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집성제 그러면 왜 이렇게 모든 존재들이 고(苦)의 상태에 있는가? 존재하려고 힘들이는 것은 갈애(渴愛)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갈애로부터 번뇌가 생깁니다. 갈애가 있기 때문에 윤회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무명에 의해 고(苦)가 발생하는 과정을 열 두 가지의 인과의 고리로 설명한 것을 12연기라고 합니다. 인간의 감정, 욕망, 질병, 충동, 노쇠, 질병, 죽음 등은 하나의 현상입니다. 이 현상은 어떤 원인에 의해 생성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커다란 인과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또한 생성소멸 한다는 연기의 법칙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고(苦)도 그것을 일으키는 원인과 조건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월:] 2015년 12월
고산스님─(4)큰스님! 삶의 지혜를 주십시오
큰스님! 삶의 지혜를 주십시오
문/타 종교와 다른, 불교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답/모든 종교가 ‘사람을 선(善)하게 만든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흔히들 ‘종교는 다 똑같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는 자신의 행복을 구하는 데서 출발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전 인류를 구제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가르침 또한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나 평등 하게 적용할 수 있고, 그 가르침 속에서 향상의 길로 나아갈 수 있어야 참된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행복해지고,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참되게 살아도 구제될 수 없다” 는 식의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유일, 절대권한의 신 앞에서 언제나 수용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면, 이는 인간을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그럼 불교만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불교는 믿어야 할 절대적인 대상이 없는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어둡고 어리석은 사람을 밝고 슬기롭게 변화 시켜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교의 목표입니다.
따라서 객 관적인 믿음의 대상이 꼭 있어야만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깊숙한 곳에 잠재된 불성(佛性)을 찾기만 하 면 행복해질 수 있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둘째, 불교는 신(神) 중심의 종교가 아니라, 인간 본위 의 종교입니다.
신이 혜택을 주거나 삶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수행과 정진만이 행복을 좌우한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종교입니다.
유일신에 매달리는 자만이 선택받을 수 있다는 논리는 불교의 평등사상과 질적으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 종교가 어떠한 자격이나 전제조건 없이 모두 에게 평화와 향상의 길을 열어주는 종교인지를 되새겨 보고, 참된 진리를 일깨워주는 가르침이라는 확신 속에서 종교를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셋째, 불교는 평등한 종교이며, 타력신앙이 아니라 자력 해탈(自力解脫)의 종교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이나 문수, 보현보살, 소나 개와 같은 축생, 나아가 산천초목까지도 하나같이 평등하여 그 생명이 존귀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곧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자질을 인간 만이 아니라 일체 미물들까지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에 누구든 석가모니처럼 될 수 있음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마음에 낀 때를 씻어내어 무명을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때를 씻고 해탈하면 행복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 입니다.
문/일반인들은 불교를 알고 싶어도 한문 경전을 가까이 할 수가 없고, 어렵다고들 합니다.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답/요즘은 옛날과 달라서 팔만대장경이 모두 한글로 번역 되어 있고, 옛 고승들의 어록도 한글로 되어 있습니다.
또 불교서점에 가면 부처님 일대개를 비롯하여 알기 쉬운 불교 상식 책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거런 책들을 사서 마음을 모아 정독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읽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가까운 절에 계신 스님을 찾아가서 여쭈어 보기도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기 도 하십시오.
그렇게 하다 보면 자연히 깊게 들어가게 됩니다.
-월간 [법공양]에서
2. 육바라밀의 실천
2.육바라밀의 실천 이러한 여러 가지 수행과 기도 외에도 행복과 해탈에 이르는 길로서 불교에서는 다양한 실천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8만4천 법문이 모두 그 내용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중에서 육바라밀(六波羅蜜)은 대승불교의 보살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6섯 가지 해탈에 이르는 길을 간명하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육바라밀이란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반야(般若) 바라밀을 말합니다. 첫째 보시란 남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베푸는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말을 베풀어 괴로움에 빠진 이웃의 마음에 평화를 주며, 물질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재물을 베풀어 기쁘게 해주며, 진리에 목말라하는 이들에게는 감로의 법문을 내립니다. 이름하여 나의 지식, 나의 재산, 나의 사랑, 나의 말, 나의 모습 그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나의 존재 자체가 세상에 평화를 주는 밑거름이 되지요. 자비의 실천은 이런데서 나오기 마련입니다. 둘째 지계란 계율을 지키며 잘 간직하는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깨끗한 마음가짐으로 올바로 행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스러운 말이나 폭력을 행사하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으며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는 도덕적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셋째 인욕이란 참고 감내하는 행위입니다. 어떠한 고난이 닥치거나 모욕적인 대우를 받았다 하더라도 거기에 굴하거나 성내지 않고 그것을 끝까지 인내하면서 극복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성내지 않고 길게 용서하며 참아내는 행위는 내 마음은 물론 이 사회를 조화와 평화로운 상태로 이끌게 됩니다. 넷째 정진이란 끊임없는 불굴의 노력을 말합니다. 적당히 쉬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흐트러짐이 없이 마음과 몸을 다해서 움직이며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상생활에서 보면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아나가는 것이며 수행하는 입장에서는 일체의 망상을 접고 쉼없이 마음을 다하여 정신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선정이란 정진을 통해 마음이 어느 한 대상에 집중되어 통일된 상태를 일컫습니다. 그렇게 통일된 상태에서는 나도 잊어버리고 상대도 잊어버립니다. 그저 맑고 순순한 의식만이 살아 숨쉴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순간에 사태를 아무런 가감이 없이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물의 실재를 정확히 응시하는 지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를 여섯 번째 반야(般若)라 합니다. 이러한 반야의 지혜로 관조하여 나와 너의 분별, ‘나’라는 의식조차도 떠나기 때문에 보시를 함에 있어서도 무차별적 보시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요 인욕행을 실천함에 있어서도 ‘나’라는 그림자조차 없기에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육바라밀의 근저에는 지혜 바라밀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수행의 목적이 지혜를 얻기 위한 과정이란 점에서 반야바라밀의 실천이야말로 대승불교 최상의 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을 요약하여 정리해 보면 정진의 힘으로 선정에 이르고, 선정의 경지에서 반야의 지혜를 얻어 일상생활 속에서 보시 및 인욕, 지계를 실천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육바라밀의 실천을 통하여 나는 물론 이 사회가 맑고 깨끗해져 불국토가 실현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걸림없는 자유로운 삶이요, 참 불자의 신행생활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도와 수행도 육바라밀의 실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