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40)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반드시 지켜서는 안되느니라

若不如此(약불여차)인대 不必須守(불필수수)니라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반드시 지켜서는 안되느니라

유무(有無)가 둘이 아닌 경계라야 진여(眞如)의 세계인데, 이것이 바로 깨달은 세계이며, 이것을 불법(佛法)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모두 버려야 한다.

깨달음으로써 법칙을 삼는(以悟爲則) 불교에 있어서는 근본 본령(本領)을 지켜야 하며, 본령이 아닌 것을 무엇 하러 지키는가. 즉 둘이 아닌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면 불법이라고 할 아무 것도 없다는 뜻에서 지키지 말라고 한 것이다.

중봉은 “유무(有無)의 정식(情識)이 다한 곳에 색공(色空)도 잊는다.”고 하였다.

신심명(39)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니

有卽是無(유즉시무)요 無卽是有(무즉시유)니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같다고 한 것도 원융무애를 설명하는 것인데, ‘있다’ 또는 ‘없다’라고 하는 것은 객관의 경계를 분별할 때 쓰는 개념에 불과하다. 주객이 끊어진 무념(無念) 속에는 어떠한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다. 몽경(夢境) 속에 있었던 것은 잠을 깨면 없었던 것이고, 없었던 것 역시 없었던 것이다. ‘있다’ 또는 ‘없다’라고 하는 것이 꿈속의 일이라면,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고 없어도 없는 것이 아니므로 있고 없음이 하나인 것이다.

중봉은 송(頌)하기를

無中現有有還無 무중현유유환무

此物應難入畵圖 차물응난입화도

笑老趙州忘管帶 소노조주망관대

强言東壁掛葫蘆 강언동벽괘호로

신심명(38)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아서

極大同小(극대동소)하야 불견변표(不見邊表)라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아서 끝과 겉을 보지 못한다

‘크다’ 또는 ‘작다’라고 하는 것은 주관과 객관이 서로 떨어진 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주객(主客)이 하나로 합해져 떨어진 거리가 없을 때에는 경계가 끊어지고 안팎의 양면이 동시에 없어지는 것이다. 즉 절대 무이(無二)이므로 하나이지만 하나라고 하는 것도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