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봉스님─사람목숨

사람 목숨

-경봉스님-

여러분이 집에 꿀치는 벌을 먹이면 그 조그마한 것이 꿀을 치려고 삼십리 밖에 나가 꽃가루를 묻혀서 향기를 취해오면 아직 날개가 안난 벌은 그 안에서 꿀치는 데까지 운반을 해주는데 그 집안에 사람이 죽어서 벌통에 부고를 부치면 벌목에 흰테를 두르고 나온다..

그러니 여러분은 무엇을 하든지 놀고 먹어서는 안되고 자기가 노력을 해서 먹고 살도록 해야된다…..

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진리적이요 과학적이요 철학적이다.

무엇이든지 이치에 당해야 되지 이치에 안당하면 안된다.

내가 전번에도 얘기했지만…

부산에 있는 어느 집에서 쥐약을 쳤는데 그 쥐약을 먹은 쥐도 죽고 또 그 쥐를 먹은 고양이도 다 죽게 되어서 집주인이 그것을 보고 그 고양이와 쥐를 위하여 [마하반야 바라밀다심경] 이백칠십 자를 읽는데 다 죽어가는 고양이가 주인앞에 쫒아와 엎드려서 그 심경 읽는 소리를 다 듣고 숨을 거둔다.

소나 개나 말이나 이런 짐승에게 경을 읽으면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부처님의 진리법문이기 때문에 귀를 통해서 심장으로 들어가면 속이 시원해져서 가만히 듣고있다.

서울 세검정에서 나무뿌리를 가지고 물건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 며칠전에 정신이상이 되어서 여기 왔는데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내가 집안에 나무뿌리를 여러개 파두었더니 개미 수십만 마리가 집안을 하도 더럽혀서 그 개미를 휘발유를 뿌려 죽였더니 그로 인해 정신이상이 생겨서 여기 왔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마음으로 참회하라고 했더니 요즈음은 병세가 좀 나아졌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

부처님이 여러 제자를 모아놓고 “인명이 어느 사이에 있느냐?”

이렇게 물으니 한 제자가 “수일간에 있습니다” 이랬다.

사람이 살다가 수일간에 죽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너는 공부 못하겠다” 그러고는 다른 제자에게 묻기를 “인명이 어느 사이에 있느냐?” 하니까

“밥먹을 사이에 있습니다” 이랬다.

“너도 공부 못하겠다” 그러고 또 물었다.

“인명이 어느 사이에 있느냐?” 이렇게 물으니 한 제자가 이렇게 말했다.

“호흡지간에 있습니다” 숨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너는 공부하겠다” 이랬다.

이와같이 사람의 목숨은 눈 깜짝할 순식간에 달려있다.

3. 그 밖에 여러 전각과 요사

3. 그 밖에 여러 전각과 요사 칠성각 큰법당 주변으로는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 삼성각등이 자리를 잡고 다소곳이 앉아 있습니다. 이곳은 우리나라 토속신을 수용한 공간으로 전(殿)보다는 격을 낮추어 각(閣)이라 불립니다. 산신각(山神閣)은 신령스러운 산신을 모신 곳입니다. 산신은 사찰과 산을 찾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여러 가지 뛰어난 덕을 지니고 있습니다. 칠성각(七星閣)은 밤하늘에 빛나는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칠성님을 모신 곳으로 칠성은 인간의 수명과 건강을 관장합니다. 독성각(獨聖閣)에는 나반존자(那畔尊者)라 일컬어지는 독성이 모셔져 있습니다. 독성이란 부처님 없는 세상에 태어나 홀로 수행하여 깨친 분을 일컫습니다. 신통력이 뛰어나며 말세 중생을 제도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삼성각에는 산신, 칠성, 독성이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큰법당 들어서기 전 좌우에는 여러 가지 요사(寮舍)가 들어서 있습니다. 그러니까 법당과 누각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좌우편에 요사가 들어서 있는 것이지요. 이 요사는 요사채라고 하는데 스님들의 수행공간이자 생활공간을 말합니다. 좌선 공간도 이곳에 있으며 스님들이 경전을 공부하는 곳도 여기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밖에 스님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공양을 하고 대중공사를 벌이는 대중방도 이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요사 뒤편에는 스님들의 개인방과 부엌인 정지간, 화장실인 해우소(解憂所)가 있습니다.

초기경전 (5)중아함경

『중아함경(中阿含經, Madhyamagama)』은 60권으로 되어 있는 경으로, 불교의 근본 교리가 이론화되는 초급 경전 구실을 하고 있다. ‘중아함(中阿含)’이란 본래 중간쯤 되는 길이의 설교를 모았다는 뜻으로 ‘장아함(長阿含)’처럼 길지도 않고 ‘소경(小經)’처럼 짧지도 않은 중간의 경이란 뜻이다.

