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비유경

어느 날, 한 남자가 넓은 들판을 거닐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커다란 코끼리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사내는 언덕 위에 있는

커다란 나무로 온 힘을 다해 뛰기 시작하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언덕에 오른 사내는

나무 옆으로 깊숙이 파인 우물을 발견했다.

마침 나무 뿌리 하나가 우물 속으로 밧줄처럼 드리워져 있었고, 사내는 코앞까지 다가온 코끼리를 피해 뿌리덩굴을 잡고 황급히 우물 속으로 몸을 숨겼다.

사내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위쪽을 쳐다보았다. 그때

사내의 머리 위로 어디선가 흰 쥐와 검은 쥐가 나타나 사내가 잡고 있는 뿌리 덩굴을 갉아대기 시작했다.

사내는 다급한 마음에 더 아래로 내려가고자 밑을 보았다. 우물 아래에선 네 마리의 커다란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하물며 더 아래 우물 바닥에선 커다란 독룡이 아가리를 벌리고 독무를 뿜어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다시 위를 보니, 코끼리의 포효 소리가 들리고 느닷없이 일어난 언덕의 불길이 나무를 태우고 있었다.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하고 있던 사내의 눈에, 나무 등걸에 자리한 벌통 하나가 보였다.

그 벌통에선 한 번에 다섯 방울씩의 꿀이 떨어지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사내는 달콤한 꿀 향기의 유혹을 떨칠 수 없었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벌들이 달려들어 침을 쏘아댔지만,

사내는 아랑곳 않고 혀를 내밀어 벌꿀의 맛을 보았다.

천하에 이런 맛이 없었다.

마침내 그는 벌꿀에 취해, 꿀벌이 달려드는 것도, 혀를 날름거리는 네 마리의 독사도, 입을 한껏 벌린 채가 우물 바닥에 자리한 독룡도 모두 잊어버렸다.

머리 위에선 자기가 잡고 있는 나무뿌리를 쥐들이 갉아 먹고 있다는 사실도, 밖에선 그 뿌리가 난 나무가 통째로 들불에 타고 있고, 아직도 커다란 코끼리가 날뛰고 있다는 사실도 다 잊어버렸다.

오직, 벌꿀을 받아먹으려 혀를 날름거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 이야기에 대해 부처님은 자세히 해설을 해주셨다.

사내가 노닐고 있던 언덕은 무명(無明)을 뜻한다.

즉, 갈 길도 방향도 모르는 채 어둠 속을 해매고 있다는 것이다. 코끼리는 무상, 즉 덧없음을 뜻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인간도 결국은 나고 병들고 늙고 죽는다는 것이다. 사내가 몸을 숨긴 우물은 현실의 삶, 생사를 말한다. 사내가 잡고 있는 나무와 뿌리덩굴은 목숨을, 그 목숨을 갉아먹는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 즉 시간의 흐름을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목숨이 다한다는 것이다.

목숨이 다하면 어떻게 될까? 밑에서 혀를 날름거리는 네 마리의 독사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四大)로서, 땅, 물, 불, 바람의 4요소는 그 당시 세계관의 네 가지 근본 구성요소이다. 다시 말해, 밧줄이 끊어지면 지수화풍 사대(四大)의 구성요소로 돌아가며, 이로서 독룡으로 비유된 완전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들에 일어난 불은 늙음과 병듦을 말하는데, 이 불로서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도 이 모두를 잊고 사내가 취해있는 다섯 방울의 벌꿀은 오욕(五慾)을 말한다. 오욕이라 함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인지하는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인 눈, 코, 귀, 입, 촉감을 즐겁게 하여 일어나는 욕심을 말한다. 인간은 좋은 것을 보고, 좋은 향을 맞고, 좋은 소리를 듣고,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감촉을 느끼는 것, 이 다섯 가지의 욕심을 채우고자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혹은 이 다섯 가지를 재물, 애욕, 음식, 명예, 수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벌들이 와서 쏘는 것은 삿된 생각이 끊임없이 수시로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은 이런 삿된 생각의 따끔거리는 아픔도 견디며 벌꿀에 취해있는 것이다.

