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 (16) 세상의 모든 것은 번듯이 존재하고 있지만

欲知兩段(욕지양단)인대 元是一空(원시일공)이니라

두 쪽을 알고자 할진대 원래 하나의 공이니라.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것은 원래 둘 다 하나로 공한 것이다. 물론 ‘공하다’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일반적인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있다’라는 유(有)의 개념을 부정하는 상대적 공空이 아니라 유무(有無)가 동시에 끊어진 절대 초월의 경지를 말한다.

인식의 주체와 인식되어지는 객체가 모두 헛된 것이므로, 그것이 사라진 자리가 바로 본성의 자리라는 것이다. 여기는 생멸(生滅)이 없는 무생멸(無生滅)의 세계이다. 선善도 생각하지 않고 악(惡)도 생각하지 않는 불사(不思)의 경계에 어찌 주객(主客)이 설 수 있겠는가?

중봉(中峰)은 다시 이렇게 송(頌)했다.

夢中睹得黃金藏(몽중도득황금장) 꿈 속에서 노다지 황금을 캐고

又跨靑鸞上寶臺(우과청란상보대) 푸른 봉황을 타고 보대에 올랐네.

盡夜喜歡無着處(진야희환무착처) 밤새도록 기뻐서 어쩔줄 몰랐는데

天明只落得場騃(천명지락득장애) 날이 밝아 깨어보니 멍청한 꼬락서니

一空同兩(일공동양)하야 齊含萬象(제함만상)이라

하나로 공한 것이 둘과 같아 가지런히 만상을 포함하느니

공하다 해서 공에 치우쳐 버리면 단멸공(斷滅空)이 된다. 또한 아주 없다고 일체를 완전히 부정만 하면 변견(邊見)에 해당되는 단견(斷見)이다. 그러므로 하나로 공해진 것이 둘로 양분된 것과 본질의 내용에서는 다름이 없이 같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도리로서 주객이 하나로 공해졌지만 공한 그 속에 주객이 부정되어진 채 있는 것이다.

공하다는 것은 ‘아주 없다’는 뜻이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있으면서 없다는 것을 뜻한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은 번듯이 존재하고 있지만 관법(灌法)을 통하여 보면 없다는 것이다. 관(觀)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은 결국 무심으로 실천되어지는 수행의 근본을 나타내는 말이다.

허공이 삼라만상을 포함하듯이, 진공(眞空)이 묘유(妙有)를 머금고 있어 공관(空觀)으로 부정되어진 존재의 가상(假相)이 다시 살아나는데, 이것을 가관(假觀)이 다시 살아나는데, 이것을 가관(假觀)이라고 한다. 이처럼 현상의 제법은 공한 것이면서 그대로 연기된 모습을 가지는데, 이른바 반야심경의 색불이공(色不異空)은 공관이요, 공불이색(空不異色)은 가관이다. 또한 공관과 가관이 서로 회통(會通)되는 것을 중관(中觀)이라고 하는데, 중관은 곧 중도이다.

중도를 나타내는 말에는 쌍차쌍조(雙遮雙照) 혹은 쌍민쌍존(雙泯雙存)이 있다. 즉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양면을 동시에 부정하면서 동시에 긍정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객관의 경계에 부여해 놓은 개념이 어떠한 집착을 이룰까봐 이를 빼앗는 특이한 논리를 표현하는 말이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9년 6월 제103호

신심명 (15)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무구무법(無咎無法)이요 불생불심(不生不心)이니라.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나지 않으면 마음이라 할 것도 없다.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다는 것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무심의 경게에서는 모든 것이 원융무애하여 개체적 개별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경지에는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주객(主客)이 없으면 능소(能所)가 벌어지지 않는다. 일체의 명상(名相)이 끊어져 언어의 설명이 미치지 못한다.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마음이라 할 것도 없는 것이다.