이 경의 중요 내용은 그 교의가 4제(四諦) 12인연(十二因緣) 등이며 그 외 많은 인연 비유가 설해져 있다. 다소 지리한 교설이 거듭 설해지고 있지만 수도자의 언행에 대한 것과 소승의 불타관을 명시해 놓은 전형적인 경이기도 하다. 불교의 근본 교리 중 가장 중요한 교의로서 불교의 인생관, 생활관 그리고 수행자의 수도관을 명시해 놓은 것이 사성제 법문이다. 다시 말해면 불교 교리의 핵심인 이 사성제(四聖諦)는 『중아함경』에 설해진 부처나 말씀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모든 불교 경전에 공통으로 설해지고 있다.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라는 뜻인 사성제(四聖諦, Cat?ri-?ryasatyvni)는 고성제(苦聖諦), 집성제(集聖諦), 멸성제(滅聖諦), 도성제(道聖諦)이다. 불교의 관점은 인생을 괴로움이라 보는 데서 시작된다. 괴로움을 직시하고 이 괴로움을 해결하려는 것이 불교이다.

고(苦)란 범어로 ‘Dubkha’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이 드는 것을 말하며, 현대적 개념으로 불안·초조·갈등 따위가 모두 고(苦)의 개념 속에 포함된다. 불교는 인생의 시작에서 끝까지가 고통이라고 설명한다. 태어나는 것에서부터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고통일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끼리의 관계와 세상의 갖가지 경계에서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애별리고(愛別離苦)라는 것이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느끼는 고통을 말하며 반대로 원증회고(怨憎會苦)는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괴로움이다. 사람에게서뿐만 아니라 주변의 환경에서 볼 때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잃게 되면 괴로워지는 법이요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당하게 되면 또한 괴로워지는 것이다.

원하는 바 자기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것 또한 고통이다. 이것을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고통이라 하여 구불득고(求不得苦)라 한다. 또 사람의 몸 육체의 생리적 욕구 때문에 우리는 괴로움을 당하는데 이것을 오음성고(五陰盛苦)라 한다. 오음(五陰)이란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 곧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다. 육체란 의식주를 필요로 하며 이것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생리적으로 고통을 당한다. 배고픔이나 목마름 또 추위나 더위로 인해 육체가 겪는 고통은 모두 오음성고(五陰盛苦)이다.

고(苦) 자체의 성질을 나누어 설명하는 고고(苦苦)·행고(行苦)·괴고(壞苦)의 삼고(三苦) 설명도 있다. 고고(苦苦)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외부의 조건에서 오는 고통이다. 날씨가 추워지거나 더워지는 것은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환경으로부터 오는 조건에서 당하게 되는 고통이다. 행고(行苦)란 변화되어 달라져 버리는 데서 오는 고통이다. 모든 것은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현상의 모습에서 볼 때 본래대로 존속되는 것은 없다. 사람이 늙는다는 것도 하나의 행고(行苦)에 해당된다. 괴고(壞苦)의 괴(壞)자는 ‘파괴된다, 부서진다’는 뜻이다. 좋았던 일이 끝장났을 때 아쉽고 허전해진다. 부서진다는 것은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이요 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는 것은 크나큰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고(壞苦)이다.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라는 말이 있다. 삼법인(三法印) 또는 사법(四法)에서 설해지고 있는 말로 일체개고(一切皆苦)라 하는 것은 인생과 세상을 고통으로 보는 불교의 관점이다.

『아함경』에서 설해지는 대의(大義) 중 가장 중요한 네 가지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고(苦, dubkha), 무상(無常, anitya), 공(空, ??nya), 무아(無我, an?tman)이다. 괴로움과 덧없음 그리고 실체 없는 헛된 것과 ‘나’라는 것이 없다는 이 네 가지 말씀이 바로 『아함경』 전체에 설해져 있는 부처님이 가장 자주 말씀하신 대표적인 말씀이다. 이것을 설해 놓은 것이 부처님이요 이것을 설하지 아니하면 부처님 법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비구여, 너는 저 일체의 모든 것이 멸하여 없어지는 것을 본다. 비구여 네 뜻엔 어떠하느냐? 색(色은) 항상한 것인가? 덧없는 것인가?”

“덧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덧없는 것이라면 이것은 괴로움인가? 괴로움이 아닌가?”

“괴로움입니다.”

이러한 대화 속에 고(苦)를 설하고, 이 고(苦)가 무상(無常)과 연결되어 설해지고 있다. 고는 인간과 그 주변의 현실 경계가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임을 결과적으로 결론지어 놓은 것이다. 인생은 괴로운 것이다. 세상은 무상한 것이다. 이 정의를 내리고 다음에 고(苦)의 원인을 찾아낸 것이 집성제(集聖諦)이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3년 1월 (제26호)