– 불설비유경

고월스님─웃어야 웃을 일이 생긴다

웃어야 웃을 일이 생긴다

-고월스님-

그냥 빙그레 미소 지을 뿐이다 나는 고정 되어 있지 않고 끊임 없이 순간 순간 변하고 있다.

이 생각 했다가 돌아서면 저 생각하고, 생각에 따라 행동도 바뀌게 된다.

이렇게 나 자체가 공하여 없으니 어떤 것도 붙을 데가 없고 붙을 것 또한 없다.

업도 고정된 것이 아니며 한 생각에 업을 지을 수도 있고 녹일 수도 있기 때문에 있다 할 수도 없고 없다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무조건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남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과거의 업을 녹이면서 새로운 업을 짓지 않게 되니 마음이 밝아지고 마음의 눈이 열리기 시작한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웃을 줄 알아야 한다 과거에 내가 지어서 온 것이니까 내가 풀어야 하고, 내가 지었으면 풀 수 있는 능력도 내게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어떻게 푸는지 알기만 한다면 그리고 그 능력이 내게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웃지 못할 것이 없다.

어떤 경계가 오더라도 그것은 과거에 지은 업식을 지워버리고 나의 차원을 높일 수 있는 기회이니 고(苦)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고 지극하게 주인공에게 맡겨 놓아라.

모든 문제는 바로 주인공이란 한 곳에서 나오며, 나온 그 곳에다 도로 놓을 때 근본적으로 해결되기 시작한다.

웃으려면 내 마음이 부자라야 하고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삶에 대한 자신감은 삶의 도리를 아는 데서 생기고, 마음의 도리를 알아 자기를 죽이는 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웃음도 나온다.

한마음의 도리를 알면 두려울 것이 없고 걱정할 일이 없다.

특별히 어쩔 줄 모를 정도로 기뻐할 일도 없다.

모두가 한마음 도리에 따라 돌아가기 때문이다.

좋은 일이 생기든 나쁜 일이 닥치든 그냥 빙그레 미소 지을 뿐이다.

주인공이 나를 이 세상에 내어 놓았고, 내가 육신의 옷을 벗고 돌아 갈 곳도 주인공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나의 근본인 주인공이 있기 때문에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닌 것이다.

돌아가는 진리를 모르면 싸울 일이 많고 원망할 일도 많지만 알고 보면 감사하지 않은 일이 없다.

이 세상 만물이 다 나의 스승이요,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를 가르치고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주인공의 나툼이다.

그러니 한마음의 도리를 알면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고(苦)를 고(苦)로 여기지 않고 웃어 넘길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미소 지을 수 있어야 내일 웃을 일이 생기게 된다.

어제 나에게 날아온 주먹을 안으로 삼켰어야 오늘 편안하게 살게 된다.

남에게 욕을 하면 욕 먹을 일이 생기듯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감사할 일이 생기는 것이다.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지 마라.

오직 마음을 도리에 맞게 쓰다 보면 좋은 일은 저절로 오게 된다.

미워할 것 다 미워하고 화 낼 것 다 화 내고서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면 안된다.

내가 지어 놓은 공덕이 없으면 부처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잘 사는 것이 영원히 잘 사는 길이다.

꽃을 추방하다

세상에는 너무 흔해지면 천해지는 것이 있다. 물론 질적인 상품 가치가 많은 것은 양이 많아도 많은 대로 가치를 인정받겠지만 그렇지 않고 별 볼 일 없는 것이 숫자만 많을 때는 어차피 천대받기 일쑤다.