이 얼마나 초연한 말인가. <능엄경>에는 ‘마음이 생기니 가지가지의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으지니 가지가지의 법의 없어진다. (心生則 種種法生 心滅則 種種法滅)’이라고 했다. 마음이 법을 탄생시키며 또 소멸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없는 경우에는 생길 법도 없는 것이며 벌어질 법도 없는 것이다.

중봉스님의 송(頌)에서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법법지인무구구(法法只因無咎咎) / 심심다위불생생(心心多爲不生生) / 한원야곡무산월(寒猿夜哭巫山月) / 객로원래불가행 (客路元來不可行)’ “법이라는 법이 다만 허물이 없기 때문에 허물이요 / 마음이라는 마음이 다분히 생기지 않으므로 생긴다. / 무산의 달을 보고 우는 원숭이의 차가운 울음소리 / 길가는 나그네도 원래 이곳은 다니지 못하네.”

능수경멸(能隨境滅)하고 경축능침(境逐能沈)하야

(주관은 객관을 따라 없어지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버려)

능(能)은 능동의 주체 즉 주관이요, 경(境)은 객관이다. 주관이 객관을 따라 없어져 버리며 객관은 주관을 좇아 사라져 버린다는 것은, 주객(主客)의 상대 중 어느 한 쪽이 없으면 서로 소멸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객이 남아있으면 진여자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늘을 날아가는 솔개 한 마리를 바라보다가 점점 멀리 날아가 시야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으면 솔개를 바라보던 시각도 없어진다. 반대로 시야에 들어오던 솔개도 눈을 감아버리면 보이지 않듯이, 주객은 항상 서로 함께 마주해 있는 것으로 한 쪽만으로는 결코 자신의 영역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눈이 새를 보는 주객의 상대가 눈이 없어도 못보고 새가 없어도 못 보는 것이다.

경유능경(境由能境)이요 능유경능(能由境能)이니

(객관은 주관을 말미암은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을 말미암은 주관이니)

주관이 있기 때문에 객관이 있으며, 또 객관이 있기 때문에 주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주객이 서로 상대하여 서 있는 것도 대도(大道)를 장애하므로, 주객이 끊어져야 도에 계합한다. 주객이 나누어진 경계는 마치 파도가 일어나면 거울같은 본래의 수면(水面)이 깨어져 버리는 것처럼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는 생멸(生滅)의 경계로서, 이러한 생멸 속에서는 진여자성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즉 주관과 객관을 버려야 진여(眞如)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9년 5월 제102호

신심명 (14)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이유일유(二由一有)니 일역막수(一亦莫守)라.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으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하나의 막대기에 양쪽의 끝이 있는 것처럼 양변을 이루는 두 가지의 변견은 하나 때문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로 인하여 둘이 있다면 하나와 둘도 결국엔 상대적인 양변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둘을 지양한 하나를 내세워도 안되는 것이다. 가령 양변을 여읜 중도(中道)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크게 그르치는 것이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융통자재한 경지가 중도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대도(大道)에는 사실 논리의 규정이 있을 수 없다. 철학에서 말하는 단원론(單元論)이나 다원론(多元論)은 중도의 이치에서 보면 다같이 변견에 속한다. 일다(一多)가 서로 용납하여 원융무애한 것이라야 중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심불생(一心不生)하면 만법무구(萬法無咎)니라.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느니라.)

한 마음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주관이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을 말한다. 즉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 무심해짐으로써 주관과 객관이 서로 대응하지 않는 상태가 되면, 모든 것에 걸림이 없이 자유로워져 대립과 갈등 따위의 허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는 화엄학(華嚴學)에서 말하는 이사무애(理事無碍)와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가 체험된 경지이다.

마음이 일어나면 법을 탓하게 된다. 즉 객관의 경계를 두고 무심하지 못하면 시비를 일으키게 되고 남을 탓하게 된다. 흔히 중생의 경계에는 공연히 한 생각이 일어나 문제 아닌 것을 문제삼아 번민하고 괴로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9년 4월 제1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