 본질의 이치에서는 중도를 통달한 경계라야 된다는 것이다.

불식현지(不識玄旨)하고 도로염정(徒勞念靜)이로다

현묘한 뜻을 알지 못하고 한갓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

깨달음이란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간택하는 마음과 증애하는 마음 그리고 어기고 따르는 마음 등을 버릴 때 무상대도는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으로, 주관과 객관이 대응하는 관계에서 얻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간혹 수행의 방법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생각만 고요히 하면 된다는 정적(靜的)인 것에 치우친 편견으로 공부를 삼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폐단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한 말이다. 즉 현묘한 이치를 터득해야 도에 합치되는 것일 뿐, 애써 마음만 고요히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정(靜)의 반대인 동(動)에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상대적인 분별의 경계를 떠나 중도실상에 나아가야 도를 만날 수 있는 것이며, 어느 한쪽에 치우친 변견(邊見)을 갖고서는 도를 찾을 수 없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6월 제91호

신심명 (3) 털끝만큼이라도

호리유차(毫釐有差)하면 천지현격(天地懸隔)하나니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지나니

간택과 증애를 용납하지 않은 도에 있어서 만약 조금이라도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나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개재된다면 도와의 거리는 하늘과 땅 사이처럼 멀어진다는 것으로, 이것 때문에 도는 어려운 것이 된다. 지극히 쉬운 도, 즉 오직 간택하고 증애하는 마음만 버리면 얻게 되는 도는 매우 간단한 것이지만, 실은 취하고 버리며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이로써 미혹의 구름이 되어 도를 보지 못하게 하니, 한 생각의 오차는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먼 것이다.

욕득현전(欲得現前)이어든 막존역순(莫存順逆)하라

도가 앞에 나타나기를 바라려거든 따르고 거슬리는 것을 두지 말라

도를 깨닫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대로 버리고 취하는 간택과 좋아하고 싫어하는 증애를 떠나야 하는데, 사람의 마음은 경계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것에는 애착을 내고 싫은 것에는 거부를 한다.

이른바 순경계와 역경계의 상대적인 객관환경이 주관의 심리에 의해서 나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따르고 거슬리는 순역(順逆)이 마음에 생기면 도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순역을 두지 말라고 한 것이다. 선수행(禪修行)에서 무심의 경계를 강조하는 것도 같은 이치인 것이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5월 제90호

신심명 (2) 지극한 도는

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 유혐간택(唯嫌揀擇)이니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다.

지극한 도란 깨달음 자체,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흔히 무상정각(無上正覺) 혹은 무상대도(無上大道)라고 말하는 깨달음의 경지는 전혀 어려움이 없다는 말로써 <신심명>은 시작된다.

<열반경>에 말하기를 마음이 있는 자는 누구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마음이 없는 자는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누구든지 도를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도(道)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며, 또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간택이란 취하고 버리는 분별의식을 말한다. 이것과 저것의 상대적인 차별 속에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친 소견을 가질 때 마음에는 집착이 생기며, 또 이 집착은 도를 등지게 한다. ‘무심이 도다(無心是道)’는 말이 있듯이 식심(識心)이 일어나 마음이 출렁거리면 도의 본체에 계합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도를 장애하는 근본요인은 바로 식심분별(識心分別)이므로 이것만 없으면 도는 쉬운 것이라는 말이다.

단막증애(但莫憎愛)하면 통연명백(洞然明白)하리라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는 일 없으면 환하게 명백하느니라.

미워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에 움직이는 인간의 의식작용이지만, 이것이 바로 어떤 관념의 고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취하고 버리려는 마음이 있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 때문이다.

도(道)라는 실상의 참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시야가 밝아야 하는데, 증애심이 있으면 정법의 눈을 흐려 도의 당체를 볼 수 없으므로 증애심이 없어지기만 하면 도는 하나도 막힘없이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대주(大珠)스님의 <돈오입도요문(頓悟入道要門)>에서는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두 가지 성품이 공해져 저절로 해탈한다”고 했다.

또한 증애심이란 중생의 번뇌를 일으키는 근본으로 108번뇌설에 나오는 설명처럼,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은 번뇌를 야기한은 출발이 된다.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대할 때 호(好) 오(惡) 평등(平等)과 고(苦) 락(樂) 삼수(三受)의 분별이 일어나 36가지 갈래가 나눠지며, 여기에 일념의 삼세(三世)가 배대되어 108번뇌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결국 중생은 번뇌 때문에 도를 보지 못하는 것이며, 번뇌가 움직이는 심리는 바로 좋아하고 미워하는데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