반야암 주변에는 몇 년 전부터 천대받는 식물이 하나 생겼다. 달맞이꽃이라는 이름은 그럴듯한 꽃인데 이 꽃이 절 둘레에 어떻게나 많이 번식해 자라는지, 할 수 없어 나는 절 식구들에게 보이는 대로 모두 뽑아 없애라고 지시를 내렸다. 말하자면 달맞이꽃 추방작전을 해마다 전개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이 꽃을 추방하기로 결심한 것은 원래 서식한 바가 없던 이 꽃이 어디서 씨앗이 날라 왔는지 수년 전에 몇 포기가 눈에 띄더니 몇 년 사이에 그 번식이 너무 빨라 절 주위가 온통 달맞이 밭이 될 판이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던 중 마침 어느 식물에 조예가 깊은 분으로부터 이 식물은 황소개구리가 다른 개구리들을 못살게 하고 자기 판을 만드는 것처럼, 다른 식물의 성장을 방해하며 자기번식을 너무 앞세워 자라기 때문에 추방해야 되는 식물이라는 말을 듣고서부터이다.

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6~70cm정도 자라는 키와 잎도 별 볼 상이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식물과 섞여서도 혼자 무성해 보이는 자태가 왠지 얄밉기까지 한 것이다. 땅의 거름성분을 혼자 다 빼앗아 먹는 얌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나라 낮은 산야에 흔하게 지천으로 자라고 있는 개망초 보다도 번식력이 훨씬 강한 것 같았다.

식물도감에 찾아보니 달맞이꽃도 큰 달맞이꽃, 애기 달맞이꽃 등 80여 종류가 있다 하며, 유럽 원산과 남· 북 아메리카 원산이 있어 우리나라에 들어온 귀화식물이라 하였다.

이 꽃을 뽑아내면서 내가 추방식물이라 했더니 한 상좌가 불쑥 “꽃도 추방을 당해야 합니까?” 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대답이 궁색해 “꽃도 누구에게 싫어 미움을 받으면 추방당하는 거지 뭐”라고 말했다. 꽃이 추방을 당한다는 것이 좀 이상할지 모르지만, 시든 꽃을 버리는 것처럼 필요 없는 무가치로 판단되면 가치 있는 것에 밀려서 버림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나무를 키울 때 병든 가지를 쳐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또 꽃이란 말이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언어라 할 수 있지만 식물 그 자체에서 개중에는 독소를 가지고 있거나 혹은 생태계에 나쁜 영향을 주는 꽃도 있다.

그런가 하면 사회적 문화현상을 두고 꽃에 비유하여 말하는 수도 있다. 예술의 꽃이 있으며 학문의 꽃도 있다. 다시 말하면 존재의 모든 영역과 문화의 모든 영역에 꽃이 있다. 불교에서는 사람의 마음도 꽃에 비유하여 말한다. 사람 누구나가 본래의 진실하고 착하며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이 진실하고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되었을 때 마음의 꽃이 피었다고 한다. 이렇듯 꽃이란 가치의 우수성을 나타내는 말이 되기도 한다. 반면에 이 꽃이라는 말을 나쁜 의미에 붙여 쓰는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악의 꽃’이란 말이 있다. 금단의 사랑을 주제로 한 일본 영화 제목에 ‘악의 꽃’이 있으며 보들레르의 소설 제목에도 ‘악의 꽃’이 있다. 또한 문화적 현상을 가지고 말할 때 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꽃이 피어 사회에 피해를 입히는 문화의 꽃도 있지 않을까? 이럴 경우 그 문화는 저질스런 악의 문화가 되어 추방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추방당하는 것은 슬픈 일이긴 하지만 추방은 언제나 있다. 왜 추방을 당하는가 하면 전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지나친 욕심을 가져 남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거나 이기적 독단에 빠지면 추방을 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자기의 몫을 줄이고 욕심의 팽창을 막아야 한다. 수행자를 경책한 부처님 말씀에 허구한 날 좋은 음식만 챙겨 먹으려 애쓰는 사람은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먹는 것이라 하였다.

요산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6월 제 7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